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의 탈을 쓴 재능갈취

조회수 2015. 11. 12. 11: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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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뉴스
잡다한 잔재주를 부려 먹고살다 보니 종종 이런 전화를 받는다.
재능? 좋다. 기부? 좋다. 재능기부? 잘 모르겠다. 하도 재능기부를 빙자해 재능을 삥 뜯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보다.
출처: 해멍, 마음의 풍경

김칫국부터… 거절도 쉽지 않아


재능기부라는 아이디어는 매우 훌륭하다. 아이디어‘는’ 말이다. 금전적인 대가 없이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행위라니, 누구나 문화소비자이자 생산자인 이 시대에 얼마나 딱 들어맞는 컨셉인가. 그런데 이 재능기부 판에 언제부터인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쪽은 아직 기부할 맘도 없는데 저쪽에서 멋대로 ‘재능기부’라는 수표를 발행한 다음 이쪽에 당당히 결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너는 당연히 공짜로 도와줘야지 않겠니? 뭐? 돈을 달라고? 너 진짜 속물이구나.’라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 신종 노동착취(주로 청년노동)는 착취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선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다른 한물간 착취방법들에 비해 신선하다. 좋은 일 하는 데에 당신의 재능을 좀 기부해 달라는 것을 한마디로 매몰차게 거절하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재능기부 뒤 이어지는 것


그렇게 어물쩍 별로 내키지도 않는 재능기부를 맡게 되면 이어지는 것은 예의도 절차도 없는 ‘발주’이기 십상이다. ‘언제언제까지 뭐뭐 해주세요’를 통보받는 것에서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은 끝이다. 작업과정 혹은 협력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기를 기대해보지만 헛수고다. 수정사항이나 변경사항이 있으면 이쪽의 사정은 물어보지도 않고 집어던지듯(그것도 꼭 촉박하게) 통보해오고, 부탁받은 일 이외에도 몇 가지 군일을 소리 없이 끼워 넣어오기도 한다.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다.
정말 그럴 때마다 외쳐주고 싶다.

자원봉사? vs. 재능기부! 결국 자기 인건비 기부


사실 재능기부란 멋대가리 없이 해석하면 곧 자기 인건비 기부이다. 재능기부는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 인적자원에 들어가는 비용을 세이브해주는 고마운 개념적 장치이다(자원봉사라는 말에 비해 재능기부라는 말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뉘앙스의 차이를 보라!).
출처: 해멍, 표현은 마음을 정화해줍니다
하지만 재능기부에는 다른 일반적인 노동시장에서 찾을 수 없는 특별한 비용이 존재한다. 바로 기부자의 감정, 즉 선의에 대한 비용이다. 사실 재능기부에서 노동력 자체는 일종의 보너스다. 재능기부라는 교환에서 주된 교환물은 바로 기부자의 선의와 그에 대한 보상인 보람이다. 이 글이 꼬집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재능기부시장에서 일어나는 기부자의 선의 혹은 보람 떼어먹기 현상이다.

아무리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기부라는 소중한 문화가 제 이름값을 하며 성장해나가기 위해서는 이 보람이라고 하는 감정비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정산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재능기부가 재능갈취가 되지 않으려면 


재능기부를 재능기부답게 만드는 것은 기부자의 ‘기꺼이 기부하고 싶은 마음’ 혹은 ‘기부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재능기부를 요구하고 싶다면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당신의 재능을 여기에 기부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고, 또 기부를 받는 쪽에서 얼마나 이에 대해 존중과 감사를 느끼고 있는지를 잘 전달해야 한다.

치사하다고 생각하는가?
위선적인 요식행위라고 생각하는가?
좋은 일 하기도 바쁜 마당에 이런 감정노동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가?


물론 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재능기부라는 교환을 완성하는 마지막 행위단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재능기부를 많이 부탁받는 쪽은 대개 문화예술판 사람들이다. 전통적으로 이 판에는 재능착취 이전에 열정 착취 혹은 예술혼 착취라는 비슷한 구조의 등쳐먹기가 있었다. 그 관행은 여전히 남아있다. 작업에 대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면, 혹은 수많은 예술계 뒷골목 삥뜯김을 통해 계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작업에 앞서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예술한다는 놈이 돈부터 밝힌다고 비아냥거리는 문화는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작업자들의 마음에 멍울을 만든다.

작업 자체를 존중받지 못하는 것도 부지기수다. 굳이 재능기부라고 쓰고 재능착취라고 읽는 신종 착취기법으로 안 그래도 속상하고 돈 없는 작업자들을 더더욱 슬프게 만들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다. 유에서 유가 순환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기쁨이 늘고 슬픔이 줄어들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제발 재능기부를 부탁할 때에는 제대로 보람을 돌려주든가, 그게 아니면 그냥 돈을 주라!

필자 : 해멍(초대필자, 미디어 아티스트)


 놀고 먹고 자며 일을 합니다. 네트는 광대하고 인터넷의 자유는 소중합니다. 술이 없는 인생은 서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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