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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전한 5·18의 진실

조회수 2017. 5. 18. 01:0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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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시 5.18입니다. 뒤늦게 세상에 전해진 그날의 진실, 그 기록을 되돌아봅니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에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 이성복, 그날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신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튿날 신문이 배달됐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신문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튿날의 신문에서 이미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의 단초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멀어지는 광주... 뒤늦은 보도, 부족했던 보도

경향신문은 1980년 5월 19일자 1면 머릿기사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제목은 ‘비상계엄 전국에 확대’이고 부제는 다음과 같다. 

  • 정치활동 중지 
  • 전대학 휴교령 
  • 북괴동태ㆍ소요사태 감안 계엄포고 10호 선포 
  • 파업ㆍ옥내외집회ㆍ시위불허 
  • 영장없이 체포ㆍ언론은 검열

같은 날 동아일보가 역시 1면에 전재한 정부의 ‘계엄포고 제10호’에서 이 부분은 이렇게 표현됐다: “㉯언론 출판 보도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출처: ⓒ5.18기념재단

이 때문에 신문들은 5월 18일 광주라는 대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하지 못했다. 이들은 21일이 돼서야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다는 것을 보도했지만, 역시 충분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누락됐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면에 ‘광주일원 데모사태’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으나 내용은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는 게 전부다. 

경향신문은 ‘광주일원 소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으나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연 3일째 전남광주 일원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21일 공식 발표했다. 이날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며 계엄사의 발표문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다. 아마 검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쓸 수 없다고 취재조차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는 이미 내신뿐 아니라 외신 기자들도 발길을 광주로 향했던 시점이었다. 이들이 당시 취재했던 것과 이후의 소회를 담은 책이 한국기자협회와 무등일보, 시민연대모임이 공동으로 엮어 풀빛에서 출간한 <5ㆍ18 특파원리포트>  (글쓴이: 한국기자협회, 출판사: 풀빛, 발행일: 1997년)다.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은 당시 광주에서 엄청난 수의 시체를 확인했고 무자비한 폭력을 목도했다.

외신 기자들 환영한 광주

5월20일 밤에 취재를 위해 광주로 향하던 테리 앤더슨 AP통신 기자는 광주 경계선에서 시민군들의 총격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이내 그의 기자 신분을 밝히자 시민군 사령부로 안내 받았다.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어 “Kija! Kija! (기자! 기자!)”를 외쳤기 때문이다.

앤더슨 기자는 21일 하룻동안 시체 안치소와 병원 영안실을 돌아다니며 100구가 넘는 시체를 확인했다. 대부분 총에 맞거나 몽둥이질당하고 차량에 짓눌린 상태였다는 게 그의 취재 결과다. 그리고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일부 주장과는 달리 시민군이 매우 약했다는 사실만을 전했다.

전반적인 분위기로 따져 보았을 때 협상은 불가능했고, 조만간 벌어질 전투에서 시민군의 승산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들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소총들은 탱크와 장갑차 앞에서 바람에 날리는 눈발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27쪽)
내가 반란군 진영에서 본 가장 강력한 화기는 한국전쟁 당시 쓰던 대전차포였는데, 지금 군인들이 앞세운 현대식 전차에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28~29쪽)
출처: ⓒ5.18기념재단

27일까지 광주에서 취재를 계속했던 그는 군인들이 당시 시민군 사령부가 있던 건물을 점령하는 과정도 지켜봤다.

전형적인 시가전 교본에 따라 그들(공수부대원)은 빌딩의 꼭대기로 올라간 다음 한층 한층 내려오며 ‘청소’를 시작했다. 군인들은 방마다 충격 수류탄을 던져넣고 돌입하여 움직이는 것은 모두 쏘아댔다 (29~30쪽)

‘청소’가 다 끝난 뒤 아침, 앤더슨 기자는 계엄사령부와 같이 언론에 거짓을 말하는 한 군인의 모습도 전한다.

“대령, 사상자는 몇이나 됩니까?”
‘김’이라는 이름이 셔츠 주머니 위에 새겨져 있던 그 대령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폭도 둘과 군인 한 명이 죽었소.”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우리는 도청 건물 주위를 돌면서 17구의 시체를 확인했는데(…) (30~31쪽)

26일 밤 광주 시내 여관에 있었던 헨리 스톡스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는 새벽녘 어떤 젊은 여자의 확성기 소리에 잠을 깼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뭉크의 ‘비명(절규)’를 떠올렸다고 회상했다.

