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단계'의 세계화

조회수 2016. 2. 10. 10: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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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기업 vs. 국민국가
“애플은 미국의 법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법 정신까지도 준수한다”
이쁜척
2013년 5월 미국 상원 청문회에 출석한 애플의 CEO 팀 쿡은 애플이 미국 기업임을 강조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해외 법인에 유보 중인 소득을 미국으로 환수하는 것은 거부했다. 그리고 미국의 조세법이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을 요구했다.
출처: 위키백과 공용(CC, BY SA)

다국적기업 vs. 국민국가



국민국가 체계와 글로벌 시장이 공존해 오며 긴장을 유지해 왔던 세계화는 디지털 경제의 부상으로 또 다른 흐름에 들어섰다. 시가총액 세계 최대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는 애플의 조세회피 논란은 현재의 세계화 흐름 속에서 다국적기업과 국민 국가의 긴장을 드러내는 가장 상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국가의 주권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조세제도와 세계화의 상징인 다국적기업 간의 이해가 상충하는 모습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80년대 ‘세계화’만 내세웠던 이른바 다국적기업(multinational enterprises)은 세계화의 모순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지역화(localization) 움직임에 맞서게 되면서 새로운 전략을 만들게 된다.
이른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또는 세방화(世方化)을 통해 세계화와 동시에 현지 국가의 문화를 존중하며 현지에 맞는 전략을 꺼내 든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서 글로벌 시장은 더욱 커지고, 다국적기업들도 지속해서 성장해 왔다. 그러나 다수의 다국적기업은 여전히 개별 국가의 조세 시스템은 존중하지 않고 사실상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애플 논란’이 대표적이다.


기업유치 전쟁과 법인세 인하



세계화가 본격화된 90년대 이후에는 세계 각국의 ‘기업유치 전쟁’이 벌어지면서 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 움직임도 탄력을 받았다. 이른바 ‘환율 전쟁’이라고 불리는 경쟁적인 환율 절하 움직임처럼 세계 각국의 경쟁적인 법인세 인하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OECD 회원국의 평균 법인세율은 1981년 47.5%에서 1991년 39.6%, 2001년 31.6%를 거쳐 2013년에는 25.5%까지 낮아진다. 세계화가 진행된 30여 년 동안 OECD 법인세율의 평균이 22% 포인트나 낮아지면서 다국적기업들은 막대한 세금을 절약할 수 있었다.
세계 각국은 자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과세 방식에서도 경쟁하였다. 특히, 다국적기업이 창출하는 해외 소득에 대한 과세 방식을 기존의 거주지주의 과세제도(residence taxation principle)에서 원천지주의 과세제도(source taxation principle)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거주지주의 과세 제도하에서는 소득의 발생지가 국내든 해외든 상관없이 기업 본사가 소재하는 거주지에서 과세한다. 반면, 원천지주의에서는 소득이 발생한 국가의 세법에 따라서 과세하고, 본사의 거주지 조세당국에서는 과세를 하지 않는다. 다국적기업 입장에서는 세율이 낮은 원천지(해외시장, 해외 사업장 등)를 활용할 경우 세금 부담을 낮출 수 있기 때문에 원천지주의 과세방식을 선호한다.
독일, 프랑스 주요 선진국들뿐만 아니라 영국, 일본 등도 최근 들어 원천지주의 방식으로 세법을 개정함으로써 이들 국가에 본사가 소재한 다국적기업들은 글로벌 시장 진출에 따른 세금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반면, 거주지주의 과세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 세법으로 최고 35%에 이르는 법인세를 물어야 하는 애플은 해외 법인에 유보 중인 소득을 미국으로 환수하길 거부하며 미국 세법 개정을 위해서 로비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출처: CotCredit, “Tax”, CC BY

