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안경은 공짜가 아니다

조회수 2020. 5. 6.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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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가지 안경이 있다. 하나는 공짜다. 다른 건 4~6달러 정도다. 당신이 눈이 나빠졌다면 어떤 안경을 선택하겠는가.

비전 스프링 안경

당연히 공짜 안경을 선택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가난하다면 무료 안경이 더욱 필요하다. 나뿐만 아니라 이웃, 그리고 나라 전체가 부유하지 못하다면 공짜로 안경을 살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같은 맥락으로 빈민 국가나 개발도상국에 많은 '원조'를 보낸다. 그 품목도 다양하다. 가지지 못한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다는 자체가 세상을 좀 더 밝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적정 기술 관점에서 보면 원조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가난을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 있지만, 그 순환고리를 끊어내진 못한다.

다시 안경을 예로 들어보자. 평소 눈이 좋지 않은 어린이가 있다. 책을 읽는 것도 불편했다. 공부도 하기 힘들었다. 이 아이는 누군가로부터 안경을 공짜로 원조 받았다. 책을 읽을 수 있게 돼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름 성공해 가난한 고향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경제 활동을 시작했다.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부쳐주기도 했다. 이 가정은 어느 정도 가난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안경의 필요성

그러나 안경을 원조 받지 못한 옆집 아이와 고향 마을은 여전히 가난하다. 다른 아이들은 편하게 책을 읽지 못하며, 일을 하는 어른들도 침침한 눈 때문에 안전사고에 노출돼 있다. 극단적이 사례지만, 원조의 위험성을 인식하기 위해서 충분히 고려해야한다.

그렇다면 안경은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해답을 찾으려고 한 비영리단체가 '비전 스프링'이다. 비전 스프링은 2001년 설립됐다. 창립자 조단 카살로우는 앞을 잘 보지 못하는 7살 어린이에게 안경을 씌워 준 적이 있다. 시력을 되찾은 아이의 웃음을 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깨달았다고 한다.

비전 스프링은 비싼 안경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안경을 '판매'한다. 안경 제조업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안경을 파는데, 저렴하다. 돈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이나 빈민국가 사람들도 안경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안경 가격은 약 4~6달러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저렴한 안경이 몇만원 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싼 편이다.

비전 스프링 제품 규격

이 가격은 어떻게 나왔을까. 비결 중 하나는 기성품(Ready-Made) 안경이다. 우리가 안경을 구매할 때 보통 안경점을 방문한다. 시력을 측정하고 도수에 맞는 안경 렌즈를 찾는다. 안경테에 맞추기 위해 렌즈를 깎기도 한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안경을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기성품 안경은 도수별로 안경을 미리 준비하고 소비자가 그중 자신에게 맞는 안경을 선택한다.

완전 개인 맞춤식 안경을 구매하기에는 적절한 방식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대량 생산을 통해 안경 값을 충분히 낮출 수 있다. 맞춤형 안경 제작에 들어가는 인건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 비전 스프링이 안경 값을 절감하는 방법 중 하나다. 여기서는 이윤을 많이 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박스 단위로 안경을 도매할 때는 개당 1달러가 되지 않는다. 판매 가격은 최소 4달러인데, 그렇다면 나머지 약 3달러 정도는 어디로 갈까. 여기서 '비전 앙트레프러너(Vision Entrepreneur)'가 등장한다. 비전 기업가라는 뜻이다.

비전 앙트레프러너(왼쪽)과 판매를 위한 주요 물품 패키지(오른쪽)

비전 앙트레프러너는 유니레버라는 소비재 기업의 전략에서 착안한 것이다. 유니레버는 유통 때문에 인도 시장에 진출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고민 끝에 '샥티'라는 여성 판매원을 키워 제품 유통을 맡겨 문제를 해결했다. 비전 스프링도 이 샥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비전 앙트레프러너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비전 스프링 안경을 유통하는 여성 판매원이다.

비전 스프링은 현지에 있는 여성을 모집, 일정 기간 동안 교육을 시켰다. 간단한 검안이 가능하도록 훈련하고 안경 판매를 맡겼다. 이들은 샘플이 되는 안경을 들고 다니면서 눈이 나쁜 사람들에게 안경을 판매했다. 일부는 시력 정보를 기반으로 제작된 안경도 판매하기도 했다. 수익 일부는 비전 앙트레프러너가 가져갔다.

부족한 유통 인프라를 현지 여성 인력으로 메웠다. 이를 통해 해결한 것은 단순히 안경 유통 문제만은 아니다. 비전 앙트레프러너는 현지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들은 수익을 창출하면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안경이 필요하다는 1차적 시장에서 공급과 수요를 맞물리게 하는 핵심 요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활발한 경제 활동을 발생시켰다.

앙트레프러너가 수익을 얻게 되면, 원조 방식의 경제에서 탈피하게 된다. 그들은 또 다른 시장에서 소비를 하고 지역 경제라는 메커니즘이 가동하기 시작한다. 시장 경제가 무조건 성공 가도를 달리는 건 아니지만, 경제라고 평가할 수 있을 만한 체계가 첫발을 내디뎠다는 데 의미가 있다. 지역 사회의 경제 생태계가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태계는 비전 스프링의 지속성을 보장했다. 비전 스프링은 설립 후 몇 년이 안 돼 100만개 안경을 판매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세상에 뿌린 안경 수는 680만개다. 43개 국가와 협력하고 있으며, 수요자의 노동 생산성을 22~32% 끌어올렸다고 한다. 눈이 잘 보이니 노동 생산성이 높아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비전 스프링은 탐스 아이웨어와 곧잘 비교된다. 신발 브랜드로 유명한 탐스가 2011년 론칭한 프로젝트다. 탐스 아이웨어는 하나의 안경을 구매하면 하나를 기부하는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했다. 어떤 시장에서든 탐스 아이웨어 안경을 구매하면, 안경이 필요한 다른 곳에 기부할 수 있는데 전형적인 원조 방식이다. 물론 탐스 아이웨어도 개발도상국 수요자에 맞춰 백내장 수술 등 눈 질환에 대한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 그러나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비전 스프링과 탐스 아이웨어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목표는 같았지만 방법론이 달랐다. 비전 스프링은 탐스 웨어와 다르게 시장 생태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비전 스프링스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적정 기술은 단순히 '기술(테크놀로지)'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적정 기술의 여러 요소 가운데 지속 가능성을 빼놓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 외 디자인과 수요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수많은 적정 기술이 원조 혹은 기부라는 방식으로 추진했다가 실패하는 것도 현지 시장이나 디자인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정 기술이라고 해서 모두 공짜는 아니다.

테크플러스 에디터 권동준

tech-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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