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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건축가 가우디, 구엘의 꿈을 실현하다

조회수 2016. 2. 12.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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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대로 지어봐라"
출처: 위키백과 공용 CC BY-SA 3.0
가우디 평생을 매달린 걸작 ‘성 가족'(Sagrada Familia) 대성당
각자에게 가우디(Antoni Gaudí, 1852 ~ 1926)는 어떤 의미일까. 패키지 관광에서 꼭 들러야 할 코스, 존경의 대상, 미친 천재, 건축 비전공자가 건축에 대해 아는 척하려면 꼭 필요한 단어 등이 아닐까 싶다. 어떤 의미를 떠올리든 가우디의 괴물 같은 건축 외관만은 꼭 함께 상상할 것이다.
출처: 위키백과 공용
젊은 시절의 가우디
건축 전공이나 바르셀로나 여행 경험이 없는 나에게 가우디는 그저 건물을 최고로 빚어내는 예술가였다. 실생활에 아무 쓸모 없는. 가끔 이성을 만날 때나 후배 기자에게 내가 이만큼 식견이 있다는 걸 말해주는 도구로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러다 “안토니 가우디 전”을 다녀오고, 가우디를 다룬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가우디는 유저빌리티(usability)와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의 천재다.


가우디를 자라게 한 것들



가우디에 관한 이야기를 읽기 이전에는, 독보적이다 못해 광기까지 서린 가우디의 건축이 대체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했다. 해답은 로마네스크 양식, 카탈루냐 지방의 유서 깊은 민족의식, 이슬람 건축에서 온 기하학무늬, 천재 특유의 심리적 고통을 승화한 종교 등에서 온 것이었다. 이외의 것들은 가우디의 성장 배경에서 짐작할 수 있다.
출처: 좌 – blakemsislam, 우 – Desig, El Blog
기하학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모자이크(좌)와 비교적 불규칙한 가우디의 트렌카디스(우)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인근 도시 출생이다. 아버지는 대장장이였고, 가우디는 선천적으로 허약해 학교에 잘 가지 못했다. 겨우 업혀서 학교에 가끔 가던 가우디는 집 근처 개천이나 숲 속, 유적 근처에 앉아서 명상하기를 좋아했고, 아버지가 쇠를 두드리는 걸 좋아했다. 벌써 천재 냄새가 풀풀 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가우디 건축의 특징인 ‘자연’과 ‘금속’ 특성이 생겨난다.
가우디는 이 요소들을 배우기보단 스스로 통찰해 속성과 표현법에 대해 구상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대장간에서 아버지는 쇠를, 가우디는 꿈을 담금질했던 것이다. 쇳물의 야만적인 열기와 부자연스러운 이형의 틀에서 정념을, 대자연에서 부드러움을, 유적에서 전통을 배웠다.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따라서 이론은 갖고 있지 않았다. 지을 뿐이다.
우쭐!
성장하며 이 모든 요소를 한 곳에 집약한 건축에 관심을 가진 가우디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로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당시의 바르셀로나는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성장한 개발도시이자 무역도시였다. 대부분 무역도시가 그렇듯 빈민가와 부유층, 가장 보수적인 수도원과 가장 급진적인 노동자들이 공존했다. 금과 흙으로 칠한 길을 하루에도 여러 번 지나쳤다. 이 길은 우리 집 빌라의 온수 같은 것이다. 타협은 없고 경계만 있다. 지옥같이 끓거나 화성같이 차갑기만 하다. 가우디는 이곳에서 공존을 상상한다.

구엘, 가우디를 찾아오다  



졸업하자마자 건축사무소를 연 가우디는 우선 자신의 작업대를 먼저 만들었다.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배운 지식으로 여러 동물과 나무 등을 새겨 쇠로 자연을 지었다. 이는 가우디 건축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글이 적혀있지 않은 설명서인 셈이다. 졸업을 목전에 둔 가우디는 ‘졸업작품’과 같은 의미로 유리 전시장을 제작했는데, 파리에서 이를 우연히 본 거부 ‘에우세비 구엘’(Eusebio Guell Bacicalupi, 초상화)은 가우디의 사무소를 직접 찾아온다.
구엘은 벽돌회사 사장이자, 아메리카와의 무역으로 떼돈을 번 사업가다. 그렇다. 졸부다. 모든 졸부가 그러하듯 구엘은 높은 수준의 작품과 건물을 수집해 굳이 귀티를 내기를 원했다. 갑자기 성공하면 골드바나 금시계 같은 걸 사모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른 졸부와 다른 점이라면 한눈에 가우디를 알아본 감각 정도다. 그것도 역사에 남을 뛰어난 감각이다.
전작 ‘카사 비센스(Casa Vicens)‘로 유명해진 가우디는 잇따라 귀족의 집을 짓게 된다. 취향에서만큼은 밀리고 싶지 않던 졸부 구엘은 문화와 예술에 관한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가문을 명가로 만들기를 원했다.
출처: 카사 비센스(1888년 완공, 바르셀로나)

