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조회수 2020. 12. 18. 09: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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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던 화전민 프로젝트, 홀연히 나타난 23세 선생님


■ 프롤로그

강원도 횡성에 해발 1,261m의 태기산(泰岐山)이 있습니다. 태기산은 여느 산들에 견주어 색다른 매력을 품은 산입니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은 흔히 완만하게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차츰 경사가 심해지고 정상이 가까워지면 기암괴석에 벼랑길도 만나는 패턴을 보여줍니다. 태기산은 정반대입니다. 등산로에 들어서서 10분쯤 걷다보면 홱 돌아서고 싶을 만큼 정떨어지는 급경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1단계, 2단계, 3단계로 이어지는 급경사에 벼랑길을 오르다 보면, 괜히 산에 올랐나 싶은 후회가 들기도 하지요.

출처: 송준
태기산 풍력발전소

그러나 이렇게 산의 3분의 1쯤을 오르면, 홀연히 강파른 경사가 사라지면서 완만하고 아늑한 분지가 펼쳐집니다. 약수가 흘러나오는 샘도 있습니다. 이 샘을 중심으로 일대의 1.8km 둘레를 감싸는 원시적 산성이 있습니다. ‘박혁거세와의 전쟁에서 패한 태기왕(泰岐王)이 권토중래를 꿈꾸며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태기산성(泰岐山城)’입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지리지(地理誌)」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강원도 횡성현’ 부분에는 ‘우물 하나가 있고, 5간(間)짜리 군창(軍倉)과 2간짜리 관청(官廳)이 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험하고 깊은 산속에 웬 관청과 군창이 있었을까요? 향토사학자들은 저 관청과 군창이 ‘태기왕 전설’의 증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태기산성을 지나서 계속 걸어가면 경사가 더욱 완만해집니다. 등산로 옆으로는 불쑥불쑥 벼랑이 나타나기도 하는 험한 산세인데, 길 주위의 경사는 완만하고 평온합니다. 주변 여기저기로 제법 널찍한 평지들도 적잖이 눈에 보입니다. 그렇게 등산로를 따라 나아가다 보면, 갑자기 경사가 끝나고 시야가 확 넓어지면서, 작고 아담한 오두막 지붕이 등장합니다. ‘태기분교 기념관’입니다. 기념관 옆에는 ‘태기분교’의 100평짜리 직사각형 교사(校舍) 터가 콘크리트 잔해와 함께 보존되어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들려드릴 ‘태기분교와 처녀 선생님’ 이야기가 탄생한 학교 터입니다. 위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태기산은 도입부가 가파르고, 정상부가 분지처럼 평평한 역구조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평평한 정상부에 수백 명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아낸 고달프고 애절한 한 시절의 스토리가 ‘태기분교’와 함께 숨어 흐르고 있습니다.

■ 하늘 아래 첫 학교, 초미니 학교의 탄생

해발 1,200m 산마루에 학교가 있었습니다. 아니, 학교가 없었습니다.

1965년 9월 횡성군에서 중앙 정부 주도하에 거대한 ‘화전민 프로젝트’를 벌입니다. 횡성군 안팎에 흩어져 있던 화전민들을 태기산 정상으로 불러 모아, 산마루 분지를 송두리째 화전을 일구어 농업을 진작시켜보자는 새마을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산 정상에서부터 태기분교 터를 지나 태기산성이 있는 분지까지 대대적으로 나무를 베어내고 초목을 불태운 자리에 엄청난 면적의 계단식 밭을 만들어 화전 농업을 일으키는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출처: 송준
태기분교와 계단식 밭

그러나 ‘화전민 프로젝트’는 모여든 사람들의 최소한의 생활필수 여건도 갖추지 못한 졸속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생필품을 구비한 구멍가게도, 약방도, 보건소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최소한의 야경(夜警) 인력도 없었습니다. 선생님과 교과서와 각종 문구가 수반되어야 하는 학교는 당연히 계획에 없었지요. 단지 남아도는 미국의 원조 밀가루를 1년간 무상 배급해주고, 부엌 하나 방 하나둘 달린 일자형 직사각형 하꼬방 공동주택에 소요되는 목재 따위를 공급해주는 것이 프로젝트가 제안한 혜택의 전부였습니다.

아이들은 사실상 방치되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는 80리 밖에 있는 봉덕국민학교였습니다. 학교까지 오가는 32km 험한 산길이 멀기도 했을 뿐더러, 당시만 해도 태기산은 호랑이와 멧돼지가 출몰하는 위험지역이었습니다. 초창기에 모인 74가구(399명)는 맹수와 맞닥뜨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속수무책으로 아이들을 집 주변이나 밭 근처에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홀연히 나타나 패망 직전의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Jeanne d’Arc)처럼, 난데없이 23세 묘령의 처녀 선생님이 불쑥 등장해서는 나홀로 동분서주(東奔西走), 교육청과 경찰서와 방송국 등을 들쑤시고 다니며 학교를 설립해달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처녀 선생님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산 부족을 핑계로 교육부마저 난색을 표하던 학교가 1,200m 산마루에 번듯하게 들어섭니다. 언론의 대서특필이 이어집니다. 신문들은 제목도 참 잘 뽑습니다.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탄생’. 

