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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리그 올스타에도 선정됐던 그의 선수 생활은 졸업 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는 '왕년의 간판'이 됐다. 갈 곳을 잃은 김준성은 카페 아르바이트, 장례식장 매니저로 '밥벌이'를 했다.
이렇게 감동적인 스토리가 또 있겠냐며
눈시울을 적시던 농구팬들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주긴완은 “한국농구를 늦게 배웠다. 울산 모비스 경기를 챙겨보며 많이 공부했다”며 “처음엔 한국농구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팀플레이에 녹아들고 있다. 요즘엔 득점보다는 궂은일을 하려 한다. 내가 득점을 안 해도 팀에 공격할 선수들이 많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주긴완은 홍콩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 국적이었던 그는 홍콩 국적으로 바꿨지만 농구를 시작한 뒤 한국 국적으로 회복했다. 홍콩 국가대표까지 지냈지만 한국에서 뛰고 싶은 간절함 때문에 바다를 건넜다. 그는 “외할머니의 유언이 한국에서 농구하는 것이었다”며 “외할머니와 사이가 각별했는데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뛰어난 신체조건, 좋은 학교, 국가대표 경력은
좋은 농구 선수가 될 수 좋은 조건이 되겠지만
'간절함'만큼 큰 무기는 없겠지요.
우여곡절 끝에 프로 선수가 된
김준성, 주긴완. 이제는 꽃길만 걷길..
그리고, 행사장의 분위기를 시종일관
'감동' 코드로 잡게 만들어준 학부모들과
비록 이번에는 선발이 되지 않은
선수들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여러분도 내년, 내후년엔 드래프트
감동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4라운드에서 조의태 선수를 선발한 추일승 감독님도 최고..
외국 출신 선수들의 지명이 대거 이뤄지면서 드래프트 판도에 변화가 일고 있다. 엄밀히 얘기하면 이들은 일반인이 아닌 선수 출신들이다. 대학 졸업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프로에서 쓸 수 있다는 판단이 서고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