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파동 이해를 위한 궁금증들

조회수 2016. 7. 4. 20: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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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파동 이해를 위한 궁금증들



2016년 6월 23일 이뤄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찬반투표' 는 세계적으로 큰 화제와 숱한 경제 효과를 낳았습니다. 물론, 좋지 않은 쪽이었지만요.

일컬어 '브렉시트 사태' 라고 일컫는 일련의 경제 파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궁금증이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실까요.

브렉시트의 뜻과 유래는?

브렉시트는 영국을 뜻하는 브리튼(Britain) 과 탈퇴를 뜻하는 엑시트(Exit)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어디로부터의 탈퇴냐구요? 네,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앞서 먼저 생겨난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그렉시트(Grexit) 인데요. 그렉시트는 그리스와 엑시트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며 (Greek + Exit), 2012년 2월 시티은행의 경제 자문을 맡고 있는 에이브러햄 라바리가 만든 표현입니다.




당시 혹독한 경제한파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리스는 국가 채무불이행 선언과 유럽연합탈퇴를 깊이 고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본래 유럽연합 가입 상태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쌓여있던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면 거꾸로 영국에 득이 되는게 뭔지에 대한 논의와 갈등이 전면으로 떠오른 것이죠.

유럽연합, 그게 뭘까?

영어 약칭 EU 라는 단어로도 익숙한 유럽연합은 1951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석탄 및 철광석 채굴에 대한 공동체 조약을 맺으며 탄생하였습니다.(ECSC)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가 되자 국지적인 결속을 떠나 문화 경제적으로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로서 계속 힘이 더해져 그 명칭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 -> 1967 년 이후 유럽공동체를 뜻하는 EC 로 명칭과 의미가 바뀐다) 가 되었으며 당시의 여러 나라들이 그러했듯이 더 넓은 경제 시장과 그 확대가 큰 무게를 갖고 있었죠.




그러다 1993년 마침내 유럽연합(EU)이 발족되었는데요. 유럽연합은 기존의 유럽공동체를 거대한 조약들로 확대시키고, 거기에 공동 외교 안보정책이라고 불리는 인권과 민주주의 정책들, 그리고 범죄 문제의 사법협력을 결합시켜 만든 거대한 국가 조약 결합입니다.

1993년 이뤄진 유럽연합 설립 조약은 흔히 3개의 기둥으로 이뤄졌다고도 하죠. (유럽공동체, 공동 외교 안보 정책, 범죄 사법협력)

출처: 유럽연합 발족의 타임라인, 그림의 파란 영역이 흔히 '유럽연합 3개의 기둥'으로 불리는 부분

왜 영국에서는 유럽연합 탈퇴 분위기가 생겨났을까?

1993년 이전까지는 느슨한 외교정책에 가까웠던 유럽공동체는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유럽연합이라는 강력한 결속을 바탕으로 가입한 유럽 국가들간의 관세 면제와 행정 편의는 물론,


유로화라는 강력한 통합 화폐가 국가마다 달랐던 통화 의 단점들을 유연하면서도 거시적인 환율 경제로 가입 국가들을 더욱 결속시켰는데요.




그 반면 유럽연합이 국가마다 공통으로 제시한 규약들이 너무 강력했던 나머지 경제적 지위가 높을 수 록 유럽연합에 기여해야 하는 배당금의 액수가 세계 경제 5위인 영국으로서는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인권과 공동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유럽연합의 원칙에 따라 영국에 수 없이 밀려드는 이민자에 대한 정책과 더불어 최근 시리아 사태로부터 더욱 불거진 난민 수용의 문제는 영국의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영국이 유럽연합에 가입해서 얻는 것은 난민, 뜯기는 것은 돈과 일자리' 라는 불만을 표출시키게 되었습니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어떤 사람이었나?

하원의원을 거쳐 30대의 젊은 나이에 보수당의 당수, 그리고 5년뒤 총리가 되어 재선을 거친 현재까지 40대의 젊고 패기 있는 모습을 보여줬던 캐머런은,



(출처: 영국 총리실)


그의 나이만큼이나 파격적이면서 인상적인 정당 정책들을 펼쳐왔는데요, 보수당 당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의 금융규제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반대 정당인 노동당보다 더 노동당스럽다는 평가까지 받아온 전형적인 중도 정치의 행정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항상 불만의 목소리가 크게 오를때마다 오히려 그 목소리를 한데 모아 표결로 부쳐 그 불만 자체를 잠재우는 특유의 결단력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항상 영국연방에 속해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여기는 스코틀랜드 측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2014년 이끌어낸 스코틀랜드 독립투표 가 그 대표적인 정치력이었다고 불 수 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독립하지 않기로 투표결과가 나오면서 독립에 대한 이야기가 쏙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그에 힘입은 캐머런은 유럽연합 탈퇴의 목소리가 드높아지자 역시 내심 '투표로 그 여파를 뭉쳐내면 탈퇴는 물건너 가고 다시 이에 대해 큰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채 '유럽연합 탈퇴 찬반 투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브렉시트 찬성을 지지한 정당 대표들과 정치가들 역시 투표 결과가 설마 찬성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분석이 잇따르는 것인데요.



(강력한 타블로이드 전파력을 바탕으로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 찬성에 표를 던지게 만들었던 일간지 더 선 표지)

서로 반대편에서 찬반 투표로 영국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정치가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도박을 했는지가 드러나는 정황입니다.

