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여행
망원동 여행
나는 대구 출신이다. 대구에서 태어났고, 20년을 대구에서 살았다. 남편은 울산 출신이다. 울산에서 태어났고, 역시나 2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울 망원동을 고향이라 생각한다. 안다. 이 결론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망원동에 1년밖에 안 살았을 때 내린 결론이다. 우리의 고향은 망원동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몇 번의 이사를 감행하면서도 이 동네를 고집하고 있다. 떠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가 우리 고향이니까요. 망원동이 우리 고향이라니까요. 누가 함부로 고향을 떠나나요?
2015, 망원동
처음부터 이 동네를 잘 알았던 건 아니다. 아니 이런 동네가 있는 줄도 몰랐다. 신혼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홍대에서 밀려 밀려 이 동네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부동산 아저씨의 차가 낯선 동네 커다란 운동장 옆을 지나는 순간 어디 외국에 온 건 줄 알았다. 무슨 잠실구장도 아니고, 저렇게 큰 운동장이 왜 동네에 있지? 이상하게 낭만적이었다. 운동장 끝에는 아파트 하나가 덜렁 서 있었다. 막연하게 저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부동산 아저씨는 그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어쩌자고 우리를 그 아파트로 안내했을까. 그 집 거실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농구를 하는 사람들, 족구를 하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로 운동장은 북적였다. 한켠에서 꼬마들은 똑같은 운동복을 입고 소리를 지르며 축구를 하고 있었다. 봄이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오후 다섯 시의 햇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순간 모든 판단을 중지했다. 그냥 그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이어야 했다. 현실과 꿈 사이에 그 집이 있는 것 같았다. 위험한 계약이었다. 문제가 복잡했다. 하지만 그 집에 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그냥 전세 계약을 해버렸다. 그렇게 망원동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운동장이 단순히 운동장이 아니라는 건 이사 후에 알았다. 택시 기사님들마다 망원동에 가달라고 말하면 마치 짠 것처럼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 동네 요새도 물에 잠겨요?” 또는 “거기 여름만 되면 수해가 나서…….” 심지어 한 기사님은 이런 말까지 했다.
김일성이라니. 내가 모르는 망원동의 시간을 택시 기사님들이 드문드문 메꿔줬다. 비가 오면 어김없이 물에 잠기는 동네였다는 걸 동네 식당 사장님도 말해줬다. “그냥 비만 오면 1층까지는 다 잠겼다고 보면 돼요. 근데 유수지가 생겨서 그다음부터는 안 그래요.” 사장님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비가 많이 오던 어느 여름날에 밝혀졌다.
억수 같은 비를 뚫고 운동장에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모두 유수지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차도 다 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나가고, 차들이 운동장을 비우자, 운동장 양 끝에 있는 수문이 열렸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수문이었다. 물이 콸콸콸콸 들어왔다. 순식간에 그 큰 운동장이 물로 가득 찼다. 분명 운동장이 있는 풍경이었는데 호수가 있는 풍경이 완성되어버렸다. 그렇다. 운동장의 이름은 망원유수지. 유수지(遊水池). 말 그대로 물이 노는 땅. 필요할 때 물들이 놀다 나가는 땅. 여름엔 비가 놀며 호수를 만들고, 겨울이면 눈이 놀며 하얀 벌판이 되는 땅. 그 땅 옆에 우리 집이 있었다.
2011, 망원동 여름
스무 살. 서울에 올라와 처음 구한 학교 앞 단칸방. 그 창문가에서는 누군가가 매일 고양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와 몇 살 차이나지 않아 보이는 고양이 소녀를 보살피는 사람은 늘 할머니뿐이었다. 어쩌면 부모가 떠나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옆에서 소녀는 학교도 안 가고 늘 고양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슈퍼 평상에 할머니와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 앉아서도 고양이처럼 행동하고 고양이처럼 울었다.
나는 창문을 닫고 살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 높이에 내 손바닥만 한 창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여름에도 창문을 안 여는 나를 보며 친구는 혀를 내둘렀다. 밖에서 소녀가 울건, 담벼락에 술 취한 학생들이 구역질을 하건, 나는 단칸방에 갇혀 있었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았던 스무 살이었다. 오직 나 자신만 궁금하고, 나 자신이 감당이 안 돼 끝없이 침잠하는 스무 살이었다.
그때 내가 망원동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렇게까지 단칸방에 갇혀 있었을까?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집 안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뛰어나간 날의 일이다. 남편이 우산도 없이 슈퍼에 갔기 때문이다. 억수 같은 비에 바지는 순식간에 다 젖었고, 앞도 안 보일 지경이었는데, 남편도 안 보였다.