디지털 경제와 세계화 그리고 세금회피



애플과 같은 디지털 경제를 주도하는 다국적기업의 탄생은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양상에 접어든 세계화의 흐름과 함께 한다. 90년대 중반 다자간 자유무역체제인 WTO 체제 출범 이후 세계화 강화의 흐름 속에 반작용으로 등장한 반세계화 운동의 압력 등으로 새로운 다자간무역협상이 답보 상태에 빠지자 양자 간 투자협정이나 소다자간(minilateral) 특혜무역협정인 FTA 등 지역무역협정의 체결이 확대된다. 그 결과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단일한 규범이 존재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세계 경제의 통합은 가속하였다.
실물 경제의 급속한 통합이 벌어지는 흐름 속에서 인터넷의 확산을 비롯한 ICT 기술의 보급으로 디지털 경제가 부상하게 된다. 인터넷 보급 초기였던 90년대 중반에는 전자상거래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아이폰의 등장 이후 시작된 ‘모바일 혁명’ 이후에는 앱스토어를 비롯한 ICT 플랫폼의 확산, SNS를 통한 사용자 데이터의 폭증, 클라우드 컴퓨팅을 통한 서비스 공급 비용의 절감 등의 새로운 ICT 트렌드가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은 다국적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을 새롭게 재편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특히, 조세 체계가 국민국가 혹은 양자 간 조세조약을 체결한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동안 다국적기업의 활동은 글로벌 시장을 넘어 디지털 경제로 확장하면서 세금회피의 가능성도 높아졌다.
세계 시장의 통합이 실물 경제를 넘어 디지털 공간으로 더욱 확대하는 흐름 속에서 상품,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좀더 강화되는 반면에 또 다른 핵심 투입요소인 사람(주권)의 이동은 여전히 제한되었다. 이는 경제적 측면에서는 세계화가 심화되었지만, 이를 규율할 글로벌 거버넌스는 여전히 로컬 수준, 즉, 국민국가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계 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



하버드 대학 대니 로드릭 교수는 “세계 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The Political Trilemma of the World Economy )”를 통해서 이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즉, 세계 경제는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경제통합), 민주주의, 민족자결권(국민국가)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 통합의 심화와 국민국가 체계가 공존하는 현재 버전의 세계화는 [세계는 평평하다]의 저자 토마스 프리드먼이 말한 ‘황금 구속복’(세계화에 편입하기 위한 정치·경제적 표준에 관한 비유) 상태와 일맥상통하는데, 각국의 민주주의를 희생하며 심화되어온 세계화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안정인 상태가 아님이 드러났다. G20 정상회담이라는 새로운 글로벌 공조체제가 부상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현재 버전의 세계화’ 속에서 각국의 외국 투자 유치 움직임은 각국 국민의 민주적인 요구인 ‘일자리’ 사수를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국가들의 최적화 행위가 글로벌 차원에서의 최적 균형과는 일치하지 않 다는 것을 ‘환율전쟁’ 등의 사례가 말해주고 있다. 즉, 각 국가간 조정되지 않는 경쟁적인 투자유치 움직임은 어떻게 보면 근린 궁핍화(beggar-my-neighbour; 다른 나라의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자국의 경기회복을 도모하는 경제정책)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DonkeyHotey, “The G20 Leaders – Caricatures”, CC BY SA

글로벌 IT 기업의 조세회피 기법



대표적으로 다국적기업들에 사실상 조세회피 수단이 되는 제도적 장치를 제공하면서 다국적기업의 자국유치에 앞장서고 있는 아일랜드는 최근 유럽집행위원회에 의해서 애플과 같은 다국적기업과의 이면계약 체결에 대한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즉, 아일랜드가 다국적기업에 조세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자국에 일자리 창출을 보장받기로 모종의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시장은 점점 더 글로벌화, 디지털화되는 가운데 주권, 정부, 국가는 여전히 로컬 수준인 ‘현재 버전의 세계화’를 다국적기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파고들었다. 조약쇼핑(Treaty Shopping)이 대표적이다. 조약쇼핑은 특정 국가 양자간 체계된 조세조약에서 규정하는 혜택을 제3국의 거주자, 여기서는 기업이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국적기업이 조세 부담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제3의 국가에 위장 회사를 설립하며 조약의 혜택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다.


