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편집장이 된 93년생 인플루언서

조회수 2021. 3. 26. 12:1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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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패션 트렌드와 이슈에 대해 글을 쓰는 객원 에디터 이예은이다. ‘20대 본부장님’ 같은 비현실적인 직급은 <김비서가 왜 이럴까>, <뷰티인사이드> 같은 한국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설정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비현실적인 커리어를 가진 이가 현실에 등장했다. 중국판 <보그>에 새로 임명된 편집장이다. ‘어멋 스물일곱 살에 보그 편집장?’ 그 주인공은 93년생, 올해로 만 27살인 중국계 호주인 마가렛 장(Margaret Zhang)이다. 1892년 처음 창간한 보그 매거진 130년 역사상 가장 어린 편집장이다.

[보그 차이나의 새로운 편집장, 마가렛 장]

아버지가 보그 발행인이라든가, 최대 주주라든가 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없다. 대신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정식 에디터 경험은 전혀 없고, 100만 명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라는 것이다. 놀라운 발탁이다.

[보그 차이나 전 편집장 안젤리카 청 ⓒvogue]

마가렛 장 이전 편집장만 해도 전형적인 에디터 커리어를 쌓아온 인물이다. 전 편집장 안젤리카 청A(ngelica Cheung)은 엘르 차이나 에디터, 마리끌레르 홍콩 편집장을 거쳐 보그 차이나 런칭부터 15년을 함께했다. 39살의 나이에 편집장으로 임명되어 보그 차이나를 진두지휘하며 역사가 짧은 중국 보그를 세계적인 위치로 올려놓는 데 일조했다.

마가렛 장의 인사발령은 공개 이후 여러모로 화제였지만 아무래도 성골 에디터 출신인 전임자와는 동떨어진, 흔치 않은 이력을 가졌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패션 인플루언서라 명명했지만 사실 마가렛 장의 직업은 한가지로 정의할 수 없다. 마가렛 장은 16살 때 연 블로그, Shine by Three가 주목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뒀고 월 방문자 수가 50만 명에 육박하는 파워 블로거로 성장했다.


또 블로그를 통해 그 능력을 인정받아 사진작가, 스타일리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감독, 컨설턴트, 모델로 일하며 구찌, 디올,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와 협업해왔다. 이미 몇 차례 패션지 커버 모델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2016년엔 포브스가 선정한 30세 미만 가장 영향력 있는 30인 아시안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에디터가 아닌 패션 인플루언서가 갑자기 편집장이라니?’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미란다 편집장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작년 글로벌 보그 컨텐츠 어드바이저 직책을 새롭게 맡으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뛰어나고 다채로운 컨텐츠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직의 구조를 정의하는 것이 보그의 새로운 비전입니다.”


2021년 현재 패션 미디어의 영향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많은 팔로워를 가지고 있느냐가 되었고, 대부분의 매체는 지면보다는 디지털 컨텐츠에 주력하고 있다. 영상, 사진, 음악을 활용해 다양한 미디어를 아우를 수 있는 마가렛 장은 디지털 컨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데 전문성을 가진 인물로, 안나 윈투어의 비전에 아주 적합한 인재가 아닐까. 90년대에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그리고 인플루언서로서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컨텐츠에서 큰 시간을 할애하는 MZ세대를 사로잡을 방법을 꿰뚫고 있는 마가렛 장을 대체할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마가렛장이 본인 홈페이지에 올린 직접 기획한 에디토리얼]

패션 디자인업계에서도 마가렛 장과 비슷한 파격적인 인사 발령이 있었다. 심지어 여기는 더 어리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로샤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24살의 샤를 드 빌모랭이다.

로샤스는 1925년 설립된 프랑스 브랜드로 우아한 디자인과 정교한 패턴으로 국내에도 탄탄한 수요층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다. 로샤스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알렉산드로 델라쿠와에 이어 스물네 살의 샤를 드 빌모랭이 100년 전통의 프랑스 패션 하우스를 이끌게 되었다.