구엘, “네 마음대로 지어봐라”



가우디의 재능을 확실하게 알아본 구엘은 ‘네 마음대로 지어봐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가우디에게도 축복이다. 스티브 잡스가 ‘제품의 속까지 아름답게 제작하라’며 고집을 부리기 몇천 년 전부터 건축가의 예술성과 공사비는 타협 없는 줄다리기 같은 것이었다. 오죽하면 파르테논 신전을 설계한 페이디아스(Pheidias)가 한 말이 아직도 내려오겠는가.
페이디아스는 신전의 지붕 뒷면까지 꼼꼼하게 작업하기로 유명했는데, 시 재무관은 “보이지 않는 뒷면 조각 비용은 줄 수 없다”고 했고, 페이디아스는 “당신은 틀렸다. 신들은 보고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가우디는 페이디아스처럼 취급받지 않았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돈을 퍼부었다. 그래서 가우디도 인류에게 예술을 퍼부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구엘도 위인에 넣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출처: 타카히로 하야시, CC BY 2.0
구엘 궁전의 내부
가우디가 구엘을 위해 처음 지은 건물은 “구엘 궁전”이다. 이름은 궁전이지만 지대가 좁았다. 18m × 22m로 120평이 좀 안 되는 넓이다. 기둥을 제외하면 전용면적은 80평이 안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클라이언트를 위한) 가우디의 유저빌리티가 빛을 발한다.
가우디는 집 어느 곳이라도 빛이 흐르도록 천장에 ‘빛의 우물’을 뚫었고, 통행에 방해되는 칸막이나 기둥을 없애버렸다. 결과적으로 구엘 궁전은 실평수가 매우 큰 집이 됐다. 동시에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파사드를 세워 구엘의 간지를 세워준다.
출처: 위키백과 공용 CC BY-SA 3.0
구엘 공원에 박힌 구엘의 이름, 역시 트렌카디스 공법을 사용했다

구엘의 꿈을 구현하다



결과물이 어떻든 결국 가우디도 남의 요구를 대행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대행한다. 글쟁이는 대부분 대행을 부업으로 하기 마련인데 이 과정에서 근본 없는 갑질을 당하곤 한다.
“오늘 금요일이니 불금 보내시고 월요일에는 수정본 받아볼 수 있겠죠?”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하게 해주세요”

“차분하면서도 다이나믹한 느낌으로”
이런 종류의 말 중 가장 상처받는 말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왜 그것도 못해요? 전문가 맞아요?”
이런 문의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신이 아닙니다.”
가우디는 대행하는 사람 중 탑클래스의 인물이다. 신은 아니지만, 클라이언트가 말한 모던하고 클래식한, 전통을 따르면서 입체파적인 것을 구현해버렸으니 말이다. 가우디는 클라이언트의 꿈을 대지 위에 세웠다. 그것도 자신의 꿈까지 얹어가며. 세상 사람들이 구엘보단 가우디를 더 많이 아는 거로 봐서, 진정한 갑은 가우디일지도 모르겠다. 구엘은 이런 가우디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나는 당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건축가인 당신을 존경합니다.”
출처: CulturaPrimavera2010
가우디의 굴뚝 디자인

부자를 위해 일한다는 ‘오명’



가우디는 이렇게 저택들을 지으며 ‘부자만을 위해 일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실제로는 저렴한 비용으로 수녀원을 짓기도 했다)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 비난을 받곤 했는데, 그 비난의 선두에 선 것이 젊은 화가 피카소였다.
그러나 결국은 피카소도 타일을 깨뜨려 다시 모자이크하는 가우디의 ‘트렌카디스’(trencadis) 작법에 영향을 받았다. 트렌카디스와 피카소 작품의 유사성은 그림만 봐도 느껴진다. 인간에 대해서는 비난했으나 예술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가우디가 유저빌리티를 발휘한 영역은 항상 아래를 향해 있었다. 가우디는 장인정신을 무기로 기득권에 저항하다 못해 기득권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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