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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과 세계명작극장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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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과 세계명작극장의 매력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의 오류

최근 서점가에서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펴낸 지 몇 달 만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화제를 뿌리고 있다. 이 책은 서점가와 방송가에서 여러 좋은 글로 지평이 넓은 작가가 써낸 책이었다.

이 책의 뒤 표지와 프롤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출처:알라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라는 애니메이션 속 대사를 인용한 이 내용은 '10년 전 50화 전편을 보다가 저 장면에서 영상 중지 버튼을 눌렀다.'는 책속의 소개와는 달리, 


작가가 보고 감동했다는 TV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1979)에 등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2009년에 방영된 <빨강머리 앤>의 프리퀄 <안녕, 앤 Before Green Gables>의 1화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총 39화)

유튜브 자막 영상 (이 대사는 본문에서도 인용된다.)

<빨강머리 앤> 100주년 기념 팬픽, <Before Green Gables>

작중 대사에서 앤이 언급하는 ‘엘리자’는 앤이 고아원에 가기 전 거주하고 있던 토마스 집안의 장녀 엘리자 토마스를 가리키는데, 이 인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원작 <빨강머리 앤> 시리즈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해당 2009년 애니메이션은 <빨강머리 앤>의 원소설과 애니메이션에 감동한 캐나다 작가 버지 윌슨이 2008년에 <빨강머리 앤> 100주년 탄생 기념으로 내놓은 <Before Green Gables> 의 내용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캐나다 ‘빨강머리 앤 협회’의 공식 작으로 인정받아 출간되었다.)

서점가에서 이 에세이가 베스트셀러로 진입하게 된 데에는 작가의 집필 역량도 우선했겠지만, 정황을 살펴보실 수 있듯이 그와 상관없는 원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힘이 큰 셈인데, 


2009년에 방영된 <안녕, 앤 Before Green Gables>가 화제를 모았던 까닭 자체가 오랜만에 제작된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 2015년에 40주년을 맞이한 '세계명작극장', "당신이 선택하는 베스트 오브 세계명작극장, 당신이 좋아하는 작품은?'"

'세계명작극장'의 출발

‘세계명작극장’은 본래 1969년부터 일본의 음료 회사 ‘칼피스’의 후원을 받아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영된 시리즈로, 


당시 국내에서의 제작비 부족과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곤욕을 치르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그 해결책의 하나로 내놓은, ‘일본에서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닌 해외에서도 통하는 이야기’의 결과물, 즉 해외의 널리 알려진 고전 명작 소설을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수출을 꾀한 시리즈였다.


  • 이 칼피스 맞습니다(...)
  • 핀란드 작가 토베 얀슨의 그래픽노블 <무민>

토베 얀손의 유명한 그래픽노블 <무민> 을 시작으로 50여 화를 제작해 큰 호응을 얻은 ‘칼피스 만화극장’은 이후 ‘칼피스 어린이 극장’에서 다시 ‘칼피스 패밀리 극장’을 거쳐 ‘세계명작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오랫동안 제작되며 전 세계적인 사랑을 얻는 데 성공했다. 

‘세계명작극장’의 매력은 매우 잘 알려진 원작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데서 나오기보다 오히려 덜 알려진 이야기나 액자 소설형태의 짤막한 이야기에 창의력과 재해석을 붙이고 전 세계 어디서나 공감을 얻고자 했던 무난한 그림체가 각고의 설정 배경 조사와 재현력에 의해 누구에게도 호감을 사기 쉬운 걸작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1975, <플랜더스의 개> 출처: 니폰애니메이션

방송국을 마비시켰던 <플랜더스의 개> 소동

1975년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플랜더스의 개> 같은 작품은 당시 스폰서였던 칼피스사 사장의 아이디어가 마지막 회 내용으로 들어가는 등 제작진이었던 ‘일본 TV 애니메이션’뿐 아닌 관련된 모든 사람이 총력을 기울여 만든 결과물이었으며,


마지막 화를 앞두고 있던 후지TV 애니메이션 방송국은 제발 극 중 어린 주인공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 달라는 애정이 어린 항의에 시달려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 칼피스 사장의 아이디어가 발현된 <플랜더스의 개>시퀀스, 세계 각국의 시청자들을 눈물바다에 빠트린 명장면이 되었다.
참고영상: <플랜더스의 개> 최종화 라스트신

주의: 공공장소에서의 시청은 가급적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시기 방영된 이 애니메이션은 한국어로 번안된 주제가만 해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불리고 유명 가수들까지 다시 자신의 목소리로 부를 정도로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런 사랑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안트워프 지방을 여행하는 세계 각국의 방문객들은 <플랜더스의 개>를 떠올리며 그 지역에서 친숙함을 느끼지만 정작 그 지역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은 물론 해당 소설을 잘 몰라서 서로 서먹해지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한단다.