“그때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누군가 도청에서 확성기를 틀고 있었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몹시 흥분하여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캄캄한 도시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애띤 목청으로 소리치는 동안 울려나온 말들은 동일하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비명, 하나의 부르짖음이 되어 모르면 몰라도 십여 분간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43~44쪽)

우리는 지금 이 확성기 소리의 주인공이 박영순과 이경희라는 두 명이며, 그 내용은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톡스 기자는 뭉크의 ‘비명’에 목청이 생겨나 엄청난 크기의 소리를 토해낸다고 상상해보라고 말하면서 “셰익스피어의 비극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이처럼 힘찬 ‘비명’을 요구하는 국면은 없다”고 단언한다.

외신 기자들이 환영을 받았던 이유는 내신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 내신이 제 역할을 못하니 광주는 섬이 됐다. 스톡스 기자보다 앞서 21일 아침 광주에 들어선 심재훈 뉴욕타임스 기자는 필립 퐁스 프랑스 르몽드 기자와 함께 광주로 들어서다가 시민군에게 환영받은 일화를 소개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 미국의 뉴욕타임스지와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가 광주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드디어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자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변의 군중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우리를 환영했다. 우리는 마치 개선장군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들에게 우리가 구세주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들의 봉기는 철저히 외부 세계와 단절돼 있었다. 서울 등 외부 세계는 그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의 등장이야말로 외부 세계에 광주의 실상을 알릴 수 있는 첫 통로였다.
(…)
광주시민들은 당시 국내언론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반면 외신기자라면 무조건 통과시켰다.(66쪽)

심 기자는 21일 취재한 기사를 송고하려고, 이미 통신이 두절된 광주를 떠나 1시간 거리인 순천으로 갔다. 그는 순천 사람들이 퐁스 기자와 자신의 옷에 피가 가득 묻어 있는 것을 보고 질겁을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서울이 아니라 순천에도 당시 광주의 상황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전화통을 들고 서울을 거쳐 본사로 기사를 불러댄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사는 다음날 뉴욕타임스와 르몽드의 1면을 장식한다.

내신 기자들이 본 광주

당시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내신 기자들도 이 책을 쓰기 위해 옛 취재수첩을 도로 꺼냈다.

장재열 당시 중앙일보 기자는 항쟁 기간 중 기자들이 서로 지켜본 현장을 정리한 좌담회 내용을 소개했다. 그 중에는 계엄군이 독서실 안으로 들어가 입시 준비 중인 고교생을 구타했다, 학생들이 공부 중인 강의실에 난입해 곤봉으로 마구 때렸다, 시민들이 학원생을 옷 벗겨 구타했다,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을 던졌다, 사망자가 확인됐다, 취재기자에 대한 불신이 상당해서 기자가 다 뭐냐며 돌을 던지기도 했다 등이 포함됐다.

장 기자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이 있은 이후에도 광주에 남았던 모양이다. 그는 YWCA건물 2층에 있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진압이 끝난지 이틀째인 28일 오후 12시50분까지도 굳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휴교했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가 일제히 문을 연 31일 초등학교 학생을 찾아가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를 물은 장 기자는 “군인 아저씨가 사람 죽인 이야기요”라는 답을 듣고 놀랐다고 전했다. 당시 상황은 어린 학생들에게도 이렇게 분명하게 인식됐던 모양이다.

출처: ⓒ5.18기념재단

나중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후보 시절 정책특보를 지내게 되는 김충근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계엄군의 행동을 ‘인간사냥’이라고 이름 붙였다. 김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계엄군은 도망가는 청년에게 대검을 던지고 고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수험생들을 폭행했다. 

군중 속은 물론이고 지하실이나 가게 안, 심지어 가정집 안방에까지 추적해 끝까지 초주검을 만들었다. 젊은 여성은 블라우스와 바지 또는 치맛자락을 찢어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든 다음 폭행을 가했는데,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이 더 심했고 가격하는 곳은 여체의 특정 부위에 집중됐다.

출처: ⓒ5.18기념재단

경남 마산 출신인 그는 당시 서울 데스크와 통화하면서 광주의 상황을 이전의 3ㆍ15 마산의거와 사북사태, 부마사태와 비교하면서 100분위 지진계로 비유하자면 3ㆍ15 의거가 40도, 사북사태가 45도, 부마사태가 60도인데 비해 광주는 바늘이 100도를 때려 부러진 상태라고 표현했다.

