"살면서 내가 이렇게 주인공이 되어보네요."

조회수 2020. 4. 27. 12: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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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뉴그레이가 만난 마흔 네 번째 아빠의 이야기와 사진을 담았습니다.
정덕원(57, 교육청근무)

우리의 부모님 세대에도 베이비 붐(Baby boom) 세대가 있었다. 1990년대 초의 베이비 붐 세대와 달리 그들의 "베이비 붐 세대"는 다른 말로 ‘희생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역시 그 희생의 세대였다.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하고 싶었던 공부를 포기하고 교편을 잡았다. 더 뉴 그레이 촬영 역시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가족을 위해 참여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희생의 세대"에서 자란 그의 삶의 모두를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분명한 건 그의 희생을 그는 결코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교편을 내려놓고 교육청에 계신데, 학생들 그립지 않으세요?

 

+ 1989년에 처음 교사가 됐어요. 그 이후에 장학사를 7년 정도 했고, 교감과 교장을 거쳐 지금은 교육청에서 교육지원과장을 하고 있어요. 관내 초교들의 교육과정 운영 같은 일을 하고요. 아무래도 아이들을 떠난 게 가장 아쉽지만, 아이들에게 떨어져 있어도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마무리는 학교에서 하고 싶습니다만.

 

+ 작년에 히말라야에 다녀왔어요.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학교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친구들 60여 명을 데리고요. 안다 푸른다 베이스캠프가 해발 4300m에요, 고산병이 있는. 12일 동안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 아이들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끈기도 있고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도 있더라고요. 물론, 지금의 제도와의 간극 사이에서 아이들의 방식대로 표출을 하다 보니 다툼이나 삐걱거림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도전적인 주제가 생기니 아이들이 함께 극복해 나가더라고요. 아이들과 떨어져서 아이들을 위하는 일.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제공하고 싶어요. 사실 성장한 건 아이들보다, 우리 교직원들이었어요.

 

- 사모님은 어떻게 만났어요.

 

+ 제가 총각 때 친구랑 같이 자취를 했어요. 당시에 같이 살던 친구의 가족이 지금의 집사람이에요. 친구의 조카를 돌보는 모습이 굉장히 따듯해 보여서, 제가 대시를 했어요. 돌이켜보니 저는 자상하지도, 따뜻하지도 못한 남편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가장으로서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묵묵히 곁에서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을 키울 때도 그랬고요. 제 생각을 강요한 적도 있지만, 최대한 많이 보여주고, 많이 느끼게 해 주려고 노력했어요.

 

- 아버님의 아버님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 나의 부모는 전후 세대, 그러니까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낳고 키워주셨어요. 당시의 어느 가정들처럼, 본인들은 먹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헌신하고 희생했죠. 스스로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며 자식들을 키우고 성장시켜 주신 것 같아요.

 

+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저도 제 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원래는 치과의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부모님도, 조부모님도 치아에 질환이 있으신데 치과를 한 번을 안 가셨어요. 식사도 어려우신 상황인데 민간요법인 소금으로만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걸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돈이 들잖아요. 그래서 욕심부릴 수 없었죠. 저는 2남 2녀 중 장남이었거든요. 4명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게 당시의 상황으로 정말 정말 힘든 일이었는데, 그걸 다 하셨어요.

 

+ 내 부모님을 생각하면 항상 이게 제일 먼저 떠올라요. 고향이 전남 순천인데, 옛날에 지방철도청이 있었어요. 직원을 뽑는 날이었던 것 같은데, 철도청 운동장에서 짐목을 매고 경기를 해 선착순으로 들어와야 뽑아주는 시험에 아버님이 응시를 했어요. 그걸 매고 1등으로 들어오시고 행복해하셨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30여 년을 학교에서 보냈지만, 그는 은퇴 후에도 학생들과 관련된 단체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교사는 늘 학교에서 학생과 함께 해야 한다고.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보다 가족이 먼저였고, 자신 보다 학생이 먼저였다. 오늘의 촬영 역시 가족과 함께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한 추억이 있어야 인생이 풍부해질 수 있다고.

#OFFTHERECORD

 

아빠 : 오늘 재형이 데리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엄청 찍었을 거야.

아들 : 아니, 아빠 왜 이렇게 잘해?

#아빠에게  

 

아빠, 아들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기숙사에 살았고, 대학은 집과 멀어져 바쁘다는 핑계로 아빠랑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아서 신청했어요.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 보내고 싶어서요.  

어렸을 때, 아빠는 나와 동생을 카메라에 담기만 했지 아빠가 카메라 앞에 선 적은 없잖아요. 촬영을 거부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카메라 앞에서 하나도 어색하지 않던 아빠의 모습에 나랑 엄마가 어색했던 거 알아요?ㅎㅎ  

사진 찍던 날, 수십 번 참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촬영하는 내내 즐거웠던 우리 가족과 사진 속에 담긴 아빠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중에 이 사진을 본다면 이때의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라 하루 종일 기분 좋을 것 같아요.  

 

나와 동생, 그리고 엄마를 위해 희생하는 아빠의 마음을 알아요. 항상 본인보다 우리가 먼저였던 아빠에게 미안하고 감사해요. 어렸을 적에는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저와 동생을 끌고 다닌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제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경험이 되었어요. 잘못된 행동을 하면 모질게 혼내주신 덕분에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무슨 일이 있거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언제나 저를 믿어주시고, 묵묵히 뒤에서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리고 아빠. 나는 아빠 엄마가 어떻게 만났는지 아빠 인터뷰를 보고 처음 알았네. 평소에 왜 나랑 동생한테 이런 얘기 안 해줘요. 나중에 네 명 모이면 이 얘기 들어야겠다. 우리 가족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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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홀로 계신 강진 아버지를 아무도 모르게 우렁각시처럼 잘 챙겨드려서 항상 고맙고, 애들한테 변함없이  멋진 아빠로 자리해 줘서 고맙고, 내 결정사항을 항상 지지해주고 신뢰해줘서 고맙고, 온통 고마운 일이네! 나이 먹어가면서 남들은 외골수 고집불통으로 소통이 안되어 걱정이라는데, 애들 의견에 귀 기울여 들어주고 애들 일정에 맞추는 센스쟁이 꽃중년이 되어가는 모습 보기 좋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늘 우리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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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 재형이야, 나랑 여행 많이 다니쟈~ 사진 에뿌게 많이 많이 찍어줄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빵~ 방학마다 여행 다니는 거다~!!  

 

#남자는죽을때까지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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