10년 늦게 소개된 <빨강머리 앤>의 위력

1980년 군부에 의한 방송 통폐합의 악영향으로 순조로웠던 소개와 수입의 흐름이 끊겼던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는 1989년에 이르러서야 1979년의 일본 방영 작 <빨강머리 앤>을 뒷북 수입하기에 이르는데,


그렇게 10년 늦게 안방 TV에 선보인 애니메이션의 위력은 너무나 놀라운 위력을 발휘해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에 푹 빠지게 되었고 2016년에 이르러서 관련 수필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는, 알고 보면 기이하지 않은 현상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 국내에 소개된 애니메이션 극장 타이틀은 '빨간머리 앤' 이다.

‘세계명작극장’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전화위복의 길을 마련했을뿐더러 그 제작현장에서 생겨났던 장인정신이 불세출의 애니메이터들을 길러내는 행운까지도 만들어냈다.

많은 애니메이션 장인들을 길러낸, 문화 콘텐츠의 요람

전 세계에 일본 극장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켰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로 ‘세계명작극장’의 수많은 시리즈에서 작화감독을 맡아 이야기 속에 보이지 않았던 생생한 배경과 인물의 위치 그리고 그 인물들의 심리를 발현한 동작 지정까지 구상했던 인물이었고


그와 손을 잡고 스튜디오 지브리를 창립한 동료이자 선의의 라이벌인 다카하타 이사오가 가장 인상적인 연출력을 발휘했던 작품이 <빨강머리 앤> 이었다.

그들은 이탈리아 아미치스의 소설 <사랑의 학교>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이야기였던 <엄마 찾아 삼만리(일본에서는 삼천리로 표기됐다)>를 장편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해 유럽을 로케이션하며 주인공 마르코의 심경을 TV 화면 속에 절절하게 담아냈고


그들의 이름을 건 스튜디오 지브리의 걸작 <마녀 배달부 키키>를 만들 때, 그 당시 로케이션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유럽의 정취를 꼬마 마녀의 성장 이야기에 담아 절세의 페미니즘 애니메이션을 극장에 걸기도 한 것이다.

  • <엄마찾아 삼만리>

'세계명작극장'은 끝났지만, 그 시도는 계승됐다.

저가의 수출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활로를 틔우는 데 성공했던 ‘세계명작극장’은 30년 동안 그 행진을 계속하는 가운데 본래의 수익 목적보다 오히려 일종의 의무감에 시달리며 수익보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드는 악전고투를 거듭하게 된다.


1997년에 시리즈의 제작을 끝냈던 ‘세계명작극장’은 그 제작진들이 배출해낸 업계의 거장들과 전 세계 팬의 성원에 힘입어 종영 10주년을 맞아 <레미제라블, 소녀 코제트>, <포르피의 기나긴 여행>, <안녕, 앤 Before Green Gables>를 삼 년 연속으로 선보인 뒤 총 28편의 원작 기반 타이틀, 1,382화의 애니메이션 에피소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마무리됐다.(참고로 메인 제작사 니폰애니메이션은 26편을 공식 타이틀로 세우고 있다.)


한국뿐 아닌 전 세계에,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에 ‘굳이 일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은 이야기라면 어디의 누가 만든 것이든 좋다’는 상식을 남긴 ‘세계명작극장’은 지금도 일본 극장 애니메이션에서는 끊임없는 시도가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 2014년작 <추억의 마니>는 '세계명작동화'의 초심을 재연하는데 성공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걸작으로, 원작은 1967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세계명작극장'의 교훈: 한국 콘텐츠는 꼭 한국적이어야만 할까?

애니메이션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 미쉐린 가이드와 빕 구르밍 선정이 많은 뉴스를 낳는 중 외국인이 우수하게 평가한 한국의 식당이나 레스토랑에 한식이 아닌 일식, 이탈리안, 타이 음식 등이 들어간 것이 이채로운 화제를 낳기도 했다. 

  • 무리한 한식 세계화 비판용 짤방으로 자주 쓰이는 이 장면은 어릴 적 스팸을 자주 먹었다는 톰 행크스의 소개에서 나왔다.

오래도록 큰 힘을 발휘하는 문화 콘텐츠가 꼭 자국의 문화나 토속적인 이야기만을 담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음식이나 애니메이션이나 비슷한 교훈을 주는 게 아닐까 싶다.


2016년의 한국 사회에서 제작된지 30년도 넘은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 캐나다 작가 원작의 일본 TV애니메이션임에도 우리 공감 문화 중 하나로 여겨지며 열광적인 사랑을 받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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