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바다와 G선상의 아리아

조회수 2016. 5. 6. 23:0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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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950년 12월 피난열차 풍경, AP Photo

1951년 1월 한국전쟁은 1.4 후퇴 를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중공군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추위와 배고픔 속에 쫓겨내려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급하게 출발한 어느 피난열차 차량 한구석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 좁은 공간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몸을 웅크린 채 험난한 처지를 더 서럽게 만드는 겨울바람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다 차량이 한번 멈추기라도 하면 그 막연한 공포에 울음이나 화가 섞인 탄식이 웅성거림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일어나 소란스러워지곤 했다.

기차가 멎은 채 두려움만 가득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을 때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한 젊은이가 그의 짐에서 작은 축음기를 꺼내 레코드판을 걸어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참 단순한 가락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 공간을 메우기 시작하자 그 맑은 주제에 소란 거림은 물론 그 일대가 감동의 정적에 잦아들고 말았다.
출처: 1950년의 빅터 축음기, www.graham-ophones.co.uk
불안감을 극복한 사람들을 실은 열차가 다시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 입을 연 사람은 단 한 명이었고 모두 그의 목소리에 말 없는 동감을 보냈다.

'그 곡 한번 더 들려달라'는 어느 노인의 정중한 요청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한 까닭이다.

그 때 사람들의 불안감을 잠재운 전설의 곡은 다름 아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만든 'G 선상의 아리아'였다.
출처: Elias Gottlieb Haußmann 이 그린 1748 년의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1750)

1685년부터 1750년에 이르는 생애에서 오페라를 제외한 모든 음악에 손을 대 그 분야마다 변화와 혁신을 가져왔던 바흐였고 특히 화성(Harmony)에서 위대한 작곡가들을 감동시켰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아, 그가 펼쳤던 대부분의 음악 활동은 궁정의 높으신 분들을 위한 시중과 작은 교회에서의 음악 연주에 바쳐지며 대중의 시선 바깥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바흐는 많은 아들딸을 두었던 만큼 후배들을 매우 아껴 거의 일주에 한 번씩 어린 학생들을 이끌고 정기적인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고 그 시간을 위해서도 다양한 음악들을, 특히 어린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음악을 어렵게 여기지 않도록 '관현악 모음곡을' 틈틈이 만들어내곤 했다.
출처: Toby Edward Rosenthal 이 그린 바흐와 가족들
그랬던 바흐이기에 그가 남긴 음악들은 진가를 알아본 몇 안되는 후배 작곡가들에게만 음악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바흐는 많은 작곡과 혁신적인 공헌들에 비해 만사에서 타협하지 않는 완고한 성격으로 인해 라이프치히 행정관들과, 교회 성직자들과, 교육 관계자들과 충돌을 빚기 일쑤였고 그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 생전은 물론 사후 백년이 지날 때까지 그의 음악이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잠자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그 음악들은 1829년에 이르러서야 한 젊은 음악천재에 의해 재발굴되는데 그의 이름은 펠릭스 멘델스존으로, 낭만파 음악의 거두이면서도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옛 고전파 음악들을 새롭게 돌아보고 재평가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출처: 멘델스존(1778–1862), James Warren Childe 그림
바흐에게 흠뻑 빠진 멘델스존은 급기야 바흐의 오래된 곡을 당시의 신곡처럼 대중 앞에서 초연해 바흐를 널리 알리려는 기획을 세우게 되는데,

그 기획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던 나머지 멘델스존에게 바흐를 알려준 음악스승 프리드리히 첼터마저 너무 옛날 음악이라 사람들이 몰라줄 것이라며 뜯어말릴 정도였다.

그렇게 1829년 '마태수난곡'은 바흐가 연주했던 1729년 이후 딱 백 년 만에 멘델스존에 의해 사람들 앞에 등장했고, 폭발적인 열광과 성공은 백년 묵은 바흐의 음악들이 서양음악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누리게 만들었다.

그제야 많은 음악사가들 또한 베토벤을 비롯한 음악의 거장들이 바흐의 다양한 음악들로부터 큰 후예를 받아왔으며 그 존재가치가 백 년이 지나서야 인정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워하게 되었다.

멘델스존의 뛰어난 능력 중 하나는 누군가의 곡을 당시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치면서도 원곡의 장점은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었는데, 멘델스존의 '마태수난곡'이 일으킨 바흐 재평가 대소동은 그 능력이 가장 절정으로 드러난 일이었다.
'마태수난곡' 사태 이후 60년이 지난 뒤 비슷한 일이 다시 한번 음악계에 재현되는데,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신동으로 인정받던 아우구스트 빌헬르미는 


(August Wilhelmj, 1845-1908 Julius Cornelius Schaarwächter 사진)

1883년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중 하나를 더 쉬운 곡으로 재창조하는데 성공했고, 그가 그렇게 바꾼 곡은 바이올린의 맨 윗줄 G선 하나로만 연주하는 게 가능해 원래 곡의 이름이었던 '아리아'에 별명이 더해져 'G 선상의 아리아'로 불리게 된다. 



(출처: www.the-violin.com)

'G 선상의 아리아'가 빚어내는 공기(아리아는 이태리어로 공기라는 뜻이다.)와 아름다운 선율은 그 뒤 수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감동시켰고 지금도 많은 음악가들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재창조하는 유명한 음악으로 자리했다.
악성 베토벤은 바흐의 이름 Bach 가 '시냇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착안해 "시냇물이 아닌 드넓은 바다(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 "라고 바흐의 음악을 정의했다.


음악의 바다에서 탄생한 수많은 선율들이 비록 재발굴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음악이 가진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상식 하나: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로 한국에 알려졌지만, 이는 일본 교육계가 편의상 붙인 호칭에서 유래했다.
상식 둘: 멘델스존이 정육점 포장지에서 '마태수난곡' 악보를 발견했다는 일화는 스페인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에 등장한 영화적 상상이다.
상식 셋: 1986년 이전까지 이 음악가는 한국에서 '바하'로 불렸으나 외래어 표기법 개정 이후 ch 나 gh를 원어 발음대로 표기하는 새로운 원칙에 따라 '바흐'가 되었다. ('고흐' 도 같은 시기 고호에서 고흐가 되었다.)
상식 넷: 앞서 피난열차에서 울려 퍼진 G 선상의 아리아 이야기는 음악평론가 박용구 선생의 수필을 통해 1968년 교과서에도 소개된 바가 있다.


얼마전 작고한 한국 최고의 음악평론가 박용구 선생(1914-2016) 의 생전모습, 출처 뉴스1



상식 다섯: 그때 열차에서 축음기를 틀었던 청년의 정체는 후일 당대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이인영 선생이었다.
출처: Click SLOW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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