어디로 간 거지 두리번거리는 내 앞에 차 한 대가 섰다. 슈퍼 아저씨와 남편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며 슈퍼 아저씨는 나까지 태웠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우리 집 앞에 우리를 배달해놓고 돌아가셨다. 아저씨에게 인사를 거듭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1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 수많은 집들을 떠돌면서, 수많은 집 앞 슈퍼들을 거쳤을 텐데,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고양이 소녀는 늘 동네 슈퍼 평상에 할머니와 같이 앉아 있었는데, 고양이 소녀는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만 슈퍼 아줌마는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슈퍼 아줌마 아저씨와는 지나갈 때마다 인사하고, 말을 걸고, 시시껄렁한 농담도 나누는데. 심지어 비 온다고 아저씨가 집에 데려다주기까지 하는데. 만약에 어두운 이십 대 때 내가 망원동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2010, 망원동 겨울
그게 시작이었다. 이 동네가 수상하다고 느낀 건. 퇴근길, 네일숍이 비어 있길래 나도 네일케어라는 걸 한번 받아보자 싶어 들어갔다. 한 시간이나 걸려 손톱을 다듬어주더니 돈을 안 받았다. 마침 예약이 취소되어 심심했던 참이라고. 커피집 아저씨는 커피를 내줄 때 마다 자꾸 새로운 메뉴라며 사과차를, 제주도 커피를, 밀크티를 우리 앞에 수줍게 내밀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전을 부칠 줄 아는 전 가게 사장님은 지나가는 우리를 불러 맥주를 먹였다.
뭐가 이래. 왜 다들 이렇게 인심이 넘치는 거야. 여기 서울 아니야? 심지어 이 동네에는 프렌차이즈 빵집도 드물었고, 프렌차이즈 커피집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장사를 하고, 동네 사람들이 소비를 하는 구조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게 되었다. 부동산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노가리를 사주고, 김밥집 아줌마와 수다를 떨고, 참치집 사장님의 아들 소식을 자연스럽게 듣는 일이 잦아졌다.
스무 살 마음의 단칸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 모든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얼굴을 아는 가게들이 점점 늘어났다. 걸어가다가도 인사를 하는 사장님들이 많아졌다. 안부가 궁금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마음속 단칸방에서 벗어나 나는 어느새 망원동 주민이 되었다. 문득그렇게 되어버렸다.
2012, 망원동
서울의 중심에 한강이 흐르는 것처럼 망원동의 중심에는 망원시장과 월드컵시장이 흐른다. 모든 계절은 가장 정직하게 시장에 도착한다. 봄이 오나 싶으면 어김없이 쑥과 냉이가 시장에 넘쳐난다. 그때그때 가장 싼 재료로 장을 봤을 뿐인데, 그때그때 가장 신선한 계절이 집에 도착한다. 마트에서는 좀처럼 안 읽히던 계절이 여기서는 순식간에 읽혔다. 비가 많이 오는 것과 과일 값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비가 적게 오는 것과 야채 값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시장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간단한 조리법들도 시장의 아줌마들이 다 알려주었다. 퇴근길에 만 원만 쓰면 시장은 순식간에 나를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회사가 있는 강남에서는 밥 한 끼 사먹을 돈으로 여기서는 일주일치 장을 보고도 남았다. 대파를 깨끗하게 다듬어서 파는 집을 알게 되었다. 뜨끈뜨끈한 두부 한 판이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집을 알게 되었다. 국산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파는 집도 이제는 안다. 돌김을 맛있게 구워 파는 집을 안다. 아줌마에게 잘라달라고 말하면 6등분으로 정확히 나눠준다. 내가 잘라도 되지만 아줌마가 능숙하게 자르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맨날 잘라달라 말한다. 갓 튀긴 고추튀김을 파는 가게를 안다. 하나에 천 원인데 이천 원을 내면 세 개를 슬쩍 주기도 한다. 오늘은 고추 크기가 작다며.
레몬 다섯 개에 이천 원도 안 하는 집도 안다. 그 집은 실은 뭐든지 지나치게 싸다. 열무김치가 맛있는 집을 안다. 여름에 삼천 원어치만 사도 된장에 비벼 먹고 국수에 말아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내내 입이 즐겁다. 다 손질된 해물탕 재료를 파는 생선가게도, 어디보다 깨끗하게 손질된 생선을 파는 생선가게도 안다. 제대로 된 꼬막을 사고 싶다면 또 다른 생선가게가 있다. 남편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꽃집도 안다. 그 모든 시장의 끝에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도 있다. 안에 비밀의 정원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갑자기 영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밑도 끝도 없이 영국 기분이 났다.
