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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못박다: 상징으로서의 민주주의

노무현 대통령의 10주기, 10년 전 그때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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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10주기에 즈음해 10년 전에 쓴 글, 그때의 마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편집자)

강준만은 '심정민주주의'라고도 했고 '욱 민주주의'라고도 했다(한겨레21. '시스템의 노무현 죽이기') 의미있는 명명이다. 강준만은 김주열과 박종철과 이한열이 4.19와 6월 항쟁을 불러냈다고 생각한다. 


최루탄을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고 이한열의 모습

출처로이터

적어도 그 사람이름, 그 고유명사가 그 혁명과 항쟁을 폭발시켰다고 강준만은 생각한다. 그게 강준만에게는 '심정'이면서, '욱'이라는 한국 특유 정서다. 좀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그건 상징(에 의해 유도된 감정)이다.

민주주의와 상징의 상관관계는 이처럼 자명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각성한 시민사회의 자발적이고 이성적인 내적 성숙에 의해 그 자체로 점진적으로 진보를 향해 전진한다는 가정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 가정. 그게 망상이라고 강준만이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 짧은 기사의 인용만으로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일견 이성적인 시민사회라는 이상적 모델에 대한 불신이 강준만의 가설 속에선 자리하는 것 같다. 

그런 거친 전제에 대한 추론이 어느 정도 맞다면, 나는 강준만이 행한 한국적 상황에 대한 진단(가설), 특히나 상징의 효용을 강조한 부분에 공감한다. 대한민국은 전혀 이성적인 사회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민사회라는 게 과연 합리적인 운동원리를 갖고 작동하고 있는지도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 그 고비 고비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위대한 성취와 전진에 대해선 크게 공감하고, 또 감격하고 있기는 하다. 

이성적 토론과 민주적 대화를 통한 시스템의 내적 원리가 일상이라는 혈관으로까지 흐르지 못한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 ㄱ. 역사로서는 청산하지 못한 일제에 뿌리둔 정치권력 ㄴ. 자본으로서는 미종속적 매판자본에 뿌리한 기업권력, ㄷ. 그리고 이들과 딴 몸이었던 적 없는 수구적 담론권력(흔히 '조중동'으로 상징되는)은 이른바 우리사회의 '주류'를 자처하며 자신의 역겨운 태생을 적극적으로 위장했다. 그들은 학벌과 자본이라는 새로운 위계의 질서를 세우며 스스로를 귀족화했으며,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공화국의 정신을 짓밟았다. 

국민주권이라는 공허한 관념은 공식적인 질서의 표피를 치장하는 악세사리에 불과했다. 더러운 원죄를 가진 그들은 타락한 귀족사회의 위계와 주류/비주류라는 구별적 표지의 성채들을 더욱 공고히 쌓았다. 

그 성채는 이 모든 위계와 구별이 합리적이라고 강변하는 기만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때론 정치적 선동과 계몽을 통해서 더욱 단단해졌고, 이것이 조선일보가 흠모하는 박정희 시스템의 완성이다. 물론 여기에 '북한'이라는 '영원한 타자'가 자리한다. 그리고 전두환은 이 시스템의 균열(광주)을 폭력으로 잠재우려 했던, 그 타락한 역사가 예정한, 박정희의 사생아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교활하고, 막강한 자가발전적인 시스템 속에서 민주주의는 항상 '인간적'이라는 가치를 한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내딛기 위해서, 잔인할 만큼의 희생과 그 희생의 상징을 그 대가로 요구해왔다. 앞서 김주열이 그랬고, 잠재된 뇌관으로서 광주가 그랬으며, 박종철과 이한열이 그랬다. 그들은 인간성을 옥죄는 기만의 구조와 폭력의 구조를 극적인 상징으로 폭로한다.


그들은 내면화된 순응주의이라는 시스템의 원리를 '피'라는 가장 원초적인 상징으로 깨뜨리는 전복자로서의 상징들이다. 하지만 내면화된 순응화 기제들은 '인간적'라는 가치의 표피적인 진보와 더불어 진화해왔다. 그걸 주도한 건 일견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본의 성장과 여기에 빌붙어 먹은 기만적 담론권력의 성장이다. 그리고 거기에 일상적인 욕망이라는 마취제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눈부시고, 섹시한 발전으로 통해 그 주변을 애워쌓았다. 

그래서 포스코 노동자들의 피와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절규와 용산에서 타올랐던 야만의 불기둥이 그토록 쉽게 지워버릴 수 있었으며, 우리들은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기엔 너무 많은 쓸모없는 정보들을 생존을 위해, 우리들의 습관을 위해 학습하고, 복습해야 했으며, 더 많은 물질적인 유혹들을 시기와 질투의 회로들 속에 입력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욕망 기계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것이 우리들의 공식적인 사회에서는 '성공'이라는 자랑스런 비교 표지였다. 