부마사태와 사북사태, 10ㆍ26, 12ㆍ12사태 등을 단골로 취재해 ‘사태기자’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김 기자는 광주항쟁이 부마사태와 명확히 구분되는 특징으로 군의 진압방식의 차이를 들었다. 부마사태 당시 군은 시위대를 진압하고 해산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위협을 가하는 데 그쳤지만 광주는 달랐다는 것이다. 

정확히 대오를 갖춰 대기하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시위 군중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 인육 살상과 같은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는 식이었다. 또 부마사태 때는 군인들이 모두 개인무장과 군장을 갖추고 소속 부대도 분명했지만, 광주에서는 계급장을 제외한 명찰과 군부대 마크에 테이프를 붙여 가린 상태여서 ‘군인 복장의 괴한’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김 기자는 전했다.

출처: ⓒ5.18기념재단

서청원 당시 조선일보 기자는 27일 새벽부터 총소리가 시작됐으며 새벽 4시에 광주 KBS방송이 투항 권유 방송을 했고, 5시12분 총소리가 멎었다고 타임라인을 기록했다. 

5시25분에는 계엄분소장이 “그 동안 군이 진압하지 않기로 시민대표들과 약속했으나 성과가 없었으며, 불량배ㆍ깡패ㆍ전과자들이 시민군을 조직, 이적행위를 해 어쩔 수 없이 진압했다”고 발표했다. 새벽 6시에는 사망자 2명에 체포된 사람이 207명이며 민간인의 피해는 없다는 군의 작전전황이 발표됐다. 그러나 서 기자는 프레스 카드와 신분증을 내보였음에도 군인들에 막혀 여관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김대중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현 조선일보 고문)은 변명을 곁들여 당시 검열의 실상을 고백했다. 검열 상황에서 기사를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실수를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서울에 돌아와 나는 비록 아무 도움도 되지는 않겠지만 이른바 ‘대치장소’의 분위기라도 전달할 수 있을까 해서 기사를 썼다. 별것도 아닌 스케치 기사를 놓고 검열당국은 ‘폭도’라는 단어를 쓸 것을 통과의 조건으로 냈다. 승강이 끝에 나는 안 쓰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는 표현으로 고쳐줬다.

나는 지금 그럴 바에야 그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 기사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올랐었다는 것만은 적어두고 싶다. 결국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초라한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289쪽)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은 나중에 그의 이 변명을 두고 “이게 (김 고문이 평소 강조하던) 직필인가”라고 되물으며 비난하기도 했다.

북 개입설, 사실일까

종편 채널이 5ㆍ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을 방송한 적 있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 따르면 이런 주장은 전혀 터무니없다.

출처: ©TV조선

김충근 기자는 광주의 성격을 가장 적나라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노래를 들었다. 일부 대학생들이 대학가에서 부르던 데모가들을 선창했지만 시위대의 호응은 시원치 않았고, 결국 시위대가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애국가’와 ‘아리랑’, 그리고 ‘우리의 소원’이었다는 것이다.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거나 연좌농성을 벌이다 다시 가두시위에 나설 때는 결의를 재충전하는 의미 겸 각자의 맹세를 다짐하는 의미로 애국가를 불렀다”는 게 김 기자의 취재 내용이다. 그리고 애국가 하나만으로는 밤낮 계속되는 시위에 부족함이 많아 모든 시위 군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고 한다. 김 기자는 “우리의 대표적 민요 아리랑이 갖는 그토록 피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고 소회를 말했다.

5ㆍ18을 현장 취재한 게브하르트 힐셔 당시 독일 슈트도이체차이퉁 기자는 80년 5월 30일자 신문에 실은 사설을 통해 북한 관련설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힐셔 기자에 따르면 오히려 ‘이적활동’을 한 것은 시민군이 아니라 계엄군이었다: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대다수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합류했던 최근의 항쟁을 북한으로부터 남파된 간첩 또는 소위 용공분자들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하는 군부의 시도는 사실의 왜곡일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정치를 단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법과 질서만 유지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협한 사고방식과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
만약 광주항쟁이 어떤 측면에서든지 북한을 이롭게 했다고 강변한다면 그것은 바로 광주시민들이 체험한, 발생 초기에는 매우 평화적이었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공수부대가 자행한 무자비하고도 극심한 야만성이야말로 북한을 이롭게 한 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전쟁 중의 쓰라린 체험을 통해서 한국 국민들은 그러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집단은 오직 공산당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하지 않은 젊은 시위대(그 중에는 다수의 고등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희생자 중에는 여학생들도 많았다)를 대낮에 겁에 질린 시민들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난사한 행위가 단순히 계엄령 확대를 반대하여 일어난 시위를 무장시민항쟁으로 바꾸어 자연발생적인 분노를 폭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91~92쪽)

