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옥을 보았다

조회수 2019. 3. 14. 18: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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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전에 본 기사는 정준영 상대로 지목된 여성의 얼굴이 떡하니 박힌 기사였다.

오래전 일이다.

홍콩에서 어느 연예인의 성행위 사진 유출 사건 터졌을 때 나는 태국에 있었다. 파타야 부근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현지 가이드가 노트북으로 내게 그 사진을 보여주더라. 너무 당황해서 얼굴을 돌렸다. 현지에서 합류해 같이 여행하던 남자들은 감탄사를 내질렀다.

“형! 영상 있어요? 같이 봐요!”

“우아 이걸 실시간으로 보네. 아직 한국에는 풀리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면서 가이드의 노트북에 고정된 시선을 풀지 않았다. 곧이어 여성의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쿨한 척 “새끼들…” 하고 그 자리를 떴다.

그 가이드의 집에서 숙박까지 했던 일정이었다. 수영장에서 앉아 맥주를 한잔하고 있는데 서넛 명의 남자애들이 그 밤에 쪼르르 나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여자애가 “뭐야?! 뭔데?? 왜 니들끼리 나가? 같이 놀자! 우리도 심심해” 그러면서 그 무리에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자 남자애들의 얼굴에 당장 당혹스러움이 비쳤다. 눈치가 빠르고 ‘쿨병’에 걸려있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다 좋은데 가기 전에 OOO편의점 들렀다 가라.”

그 말 뜻을 여자애들은 못 알아들었지만, 남자애들은 “햐, 역시!” 그러면서 엄지척을 해주고 떠났다. “OOO편의점 들렀다가 가라”는 말은 성매매하기 전에 콘돔은 꼭 사서 가라는 뜻이었다. 남자애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OOO편의점 들렀다가 가라”는 워딩은 당시 태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가이드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22살 때 태국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들었다. 워낙 공공연한 말이라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이렇게 말하더라:

“남자분들 명심하세요. 자유시간에 콘돔은 필수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OOO편의점은 꼭 들렀다 가세요.“

그 워딩을 나는 가족과 함께 들었고, 외웠고, 내내 써먹었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들과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된 나는 다음 여행지인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간 이유는 토마토 라면을 먹고 화장품을 사기 위해서였는데, 그곳에서 나는 지옥을 보았다.

홍콩의 상가마다 TV에는 유출 사건의 장본인인 남성 배우 XXX의 상대 여성 모습이 온종일 방영되었고, 매대에 나와 있는 잡지 1면엔 그 여성들이 나체로 섹스하는 모습이 크게 박혀 있었다. 잡지가 참 불티나게 팔렸다. 얼마나 잘 팔렸는지 타르트 가게에서도 그 잡지를 팔았고, 아이들의 문구를 파는 곳에서도 그 잡지를 팔았다. 지하철 입구에서도 팔았고, 그냥 눈을 한번 쭉 돌리면 세상에 온통 그 잡지가 매대에 꽂혀있었다. ‘개념녀’, ‘쿨병’이 단단히 들었던 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 소동이 끊이질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어젯밤엔 누가 강으로 투신해서 구조대가 출동했다는 뉴스가 떴다. 뉴스 화면에 절반은 구조 영상이었고, 절반은 그 여성의 얼굴이었다. 여성의 얼굴 다음 장면으로는 XXX의 얼굴이 나왔다. 여행자인 신분이라서 식사는 다 밖에서 해결했는데, 그때 식당과 거리에서 본 홍콩 여성들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그건 절망과 참혹함이었다. 몇백 명의 여성의 나체가 세상에 뿌려져 있고, 그 여성들이 차례로 죽거나, 죽어가는 과정을, 제대로 목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나 역시 밥맛도 없고, 때때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원치 않게 XXX의 성기만 수십 번은 본 거 같다. 나는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죄책감이 많이 들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좀 나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말이 통하고 글을 읽을 수 있으니 더한 지옥이 펼쳐지더라. 개념녀와 쿨병이 걸린 나를 당시에 내 남자사람친구들은 거리낌없이 대했고, 덕분에 나는 인간관계를 대대적으로 정리해야만 했다. 뭐 딱히 명분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그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내가 너무 아파서 그랬다. 안 그래도 여행 내내 세상에 발가벗겨진 기분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귀국했는데, 귀국해서 돌아온 내 세상은 나에게 죽어라 죽어라 하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나. 내가 좀 전에 본 기사는 정준영의 상대로 지목된 여성들의 얼굴이 떡하니 박힌 기사였다.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심지어 정준영은 명백한 범죄자인데도 대중은 피해자가 누군지 궁금해한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보며 나는 또 얼굴을 못 들겠다. 나는 또 세상에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 나는 또 절망하고 참혹하다.

나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그저 정준영이 크게 처벌받고 사회로부터 격리되길 바란다. 그리고 정준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남성들이 발가벗겨지길 원한다. 그래야 내가 좀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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