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유통기한은 만년 그 이상' 왕가위에 빠지게 한 작품과 음악
독보적인 스타일로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던 왕가위 작품들이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관객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세기말 홍콩의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담아낸 영상과 인물들의 묵직한 내레이션 등 왕가위 작품의 특징들은 현대 영상 화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작품에는 영화만큼이나 화제를 낳은 노래와 음악들이 있어, 이들 멜로디를 듣고만 있어도 그 시절의 감성이 다시 살아날 정도다.
최근에는 [화양연화]을 비롯해 [중경삼림], [2046], [해피 투게더], [에로스], [동사서독 리덕스], [타락천사], [동성서취], [첫사랑] 등 그의 주옥같은 아홉 작품들을 영화 전문채널 캐치온을 통해 감상할 수 있어, ‘왕가위표 영상미학’은 안방극장에서도 계속될 예정이다. 이에 그의 대표작을 살펴보고, 영화의 감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 노래와 음악들도 함께 들어본다.
중경삼림 - California Dreamin’
1994년에 공개되어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왕가위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작품. 홍콩을 배경으로 경찰, 마약 밀매업자, 웨이트리스 등 다양한 인물들의 내면과 로맨스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며 기존 영화 문법을 벗어난 새로운 스타일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옴니버스 식 스토리 전개와 주인공들의 심리를 투영하는 음악, CF를 보는 듯한 현란하고 아름다운 이미지까지 왕가위 스타일의 진수를 보여줬다.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 등 인상적인 대사들도 많이 나와, 다소 난해한 스토리에서도 영화의 메시지를 깊이 있게 전달했다. 특히 [중경삼림]하면 조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노래 California Dreamin’은 극중 왕페이의 자유분방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양조위를 향한 감정도 독특하게 담아내어 작품의 명장면을 완성시킨다.
화양연화 - Yumeji's Theme
2000년 개봉한 작품으로 양조위와 장만옥을 캐스팅해 두 인물의 완숙하고도 비밀스러운 사랑을 세련되게 담았다. 기존 왕가위 스타일에 비해 굉장히 절제되고 중후한 분위기가 묻어나며, 스토리의 밀도가 높아 그의 작품 중 가장 친절하다는 평도 받고 있다. BIFF와의 인연이 남 다른 작품인데 2000년 영화제에 폐막작으로 선정되었고, 작년에는 리마스터링 된 작품으로 20년 만에 다시 초청되어 영화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코로나 시국으로 어려운 극장가에서도 재개봉 영화로는 드물게 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현재의 왕가위 붐을 이끌고 있는 중이다. 음악 역시 영화 속 사랑의 느낌처럼 은은하면서도 매혹적이다. 특히 Yumeji's Theme는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흘러나와 이야기의 기품을 드높이는 동시에 두 주인공의 마음을 애절하게 풀어내어 영화의 감성을 더한다.
해피 투게더 - Happy Together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두 주인공의 만남과 이별을 그려낸 작품. 흑백과 컬러의 조화 속에 왕가위 특유의 영상미가 살아있으며, 무엇보다 장국영과 양조위의 리즈 시절을 지켜보며 두 사람의 섬세한 연기를 만날 수 있는 건 이 영화만의 특별함이다. 두 사람이 탱고를 함께 추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특히 극의 배경이 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이과수 폭포는 인물의 심적인 변화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개봉 후 많은 사람들을 이 곳을 찾게 했다. 여담으로 국내에서는 이 작품의 공개 여부를 두고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97년에는 아예 개봉이 반려되었으며, 1년 후에는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나서야 청불 등급으로 만날 수 있었다. 올해 재개봉에는 무삭제는 물론, 15세 관람가로 등급이 하향조정이 되어 [해피 투게더] 이후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새삼 느끼게 한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곡인 Happy Together는 극 후반부에 등장해 빠르게 변해가는 도심의 모습을 비추며 그 속에서 사람의 감정과 사랑은 어떤 식으로 남아야 하는지 의미심장한 질문을 건넨다.
2046 - Siboney
2046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려는 작가 주모운을 중심으로 네 가지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는 작품. 극중 등장 인물과 여러 가지 코드들이 왕가위 감독의 전작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와 연관되어 있어 팬들에게는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재미를 건넨다. 왕가위 작품의 페르소나인 양조위, 장만옥, 장쯔이가 출연해 안정된 연기를 펼치며, 일본의 국민 배우 기무라 타쿠야도 함께해 캐스팅 라인업의 무게감을 더한다. 여담으로 심혜진이 이 작품에 캐스팅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에서도 촬영하려고 했으나 작품의 작업 일정이 계속 지연되어 결국 이 모든 계획이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왕가위 작품답게 영상미만큼 인상 깊은 노래가 많은데, 이중 ‘Siboney’’는 장쯔이가 열연한 백령의 심정을 담아낸 노래로 독특한 멜로디 사이로 인물이 가진 공허함과 슬픔을 잘 녹여내었다.
타락천사 - Only You
[중경삼림]에 이어 다시 한번 홍콩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사랑과 방황을 그린 작품. 사실 [타락천사]는 원래 [중경삼림]과 하나의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럴 경우 러닝타임이 과도하게 늘어날 수 있어 별개의 작품으로 독립시켜 95년에 공개되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여러모로 [중경삼림]과 스타일이 흡사하고, 몇몇 에피소드는 느슨하게나마 이야기가 연결되기도 한다. 여명, 이가흔, 금성무 등 당대 최고의 홍콩 스타들이 출연해 개성 있는 캐릭터를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중경삼림]으로 다져진 왕가위 스타일은 이 작품을 통해 더욱 눈부시게 표현된다. 특히 엔딩곡 Flying Pickets의 Only You는 [타락천사]의 명장면 중 하나인 바이크 질주씬에서 흘러나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시에 인물들의 쓸쓸하고 고독한 감성을 잘 담아내어 진한 여운을 끌어낸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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