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프레시안 vs. 정봉주 '어떤 게임'의 결론

조회수 2018. 3. 28. 18:16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패자는 있지만, 반성은 없고, 승자는 있지만, 정작 승리는 없는 게임이 조금 전 끝났다.

1. 프레시안 대 정봉주의 소동은 '결과적으로' 정봉주가 패배하면서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정봉주의 거짓말, 그것도 아니라면 정봉주의 불완전한 기억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감수하게 한 거짓 주장으로 끝났다. 나는 여기에 무슨 기쁨이나 분노 혹은 허탈감이나 만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씁쓸할 뿐이다. 그저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프레시안의 '저품질 저널리즘'이 제공하고, 정봉주의 '악의적인 거짓말'(혹은 불완전한 기억)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 흥미롭기 짝이 없는 '추리 극장'은 좋든 싫든 간에 언론이 개입한 미투 운동의 위험과 그 한계에 관해 질문한다.

2. 내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이 소동이 '미투 운동'과 별로 관련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한국)의 미투가 거기(미국)의 미투일 필요도 없고, 오늘의 미투가 어제의 미투일 필요도 없다.

미투가 사회운동이라면 그것은 끊임없이 당대의 시공간 속에서 당대의 인간들, 구체적으로는 2018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성원들에 의해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재조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의견'이 소수의견이든 다수의견이든 상관없다. 그저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공동체,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말단 세포의 하나로서 발언할 뿐이다. 나는 이 흥미롭지만 소모적이기 짝이 없는 거대 소동이 미투 운동과 별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더는 이런 식의 소동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단 세포의 외침이 뇌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별개로 말이다(ㅠ_ㅜ).


3. 나는 왜 그렇게 판단하나

1) 나는 프레시안과 정봉주가 서로 대립한 '이 거대한 소동'을 뉴스(로 가장한 엔터테인먼트) '쇼'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말의 사전적인 의미, 역사적이고, 실체적인 의미에서 그 최소한을 추출하더라도, 본래적인 의미의 '뉴스'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뉴스가 아니라 뉴스의 모양새를 띤 어떤 것이다. 폭로자의 진실성과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드러난 언론 상품의 결과물로 판단건대,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표현은 '가십'이라고 생각한다(이에 관해선 아래 링크 기사 참조).

2) 이 소동은 성 차별, 권력의 위계, 자기 자신을 속이기까지 하는 욕망에 관해 우리 공동체에 별다른 '대화의 재료'를 제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그저 편견과 선입견을 강화했고, 인간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철저히 '공작적 마인드'에 빠져 '우리 편'을 옹호했을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소동이 미투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미투 운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3) 그 책임은 어디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그 책임은 '결과적으로' 정봉주에게 좀 더 무겁게 존재한다. 처음부터 악의적인 거짓말이었든, 아니면 기억력의 물리적인 한계이든 간에 정봉주가 '결과적으로' 거짓 주장을 펼쳤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로 확정됐다.

이 거짓 주장이 곧바로 '추잡한 성추행'으로 엄밀하게 논리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소동의 '구경꾼' 다수는 넉넉하게 정봉주의 진실성을 더는 신뢰할 이유가 없어졌고,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반대편의 주장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프레시안의 어처구니 없는 '저품질 저널리즘'이 면책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책임은 여전히 무겁고, 이 사회적인 거대 소동의 비용에 관해서는 오히려 그 책임을 더 무겁게 비판해도 그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동이 악질적인 이유는 공동체 성원 대다수를 '구경꾼'으로, 도박장의 '노름꾼'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정봉주에게 '베팅'했고, 누군가는 프레시안에 '베팅'했을 뿐이다. 거기에 연대와 공감, 평등의 운동으로서 '미투'가 있었나. 거기에 우리 사회의 내일을 희망하게 하는 '대화'가 있었나. 처음부터 그런 건 있었던 적 없다.

패자는 있지만, 반성은 없고, 승자는 있지만, 정작 승리는 없는 저질스러운 게임. 그게 조금 전에 끝났을 뿐이다.


슬로우뉴스 좋으셨나요?

이미지를 클릭 하시면 후원페이지가 열립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