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활약한 '과학 커뮤티케이터'

조회수 2019. 8. 2. 19: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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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과학자

요즘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직업적으로 주목 받고 있습니다. 어려운 과학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도와주는 직업인데요. 한국과학커뮤니케이터협회 자료를 보면 과학커뮤니케이터란 과학을 매개로 대중과 소통하는 다양한 직업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즉 과학관의 큐레이터, 창의실험지도사, 과학마술쇼를 진행하는 과학마술사, 과학저술가 등의 직업을 통틀어 과학커뮤니케이터라고 부릅니다.

출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김용관 선생.

그런데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바로 김용관이라는 인물입니다. 김용관 선생은 조선인을 위한 과학 학회를 개설하는 등 과학 대중화에 힘을 썼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과학의 날'을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김용관 선생은 1897년 3월 21일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한 뒤 조선 총독부 장학생으로 일본 구리마에고등공업학교로 유학을 떠납니다. 김용관 선생은 유학 생활 도중 일본의 과학기술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선의 대중적 과학 교육은 열악한 편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주권 침탈 이후 이런 현상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일제는 일본어 보급을 주된 목적으로 보통교육과 낮은 수준의 실업교육을 실시합니다. 우민화 정책도 도입합니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 방침은 그야말로 '일본에 충직한 바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어 교육이 주당 10시간이었던 반면 산술과 이과 과목은 주당 2시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실업학교인 공업학교에서는 공업실기 과목의 수업시간이 수학과 이과 과목의 수업 시간보다 2배나 많았다고 합니다.

출처: 서울시
일제강점기 경성공업학교의 실습 풍경.

식민지 교육 방침은 1905년에 임명된 학부 고문 시데하라 히로시와 교육 행정가 유게 코타로 등이 정립했는데요. 이들은 "식민지 사람들에게 보통교육으로 일본어를 보급하고 실생활에 쓰이는 지식을 가르쳐 식민지민의 실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본국민과 식민지민의 교육에 차별을 둬 식민지민의 경우 고등교육이나 문학교육보다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에 치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유게 코타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이런 교육 방침의 이유는 식민지 인민의 자각을 막는 데 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과학 교육과 같은 고등교육을 억제함과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 함양할 수 있는 기회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또한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여러 사업에 종사할 하급 기능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일제는 실업교육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던 겁니다.

사람을 모으다
출처: 독립기념관
조선발명학회의 과학의 날 준비회의 장면.

김용관 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지도층 조선인들을 동원해 1924년 '발명학회'를 조직했습니다. <한국과학사학회지> 자료를 보면 선생은 자금력이 없는 젊은 기술자들만으로는 학회 설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경성고공 동문뿐 아니라 당시 유력한 사회 명사들까지 학회에 참여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선생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발명을 직접 해볼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하는데요. 과학이 꼭 과학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전해집니다. 발명학회의 이사장이었던 이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발명의 역사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류 문명의 대부분이 발명에 의해 이룩된 것으로 보면
발명가의 인류에 대한 기여와 공헌은 참으로 큰 것이다.
산업을 개혁해 국가 사회의 경제력을 충실하게 하는 것도 발명의 힘이요,
문화가 발달해 전대에 없던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도 발명의 힘인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운동백과사전
과학조선 창간호.

김용관 선생은 또한 1932년 <과학조선>이라는 우리 민족 최초의 과학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선생은 1934년 <과학조선> 6월호 '과학지식 보급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주장했습니다.

우리 조선은 과학이라고 하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학문으로 생각해
과학이 실제 사회와 거의 절연상태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의 황무지가 됐으니 이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쓰고 접촉하는 외국의 과학 제품이 밀물처럼 들어와서
우리의 주머닛돈을 자꾸 남에게 뺏기고 있습니다.
나는 과학조선의 앞날을 위해 이 방면에 일하기를 쉬지 아니할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호소합니다.

<과학조선>에는 '질문과 응답'이라는 코너도 있었는데요. 과학 상식을 알려 지적 흥미를 돋우기 위한 아이디어였습니다. 

Q. 태양광선은 지구에 도달하는 데 몇 초가 걸립니까?
A. 대략 8분 16초올시다.

Q. 전등은 직류입니까? 교류입니까?
A. 교류올시다.

Q. 자석에는 어째서 철이 붙습니까?
A. 이것은 아직 학설이 없습니다. 자연계의 신비입니다. 당신 같은 이가 신비를 해결하십시오. 자석은 철 이외에도 니켈, 코발트 같은 금속을 붙입니다. 요새 새로 나온 10전, 5전짜리 동전은 잘 붙습니다. 실험해 보십시오.
출처: 한국민족운동백과사전
과학데이 포스터.

김용관 선생은 1934년 4월 19일 '과학의 날'을 지정합니다. 1934년 4월 19일은 자연선택과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된 날이었는데요. 이 날 김용관 선생은 발명학회 사람들과 함께 '과학 데이'를 개최해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선생을 중심으로 한 발명학회는 '과학의 생활화! 생활의 과학화!'라는 표어를 중심으로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고 합니다.

일제의 방해를 받다

1938년 4월 19일 선생은 '제5회 과학 데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요. 김용관 선생은 행사 도중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선인들 사이에서 과학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일제는 이게 위험하다고 판단해 민족운동 탄압의 일환으로 김용관 선생을 체포한 것 같다는 게 전문가들의 추정입니다.

출처: 한국과학창의재단
제1회 과학데이 기념식.

선생의 옥고를 마지막으로 '과학 데이' 행사는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발명학회는 일본발명협회 조선지부라는 이름으로 흡수됐으며 <과학조선>도 명맥 유지가 어려워졌습니다. 김용관은 예전 만큼의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1940년 <과학조선>이 복간됐을 때 명신중학교 교사 명의로 '독가스에 대하여'라는 글을 투고했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 임종태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제17권 제2호(1995)
  • 김태호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과학>
  • 이종호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 시대를 앞선 통찰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던 우리 과학자들>
  • 박성래 <인물 과학사>
  • 우리누리 <그래서 이런 날이 생겼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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