그렇다면 광주의 북한 관련설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당시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헨리 스톡스가 전한 내용이 어쩌면 그 단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두환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면 남한의 기본적인 시각은, 이는 내가 전두환의 군대 동료들이나 그의 ‘정보’ 장교들과 나눈 대화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나무란 나무에는 모조리 북한 앞잡이가 달라붙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주에는 널찍한 대로든 좁다란 공원이든, 금방 보아도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납작하고 칙칙한 도청 청사 주변에든 나무가 별로 없었다. 나무 한 그루마다 북한 간첩 하나로 계산되는 판인데. (39쪽)

요컨대 당시 신군부는 간첩에 대한 노이로제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었거나, 혹은 적어도 국민들이 그런 간첩에 대한 노이로제에 시달리기를 바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적어도 80년 5월에 광주에서는 간첩에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시위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더구나 북한군 1개 대대가 광주에 발을 들인 적은 없었던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스톡스 기자는 계엄군의 광주 진압이 끝난 27일 아침 “희한한” 헬기의 행진을 보게 된다.



“그들이 떠 있는 높이는 족히 6백여 미터는 되었다. 혹시나 당할지 모르는 불상사를 고려한 고도로는 너무나 높았다.

(…)

더군다나 이 도시에는 비행물체 공격용 무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군부는 저항이 지극히 산발적이고 지극히 미미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그들은 북한 사람 또는 눈에 보이는 나무줄기 뒤에 숨어 있을, 그에 비견할 존재에 대한 그들 자신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여보세요, 광주는 저항하고 있지도 않잖소!”(46~47쪽)

종편의 5ㆍ18 왜곡 보도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부 누리꾼의 등장은, 어쩌면 이런 신군부의 망상이 부활한 모양새가 아닐까 싶다. 외신 기자들도, 이른바 ‘조중동’ 기자들도 언급하지 않은 북한 관련설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단 말인가. 

왜곡 보도를 한 매체는 TV조선과 채널A인데 모체가 된 회사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당시 현장 기자의 취재 내용과도 배치되는 것을 아무런 검증 없이 내보내는 것은 올바른 일인가. 한 번 꼭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한편, 5ㆍ18은 이편도 저편도 아닌 기자의 자괴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장이기도 했다. 흔히 기자들은 엄청난 비극을 목도하면 이를 도와야 하느냐 아니면 사진을 찍어 이를 알려야 하느냐로 논쟁하곤 한다. 퓰리처 상 수상자들도 이 때문에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역시 당시 광주에서 현장 취재를 했던 오효진 당시 MBC 기자(나중에 자민련 소속으로 충북 청원군수를 지낸다)는 27일 아침 군에 연행됐던 한 청년이 5년 뒤 자신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기자들이 우리 옆에 있을 땐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잡혀갈 때 보니까 군인들 옆에 서 있어요.”(171쪽)

조성호 당시 한국일보 기자(전 레디앙미디어 대표이사)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이렇게 썼다:

광주항쟁은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도청 점령 작전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도청 앞에는 기자들이 계엄군이 내준 보도완장을 차고 활보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시민군’에 출입비표를 내보이고 들어갔던 도청이었다. (203쪽)

스톡스 뉴욕타임스 기자는 아마 윤상원 열사로 추정되는 시민군 대변인이 외신 기자들에게 ‘빌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를 찾아가 폭력을 자제하고 타협을 선언하도록 주문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그는 “기자란 자신이 기삿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고민한다. 그런 호소를 전하지 않고 모른 체하는 것은 역시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택한 길은 기사를 통해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용을 충실히 기사로 써서 보도했다.

앤더슨 AP통신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언론인으로서 우리는 중립을 지키고 최대한 객관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옳고 그른 것을 몰라도 된다는 말은 아니며, 독재자와 자유 경선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 그리고 압제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들간의 차이를 확실히 구별하기는 어렵고 자주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단지 직접 본 것과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보도하고 독자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31~32쪽)

그리고 장재열 당시 중앙일보 기자는 5ㆍ18이라는 과거를 덮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식의 단순논리를 비판하며 “적당히 넘긴 과거는 망령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잡아끈다. 오히려 과거에 대한 치열한 추구가 미래를 밝게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계엄군이 광주 진압을 끝낸 5월 27일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광주를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 한 그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을 맺는 데는 황지우의 시 한 편이 제격일 법하다.


 

– 황지우, 묵념 5분 27초 전문(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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