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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의 고독, 그 역설의 뫼비우스

조회수 2015. 10. 23. 17:5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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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뉴스
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치이다 보면 어떨 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앉아 여유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더러는 사람이 별로 없는, 그러니까 장사가 잘 안되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또 더러는 동행 없이 북적거리는 길거리에 나가기도 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 특히 일상의 생활 영역에서 사람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 이들은 길거리로 나가 사람 구경하는 것이 일종의 일탈이 되기도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은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을까?


보통은 여행을 가는 등 일상과의 공간적 격리를 통해 일탈하곤 하지만, 평소의 자신과 상관없이 행동할 수 있는 군중 속에서도 그러한 자유는 작든 크든 느낄 수 있는 일이다. 말하자면 익명의 자유인 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익명의 자유는 도시화한 공간에서, 그것도 대로나 광장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동행 없이 혼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낼 때 어떤 자유나 위안의 감각도 얻어지지만 동시에 ‘군중 속의 고독’이 문자 그대로의 감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설은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을까?
출처: Clint Mickel, CC BY NC SA

역할밀도와 자기밀도, 외로움과 고독


사회학자 노명우는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현대인의 자아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밀도’를 제시한다. 그중 하나가 일상 속에서의 역할밀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밀도이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역할밀도는 위에서 말한 일상에서의 의무와 책임 따위를 의미하고 자기밀도는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별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책에서는, 현대사회는 개인에게 지나치게 높은 역할밀도를 부과한 나머지 자기밀도를 확보할 만한 여유가 없음을 지적하며 고독의 필요성을 말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고독이란 외로움과는 다른 형태의 감각이다. 외로움은 역할밀도에 눌려 있는 개인에게 찾아오는 일종의 소외감이라면, 고독은 그러한 소외감을 스스로 취하는 자발적 홀로됨이다. 그래서 약화하거나 소멸 직전에 놓인 자기밀도를 되찾기 위해선 외로움을 고독으로 가져갈 수 있는 의식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혼자서 군중 속에 드는 행위가 그런 의식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이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전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런 행위는 의식적인 노력이기보다는 의식적인 도피 정도로 봐야 할 것 같다.


광장, 경계가 모호해지는 공간


바네사 슈와르츠는 19세기 말 파리의 대도시화와 그에 따르는 도시생활의 변화양상을 다루면서([구경꾼의 탄생]), 대로나 광장이란 공간의 현대성에는 민주적 국제주의가 숨어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을 대상화하고 관찰의 주체와 객체가 또렷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와 보이는 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은 군중 속에 들어가면서 관찰자인 동시에 볼거리가 되는 이중적 위치에 놓이는 셈이다. 위에서 제기한 역설-익명의 자유와 군중 속의 고독은 이러한 이중적 위치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Sam Javanrouh, CC BY NC

자기밀도와 역할밀도의 경계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노명우가 제기한 자기밀도와 역할밀도는, 도식적으로 말해 일종의 반비례 관계에 놓여있다. 역할밀도가 늘어날수록 자기밀도가 줄어들고, 역할밀도가 줄수록 자기밀도를 그만큼 더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지야 않겠지만, 역할밀도가 줄어들 경우 자기밀도를 찾을 여건이 마련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공간에서의 익명성은 이러한 자기밀도와 역할밀도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과는 어떤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여전히 개인은 ‘보는’ 사람으로서 오롯이 자리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군중 속에서 확보된 익명성이란 그런 점에서 ‘자신의 모든 역할에서 벗어난 일탈’이기보다는 ‘자신의 모든 밀도에서 벗어난 도피’에 가까울지 모른다.

언뜻 자유처럼 보이는 익명성은 자기밀도의 확보가 아닌 ‘저 많은 사람 중 하나’로서, 점 같은 개인으로서의 감각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곳에 나와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일은 개인으로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덧없음 내지는 (심하게 말하면) 회의감을 안겨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아의 터를 허약하게 하는 도시의 시각성


규격화와 더불어, 도시라는 공간의 시각성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개별 자아가 딛고 설 터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본다는 것이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본다면 터무니없는 의심도 아니리라.

도시민으로서 살아가는 현대인이 자기밀도를 되찾을 방안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잠시 멈춰 서서. 그러나 만일 그것이 마음의 문제 즉, 어떤 종류의 철학적 사색에 그친다면, 그 고민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스스로 매몰되는 것으로 귀결할 뿐이다. 그러므로 고민의 목적은 사회적 환경의 마련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필자 : 서윤(초대필자, 대중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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