덕분에, 캐머론 총리는 총리에서 전격 사임을 선언하고 실제 사임을 해버리고 말았죠.

브렉시트 투표 결과가 찬성으로 나오자 왜 엔화가 폭등했을까?

영국의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가 찬성으로 나오자 영국의 화폐 파운드와 더불어 유로화의 가치 역시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일본의 화폐 엔화의 가치는 엄청난 폭등을 기록했는데요. 도대체 왜 엔화가 그렇게 올랐던 것일까요?


그 원인은 1985년 플라자 호텔에서 이뤄진 재무장관들의 조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뉴욕 플라자 호텔)


1970년대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였는데요. 경제불황을 맞으면서도 물가는 오르는 현상을 가리키는 스태그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과는 또 다른 개념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내수 경제는 불황인데 물가는 오르기만 하는 상황이었으니 1973년 당시 미국은 급속한 경기부양책을 쓰게 됩니다.


스태그플레이션 위기에서 벗어나자 미국의 달러화 가치는 올라갔지만 미국 물건은 해외에서 팔리지 않게 되며 1970년대 말에는 되려 디플레이션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는데요.

그러나 일본의 경우 정반대로 품질의 우수성을 해외에서 인정받아 수출을 넓히고 있던 반면 달러화가 폭등하니 상대적으로 낮은 엔화의 잇점을 살려 미국 뿐 아닌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일본 수출상품이 활약을 합니다.

독일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였죠. 상대적으로 낮은 마르크화와 더불어 독일 상품의 품질이 호평을 받자 미국 프랑스 영국은 일본과 독일의 수출에 의해 내수경제가 큰 압박을 받게 되는데요.

결국 5나라의 재무장관은 뉴욕 플라자 호텔에 모여 서로 환율통제 합의책을 제시하며 더 이상 엔화와 마르크화가 너무 낮은 가치로 시장에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제동을 걸게 됩니다.


(플라자 합의 당시 5개국 재무장관들이 찍은 기념사진)


이후 꾸준히 엔화와 마르크화는 상승하게 되지만 독일의 경우 앞서 유럽연합의 발족과 더불어 새로 만들어진 유료화가 나름의 안전한 환율 방패가 되어줬죠.

하지만 일본의 경우 계속 꾸준히 엔화의 가치가 올라버리자 일본 상품이 예전처럼 해외에서 팔리지 않게 됩니다. 너무 높은 엔화에 고심한 일본의 정치 수장들은 환율 조작이라는 비난을 받아가면서 적극 개입해 각고의 노력을 하며 엔화 가치를 끌어내리려 노력하게 되었는데요.

그런 노력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엔화는 더더욱 안전한 통화로서 화폐시장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엔화는 실제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데 일본 정부가 애써서 엔화를 낮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죠.


급기야 브렉시트 사태가 벌어지자 '일본정부에 의해 상대적으로 낮춰져 있는 엔화는 안심하고 사들일 수 있는 통화' 라는 인식이 유로화와 파운드를 엔화로 바꿔달라는 대량 주문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영국은 정말 유럽연합을 탈퇴할까?

영국의 정치가들이 '설마 탈퇴하게 되지는 않을거야' 하고 안심한 나머지 국민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가게 된 브렉시트는


시간이 흐를 수 록 , 유럽연합에서 받는 불이익보다 영국이 얻는 반사이익이 생각보다 더 큰 것이었으며 영국내의 이민자 정책을 갑자기 바꾼다 해도 그것이 좋은 일자리로 바뀌거나 심지어 그렇게 이민자나 난민을 갑자기 쫓아낼 수 도 없는 것이라는 상황 판단이 찬성했던 측이나 반대했던 측이나 양쪽에 똑같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투표가 끝난 후 영국 인터넷에는 구글 검색엔진에 '유럽연합이 뭐냐?' 라는 질문이 가장 많이 입력되고 검색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정도이니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브렉시트 찬반 투표는 잘 모르고 벌어진 일이며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죠.


(구글 검색 엔진의 트렌드 통계에 의하면 투표가 끝난 직후 영국으로부터 'What is the EU?' 가 가장 많이 검색되었다.)

게다가 왕년의 영국을 그리워한 노년 세대가 섣부른 찬성표를 던져 젊은 세대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는 세대 분열적인 비판까지 일어나고 있어 영국은 정치계건 금융계건 현재 바람 잘날이 없는 실정입니다.


적지 않은 영국 국민들은 캐머론의 뒤를 이어 새로 선출되는 총리가 해당 투표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잘 세우고 이 사태를 안정화시키길 바라고 있기도 하고요.

남의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찬반 투표 소동

영국의 브렉시트 파동을 보면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지난 대통령 선거를 떠올리기도 했답니다.


과거 70년대의 한국경제가 거침없이 성장했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 직계 가족이 다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다는 고령층의 투표는


실제 브렉시스트에서 과거를 쫓으며 유럽연합 탈퇴를 찬성했던 영국의 고령층과 다를 바 없어 보였거든요.


투표는 자유지만 자신이 던지는 표 하나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항상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는 것, 이번 브렉시트가 세계에 던지는 '작지만 큰 교훈'이 아닐까 합니다.



(브렉시트 찬성에 투표했지만 설마 전체 투표결과도 찬성이 될 줄 몰랐다며 후회하는 평범한 영국 시민 아담, 출처: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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