애플이 아일랜드와 네덜란드 법인을 통해서 조세를 회피하고 있는 ‘네덜란드 샌드위치를 겯들인 더블 아이리시 커피’(Double Irish With A Dutch Sandwich; 구글, 애플, 아마존 등 글로벌 IT 기업이 쓰는 조세회피 기법) 전략은 세계화가 디지털 경제 통합 단계까지 이른 상황에서 가장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조세회피 기법 중 하나이다.
두 개의 아일랜드 자회사와 1개의 네덜란드 자회사, 그리고 부가적으로 바하마 등 조세 천국 페이퍼컴퍼니를 동원한 이 전략은 각국의 세법상 허점을 이용하여 막대한 세금을 회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구글 등과 같이 디지털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다국적기업들도 이러한 전략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세금회피에 동참하였다.
출처: 한국조세재정연구원(2013), “다국적 IT 기업의 조세회피 행태와 시사점: 애플ㆍ구글의 사례를 중심으로”

BEPS: 조세 사각지대를 없애라



특정 기업이 세금을 낮게 내는 것은 해당 기업의 주주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해당 기업의 주주와 해당 기업의 고객(소비자)이 마냥 일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업의 이익이 발생하는 국가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같은 경제적 행위에 대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음에 따른 세원 잠식의 불이익이 발생하게 된다. 이해관계자 간 이해상충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라는 국가에 스타벅스가 유일한 기업이라고 가정하였을 때, 스타벅스가 해당 국가에 커피를 팔면서 낸 이익에 대해서 정당한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회피하면, 그 정부 예산은 정당하게 세금을 내는 다른 커피 회사를 유치하는 것에 대비해서 예산이 부족해지고, 전반적인 공공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의 세금회피가 계속된다면 결국 경제 자체가 망가진다. 즉, 동일한 경제적인 실질행위에 대한 동일한 세금이 매겨지지 않게 됨에 따라 공공시스템, 나아가 시장 자체가 망가지게 되는 순서를 밟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초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다국적기업의 세금회피 행위를 개별 국가만의 노력으로는 막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협력하여 내놓은 대책이 이른바 BEPS 프로젝트이다. BEPS는 ‘세원 잠식과 수익 이전'(Base Erosion and Profit Shifting)의 약자로, 다국적기업이 국내세법이나 조세조약의 사각지대를 이용하여 세원의 규모를 줄이고 수익을 역외로 이전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OECD 주도하에 BEPS 대응책이 마련되었고, G20이라는 글로벌 회의체를 통해서 글로벌 차원의 국가 간 공조가 이루어지면서 각국은 조세 사각지대를 없애고 있다.
출처: BEPS Actions

‘다음 단계’의 세계화는 어떤 모습일까



글로벌 경제통합과 글로벌 정치통합의 사이의 어딘가에서 세계는 여전히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향후 세계는 과연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G20이 G100, G200 등으로 확대되면서 글로벌 시장을 규율해 나갈 것인가? 즉,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가 구축되면서 국민국가의 주권이 양도될 것인가?
두 번의 비극적인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탄생한 정치적 통합이자 FTA 이상으로 경제적 통합 실험이었던 유럽 통합이 와해하고 있다. 그렉시트(Grexit;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 블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이탈)등은 현실화한 와해의 조짐이다. 세계의 경제 통합은 ‘세계화’ 이전으로 다시 느슨해지고, 개별 국민국가의 주권과 민주주의는 강화되는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 체제 로 회귀할 것인가?
이들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과 이상적인 해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질문들은 점점 그 무거운 현실감을 더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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