출처: 송준
태기분교 역사관 자료

■ 끝도 없이 피어나는 옛날이야기 꽃

40여 년 뒤 저 산골학교 졸업생들이 옛날 선생님이 그리워 모임을 만듭니다. 벌써 10여 년째입니다. 이제는 팔순이신 선생님을 모시고, 60~70대의 백발이 성성한 ‘꼬마’들이 모여서 옛날이야기도 실컷 하고, 맛난 거 먹고 마시고, 노래방도 가서 가무를 즐기며 회포를 푸는 모임입니다. 2018년 11월 17~18일, 학교 설립 50주년(첫 분교 개설 및 입학은 66년, 정식 개교년도는 68년) 동창회가 원주 치악산의 한 펜션에서 1박2일 모임을 가졌습니다.

출처: 송준
이명순 선생님과 제자들
“우리 모임 있는 날은 아무도 못 말려요. 가족들도 선선히 잘 다녀오라고 그래요.”

“그때 난로에 석유 뿌린 놈이 너지?”

“미안, 미안. 얼굴 다 타버린 줄 알았더니, 흉터도 없이 깨끗하네. 다행이다.”

“얘는 큰딸하고 나이 차이가 17살밖에 안 난대요.”

“내가 그럴 줄 알았나? 아버지 모셔준다고 들어와 살으라길래 걍 드간 거지.”

“쟤는 공무원 잘 하더니 어쩌다 춤제비가 돼서 왔대니.”

왁자지껄 옛날이야기 꽃이 흐벅지게 피어나는데 문득 출입구 쪽이 어수선해집니다. 몇 사람이 일어나서 현관으로 나가 누군가를 맞이합니다. 갑자기 울음이 펑 터집니다. 이윽고 육순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이 선생님 앞에 몸을 던지고 절을 올립니다. 울음이 잦아들자, 밖에 손짓을 합니다. 헌헌장부와 꽃선녀 커플이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들어와 선생님께 인사를 합니다. 50년 만에 처음 동창회에 나온 아주머니가 아들과 며느리 부부를 데려와서 선생님께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 세월과 추억의 스토리텔링

이튿날 제자들과 함께 옛 학교 터를 찾았습니다. 학교 터는 건물이 철거된 채 바닥 부분이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옆에 서 있는 ‘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기념관’ 벽에는 옛날 사진이 동판에 선명하게 새겨져 걸려 있습니다. 사진을 살펴보는 ‘백발 꼬마’들 사이에서 까르르 이야기꽃이 피어납니다.

니가 밀가루 지겹다고 아침마다 몰래 선생님 집에 가서 쌀밥 얻어먹었다며?”

“니는 청소도 니가 더 잘한다고 쌀밥 니만 달랬다며?”

“여기가 운동장이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바뀌었네.”

걸음을 옮겨가며 각자 자기가 살던 집 자리를 소개합니다.

“와, 여기 우리 스키 타던 데 아이가. 스키 잘 만들던 형아 어디 산대니?”

“저기는 군인 아저씨가 합기도 가르쳐주던 데.”

“선생님 집이 아마 저기 있었지?”

“맞다. 저 냇물 맞은편이 대장간이고.”

세월은 흘러도 마음 속 풍경은 변하지 않는가 봅니다. 다들 생글생글한 꼬마의 눈빛이 되어, 옛날 옛적 집과 학교와 놀이터의 기억들 사이로 소복하게 침잠합니다. 학교는 개교한 지 8년 만에 폐교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 화전마을 태기리는 주민들을 모두 소개(疏開)한 뒤 이름뿐인 법정리(法定里)로 남았습니다. 세월은 가고, 추억은 남았습니다. 학교는 가고, 사람은 남았습니다. 학교가 세워졌다가 떠난 자리,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그리움을 키워낸 자리, 그 소중한 연대기의 스토리텔링을 이제 시작합니다.

(계속) 


필자 소개: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해 어언 30년째 글밥을 먹고 있다. 1995년 무렵부터 건축 분야를 맡게 되면서 늦깎이로 독학의 계단을 올랐다. 『공간Space』, 『건축인Poar』, 『플러스Plus』 같은 건축 전문지에 인터뷰 원고와 리뷰·건축 칼럼을 썼고, 집도 직접 두어 채 지어보았다. 2010년에는 서울시가 주최한 [서울건축문화제Seoul Architecture Festival]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 영국 건축문화기행 『건축의 표정』(글항아리, 2017)과 예술인 에세이 『바람의 노래』(동녘, 2010), 영화 이야기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심산, 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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