그래서 이토록 순응화되고, 내면화된 분노를 꺼내줄 상징은 좀더 고결하고, 좀더 드높은 상징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노무현은 거기에 가장 부합하는 상징이다. 그는 우리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드높은 상징이었다.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가장 존엄한 자리에 까지 올랐다. 

물론 우리는 그를 그토록 쉽게 내버렸다. 그건 합법으로 위장된 야만의 기제들 속에서 우리가 기꺼이 합의한 무관심의 메카니즘에 따른 결과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은 우리 자신 내부에 있는 속물근성의 표지인 동시에, 그렇게 성취와 쇠락의 비극적 영웅의 표상이자, 우리들 자신이기도 하다. 

이 상징을 무화시킬 다른 상징들은 앞으로 당분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렇게 일상적으로 내재된 분노와 그 분노를 억압하는 각종의 기만적인 장치들에 의해 억눌리고 내면화된 에너지를 꺼내줄 상징은 흔히 열사라는 이름으로 호명된다. 그렇게 불려진 이름들이 드디어 시스템에 의해 길들여지고 내면화된 억압을 폭발시키고, 그 폭발된 에너지는 사회의 근간을 새롭게 재질서화하는 초석적인 폭력의 형태로 표출된다. 이른바 혁명이라는 이름은 그런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두 가지 원인적 의미로 크게 유추할 수 있다.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공화국의 적'(검찰과 한나라당, 조중동, 거대기업으로 상징되는 정경언사법 복합체)이 만들어낸 정치적 타살이 그 표피라면, 정치인으로서 스스로자신의 존엄을 최소한으로 지키기 위한 강요받은 선택으로서의 정치적 존엄사라는 내적 의미가 그것이다. 나는 노무현의 죽음이 지시하는 그 두 가지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노무현의 죽음을 둘러싼 표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무현의 죽음에 둘러쌓인 하나의 표지에 불과하다. 노무현의 죽음은 과거로서 대상화되는 죽음이 아니라 날마다 살아서 커져가는 '생명으로서의 죽음', '상징으로서의 죽음'이면서, '그 죽음 자체가 상징인 죽음'이다. 그 죽음은 점점 더 커다란 상징으로 자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는다.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될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질문이다.  


노무현은 '혁명'을 불러내는 이름인가?

노무현은 초석적 폭력의 제의를 만들어내는 속죄양으로서의 상징인가?

노무현은 이제 타오르는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노무현은 이 압도적인 기만과 침묵의 사슬을 모두 녹여버릴 폭발하는 용암같은 존재로 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의 유언인 "원망하지 마라"를 조선일보에서 인용하는 건 넌센스다. 

그건 노무현이 조선일보(이걸 이명박이나 검찰, 혹은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으로 바꿔도 상관없다)에 건넨 마지막 농담 같다. 조선일보 김대중은 한 달 전 오늘 "노무현씨를 버리자"라는 칼럼을 쓰면서, 온갖 저열한 경멸과 저주를 노무현에게 퍼붇고 있다.

김대중은 "더이상 '노무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했지만, 그 바람은 이제 이뤄지지 못하는 바람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도 조선일보는, 조선일보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노무현이라는 위대한 상징을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조롱했던 저열한 악당의 이름으로 인용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 이름은 치욕스런 악명으로서 기억될 확률이 아주 아주 높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일보 김대중은 이제 "더이상 '김대중'이 (노무현과 더불어) 역사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유언을 남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할 때 그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정신(사상)과 체제(시스템)를 공히 일컫는다. 노무현은 민주주의라는 정신이 체제(시스템)라는 표피적인 합리성에 의해, 그러니 법과 제도와 언론이라는 합법을 가장한 기만적인 시스템에 의해 교란되고, 배반당하는 그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럼으로써 그 시스템의 총체적인 기만에 경종을 울리며 스스로를 영원한 상징으로 한국의 현대사에 봉인해 버렸다. 그 봉인은 앞으로 풀려질 것이지만, 누가 그 봉인을 풀어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순결한 순교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용감한 속죄자다. 그가 시스템의 유혹들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소한 시스템에 저항하고, 그 시스템 자체를 회의했으며, 그 시스템에 유혹당한 자신을 처단했다. 생존만이 유일한 덕목인 타락한 한국 정치판에서 이런 고결한 자기 희생, 자기 속죄는 이전까지의 정치사에서도 없었고, 앞으로의 정치사에서도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건 마치 마틴 스콜세지가 그려낸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의 마지막 장면과도 겹친다. 생인지 꿈인지 모를 그 모든 유혹의 환영들이 지워진 뒤에 '그'가 낮게 읊조린다.


'다 이루었도다'

물론 지금/여기에서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역시 노무현을 못박은 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2009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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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by. 민노씨 슬로우뉴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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