2012, 망원동
이것이 나의 자랑이다. 우리 동네에 시장이 있고, 내가 그 시장 구석구석 가장 맛있는 집을 알고 있다는 것. 그곳이 있기에 마트에 가지 않는다는 것. 아니, 마트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 죄책감 때문에 억지로 시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했다. 죄책감이 원동력이 아니라, 나의 필요 때문에 가는 시장. 그런 시장이 진짜 건강한 시장이니까.
망원시장과 길 건너 월드컵시장은 그런 시장이었다. 마트보다 더 싱싱한 과일과 야채들이 마트보다 훨씬 싼 가격에 나와 있는데 도대체 왜 내가 마트에 가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시장 양 끝으로 마트가 있는데 또 마트가 들어오려 한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그리고 몇 년에 걸친 싸움 끝에 마트가 백기를 들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회사 사람들에게우리 동네 시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 시장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끝없이 자랑했다.
물론,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결론이 현실에 있을 리 만무하다. 시장 주변에는 지금 또 대형 마트가 들어오려고 준비 중이다. 하지만 시장은 갖가지 방법으로 살아남으려고 애쓰고 있다. 신기한 일은, 그 진심에 답하는 진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몸부림에 사람들은 콘서트로, 이벤트로, 촛불로, 그러니까 알고 있는 모든 방법으로 응원을 하는 중이다. 시장에 와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 커플이 생겼다. 멀리서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을 온 가족들이 생겼다. 평범한 가게 앞에 긴 줄이 생겼다. 수십년 된 가게가 지금 가장 뜨거운 가게가 되었다. 잊고 있었던 풍경을 간직한 것만으로도 우리 동네 시장은 뜨거운 시장이 되었다.
시장뿐만이 아니었다. 이 동네엔 잊고 있었던 풍경이 즐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한 적도 없지만, 묘하게 그리운 풍경이 골목마다 고개를 빼곡히 내밀었다. 반들반들하게 닦아도 궁핍함을 숨길 수 없는 삶들. 정리를 해도 김장 대야가 밖에 뒹굴 수밖에 없는 삶들. 집 안에 냉장고를 둘 곳이 없었는지, 길가에 냉장고를 내놓고 쓰는 집도 있었다. 냉동실에도 냉장실에도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냉장고를 둘 자리가 없는 집, 화장실 하나를 여러 집이 같이 써야 하는 집. 망원동엔 그런 집이 많았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담벼락에 길게 빨랫줄이 걸려 있고, 그 위로 할머니들의 몸빼바지가 꽃처럼 피었다. 네모반듯한 아파트들 사이로 쪽방촌들이 숨 쉬고 있었다. 이 동네엔 유난히 빈 휠체어와 빈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들도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폐지를 줍는 용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리 지르는 깃발이었다. 나는 그냥 여기에 살겠다고. 내 집에,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평범하게, 화려하지 않아도 소박하게, 망원동에 살겠다는 선언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걸까?” 남편은 내 질문에 대답이 없었다. 어렵다는 걸 그는 직감한 탓이었다. 싸움은 길었고, 자본은 치밀했다. 결국 마트를 밀어낸 망원동 주민들이었지만, 이 싸움까지 확신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몇 년간의 지리한 싸움 끝에 이제 깃발은 다 사라졌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다 사라졌다.
2015, 망원동
지금 그 자리에는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려고 하고 있다. 또 어느 날은 집 앞 커다란 빌라에 창문이 다 깨져 있었다. 무슨 일인지 가까이 갔더니 이미 사람들이 다 떠난 뒤였다. 마지막으로 짐을 차에 싣던 사람이 화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당했어요.” 벽지가 찢겨 나가 있고, 인형이 나뒹굴고 있고 장독이 깨져 있는 그 풍경 앞에서 나는 또 막막했다. 또 어느 날은 쪽방촌 앞에서 허리가 다 굽은 할머니들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쪽방촌에 가림막이 세워지고 냉장고는 사라졌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어디론가 다 떠났다. 그 자리엔 또 번쩍번쩍하는 원룸이 들어섰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갈곳이 있긴 했던 걸까. 한숨은 길어졌다.
마음이 복잡한 건 문제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명을 다한 건물들이었다. 위태한 건물들이었다. 그 안의 삶도 위태하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다정한 풍경이라 아무리 좋아한들 나는 그 안의 삶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편한 아파트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길가에 나와 있는 냉장고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늘 미안한 마음이 겹쳐졌다. 개발은 필요했다. 붕괴 직전의 건물이 많았다. 하지만 개발을 한다고 그들이 그 냉장고를 들고 다시 잘 지어진 집에 들어와 살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자본이 거기까지 배려해줄 리 가 없었다. 최선은 무엇일까. 최선을 안다고 한들 그게 실현될 가능성은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망원동의 풍경 앞에서 나는 늘 마음이 복잡해진다. 간단한 문제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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