20대 중반의 젊은 디자이너가 이런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다는 건 마치 미대를 갓 졸업한 97년생 디자이너가 삼성물산 디자인팀 총괄팀장으로 임명되면서 동시에 삼성물산 이사급의 직위를 갖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까. 물론 이쪽도 로샤스에 막대한 투자를 한 사람이라거나 이름에 로샤스가 들어간다거나 하는 배경은 전혀 없다.

만 24살, 우리나라 나이로 26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 시장에 막 뛰어들거나 혹은 복학한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없이 학교에 적응하고 술을 퍼마시고 다녔던 우리들의 과거를 생각하면 괜히 숙연해진다.

[샤를 드 빌모랭의 2021 오뜨꾸뛰르 컬렉션 ⓒvogue]

샤를 드 빌모랭은 2019년 프랑스 파리 의상 조합 패션 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2020년엔 프랑스 오뜨 꾸뛰르 역사상 최연소 디자이너로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선보이며 이미 패션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구찌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뽑은 떠오르는 어린 디자이너 15인 중 하나로 선정되며 그야말로 패션계의 핫 루키이기도 했다.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관한 로샤스의 발표가 있고 난 뒤 샤를 드 빌모랭 또한 마가렛 장처럼 어린 나이로 일차적으로 화제가 됐는데 그 이후 사람들을 또다시 놀라게 한 것은 빌모랭의 수려한 외모였다. 실제로 큰 키와 마른 체형을 살려 2016년에는 발렌티노, 구찌 등의 브랜드 런웨이에 모델로 서기도 했었다.

[Gucci 2017 s/s men’s wear ⓒvogue]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추상적인 형태의 아트워크를 창조하는 샤를의 작품과 디자인은 이른바 ‘인스타그래머블’한 화려한 디자인이다. 게다가 디자이너 본인도 인스타그램을 디지털 포트폴리오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는 팔로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게 디자인을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젊은 감각과 야생적인 컬러 사용, 그리고 작품에 녹아든 독특한 창의성은 파리의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 브랜드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젊은 세대가 열광할 만한 새로운 비주얼의 방향을 구축할 것으로 기대된다.


셀린의 에디슬리먼, 루이비통의 버질 아블로, 프라다의 라프시몬스, 디올 맨의 킴 존스 등 마니아층이 확실한 스타 디자이너의 역할이 커지면서 요즘에는 명품 브랜드에서 검증된 경력직 디자이너를 채용하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유서 깊은 패션 브랜드가 경력이 전무한 젊은 디자이너를 기용하는 일은 과거에도 종종 있었다. 입생로랑 역시 그랬다.

[이브 생로랑, 1986 ⓒDior]

알제리 출생의 디자이너 입생로랑의 경우 19살 때 크리스챤 디올의 견습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이후 크리스챤 디올 브랜드 설립자인 무슈 디올이 죽으면서 입생로랑은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잇게 됐는데 그때 나이는 고작 21살이었다. 입생로랑은 젊은 나이에 당시 파리 오뜨꾸뛰르 패션계의 절반 가까운 매출을 담당하고 있는 디올 하우스의 중심에서 1,4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끌었다.


알렉산더 맥퀸이 런던의 패션 스쿨 세인트 센트럴 마틴 졸업 후 극도의 로우라이즈 팬츠인 범스터 팬츠를 선보이며 패션계에 파격적인 충격을 준 것도 24살의 일이다. 그 이후 지방시의 수석디자이너로 임명되었을 때도 27살에 지나지 않았다.


두 디자이너와 마가렛 장, 샤를 드 빌모랭의 차이라면 두 사람은 MZ세대를 사로잡을 만한 디지털 비주얼에 특화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두 젊은 리더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기대를 나타내는 이도 있지만,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있다. 일반적이지 않은 커리어와 어린 나이에 업계 종사자로서 현타 온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어린 디자이너, 편집장의 등장을 관습적인 기준을 들이대며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시대 변화이자 전략적 변화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시대는 수많은 파격과 혁신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지나친 우려보다는 그들이 가져올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관심을 갖고 지켜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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