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리뷰 : 합리적 변절을 넘어서
합리적 변절을 넘어서 – [밀정] 리뷰
이마누엘 칸트와 프리드리히 헤겔 이후 이성(理性)은 신학을 대신한 절대 진리였다. 이성은 한계가 없었다. 시행착오가 있어도 그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변절은 이성의 산물
세계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철저하게 이성적이었다. 인간을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 가스실 처형 등을 고안했다. 이성을 토대로 한 비극의 정점은 결국 집단 학살과 전쟁이었다.
시야를 조금 좁혀서 일제강점기의 한반도를 보아도 철저한 이성의 산물이 눈에 띈다. 개화를 꿈꾸던 청년들이 근대화의 모델로 바라보던 일본은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긴 데 이어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했다. 평화 시위를 지향했던 3·1운동은 끝내 실패했다.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국내에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독립운동에 회의를 느끼던 사람들은 자치론자로 변했고, 철저한 이성적 사고를 하는 윤치호 같은 사람은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움직이는 한국인은 자발적으로 독립하기 어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 말석을 차지했던 일본 제국은 거침없이 중국 대륙으로 손을 뻗치고 있었다. 생존 본능이 이성적 사고를 함에 따라, “독립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탄생한 계층이 친일파이다.
갑신정변 이후 친일적 사고방식을 가졌거나 일본의 국권 침탈의 수족 노릇을 했던 사람들은 고위급 친일파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밑바닥에서 일어나 살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수족 노릇을 했던 사람들도 곧 중·하위급 친일파 그룹을 형성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립은 헛된 미망에 불과했다. 일본이 저렇게 잘 나가는데 무슨 수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지 의아한 일이었다.
이것은 이성적 사고였다.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부인했다. 생존 본능이 이성적 사고를 함에 따라, 춘원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로로, 금동 김동인은 히가시 후미히토로 다시 태어났다. 프로 고문 경찰 노덕술과 하판락도 그런 사고의 결과물이었다.
‘밀정’의 이정출(송강호 분)은 조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경부(현재의 경감이나 경정)에 오를 정도로 열성적이고 능력 있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 경찰관이다. 원래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가 배신한 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대일본 제국을 위해 충성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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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
마르틴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력해 대학 총장이 됐다. 반대로, 카를 야스퍼스는 유태계 부인과 이혼하라는 나치의 압력을 거절한 뒤 대학 교수 자리를 잃고 저서들은 발매금지 대상이 됐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이렇게 한계 상황을 맞이한다. 야스퍼스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며 이에 굴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존재를 ‘포괄자(das Umgreifende)’라고 명명했다.
이성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성의 한계를 정의하며, 이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 것이다. 아내와 관련된 일화는 야스퍼스의 철학을 대변하는 좋은 예시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정출은 원래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가 경무국 경부가 됐다. 퇴로가 막힌 채 몰린 옛 친구 김장옥(박희순 분)은 그를 마주한다. 이어 총알이 박힌 엄지발가락을 스스로 부러트린 채 이정출을 거침없이 질타한 뒤 자살한다.
이어 이정출에게는 2개의 전환 계기가 찾아온다. 눈앞에서 자살한 김장옥의 모습이 하나의 영상처럼 이정출의 뇌리에 박혔다는 것이고, 경무국의 히가시 부장(츠루미 신고 분)이 그에게 의열단에 잠입할 것을 명령했던 사실이다. 그것은 이정출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이성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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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예의로 대하며 천천히 자로를 이끌자 자로는 후에 유자(儒者)의 옷을 입고 스승에게 드릴 예물을 가지고 문인을 통해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 [사기] ‘중니제자열전‘중 일부
그런 가운데 결국 이루어진 정채산과의 만남 이후 이정출은 마치 공자를 만난 자로처럼 변한다. 어쩔 수 없다고 보기에는 너무 열심이었으며, 완전히 동화됐다고 보기에는 과거 전력이 있으니 여전히 못 미덥다.
어쨌든 그는 거짓정보를 흘리며 하시모토(엄태구 분)를 속이고 있었고, 하시모토와 연결된 의열단 내 밀정을 탐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정출은 그렇듯 완연하게 의열단의 지령을 소화하며, 기차 내에서 하시모토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속이려 애쓴다. 시종일관 알듯 모를 듯한 처신을 이어나간 것이다.
히가시 부장의 지시대로 연계순(한지민 분)의 뺨을 인두로 지질 때 망설이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은 분명히 그가 인간 본연의 감정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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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無間地獄)
기차는 무간지옥의 공간이었다. 마치 홍콩 영화 시리즈 ‘무간도’와 같다. 선이든 악이든 그들은 무간지옥에 빠져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면서, 서로에게 숨어 있는 배신자를 찾아내야만 하는 끔찍한 일을 해야만 한다.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 한순간도 경계를 놓아선 안 되고, 배신한 동료를 찾아내 죽여야만 하는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무간도’에서는 경찰과 폭력조직이 서로에게 첩자를 심어 놓으며, 그 첩자들의 삶이 무간지옥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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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픽션이었을까
널리 알려졌듯이, ‘밀정’의 등장인물은 모두 실제 인물을 모티프로 다시 창조한 인물들이다. 정채산은 약산 김원봉이고, 김우진은 살아남아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시현이다. 연계순은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현계옥이며, 이정출은 황옥 경부이다.
의열단은 실존인물을 토대로 영화를 제작했어도 손색없었을 사건들을 주도했다. 하지만 가상의 인물들로 다시 창조시킨 이유는 아무래도 황옥에 대한 학계의 평가와 깊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황옥은 실제로 종로경찰서 폭탄 테러의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이어 김원봉을 만나 독립운동 가담을 맹세하고 폭탄과 총기를 서울로 운반시켰다. 하지만 그 계획을 밀고한 사람이 있어 결국 체포돼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가출옥과 재수감을 반복했다.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황옥이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고 일부러 의열단을 도와 그들을 저지하려고 한 공작”이라는 견해가 다수설이라고 한다.
무간지옥에서 꿈을 찾던 조선 청년들을 위하여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하다”는 꿈이 없다면, 의열단원들은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살아갈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들에게는 내일이 없다고 믿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알려진 대로,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으로 여기고 사진을 찍었으며, 한껏 멋을 낸 옷을 입고 살았다. 당대 최고의 패션 리더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최고의 패션은 불가능한 꿈을 위해 오늘을 버리는 비장함의 결과물이었다.
‘밀정’이 묘사했듯이, 그들의 하루하루는 무간지옥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꿈을 믿고 그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때로는 믿었던 동료를 처단해야만 하는 끔찍함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듯 지옥에서 꽃을 피우기 위한 희생이자 몸부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지옥의 압박감은 때때로 배신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에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일도 일어난다.
그래서 ‘무간지옥’이었던 것이다. 시대는 무간지옥을 만들어 청년들을 영원한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영원한 고통 속에서 그들이 꾸었던 꿈은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밀정]에 환호한 것이다.
– [밀정]에서 정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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