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명을 써야했던 과학자가 있다

조회수 2017. 5. 8. 06: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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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과학자
그의 가명: 스튜던트
출처: PRICEONOMICS
윌리엄 고셋의 사진

‘스튜던트’라는 가명을 써야 했던 과학자, 윌리엄 고셋(William Sealy Gosset)입니다.

고셋은 영국의 통계학자이자 양조기술사였습니다. 통계전문 매체 <PRICEONOMICS>에 따르면 고셋은 윈체스터 대학에서 수학과 자연 과학을 공부한 뒤 옥스포드에 편입했고 1899년 기네스에 취직했다고 합니다.



고셋이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기네스는 세계적인 규모의 양조장을 가진 회사였습니다. 오늘날 주류회사 못지 않게 제품의 맛을 개선하는데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데요. 당시 기네스는 생산량을 증가시키면서도 특유의 향과 맛을 유지하기 위해 고셋에게 맥주에 들어가는 ‘홉’의 이상적인 비율을 알아내달라고 부탁합니다.

분석을 위해 고셋에게 제공되는 맥주 양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표본을 통해 전체의 비율을 유추하는 통계적 방법을 적용했고 적은 양의 맥주로 이상적인 홉의 비율을 알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직장인의 비애
출처: SSACSTAT
기네스 사진

고셋은 이 발견을 자신의 이름으로 학계에 공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기네스사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죠. 기네스는 고셋의 발견을 독점해 다른 양조업체보다 경쟁 우위에 서고자 했습니다. 연구원이었지만 동시에 회사원이기도 했던 고셋은 기네스와 절충을 시도합니다.


고셋은 기네스측에 ‘연구원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가명이라면 연구 내용을 발표해도 좋다’는 내용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고셋은 본인의 연구 성과를 ‘스튜던트’라는 가명으로 1908년 옥스포드 대학교 학술지 <Biometrika>에 싣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티 테스트’
티 테스트에서 T값을 구하는 공식

그렇습니다. 대학에서 통계나 조사방법론을 공부할 때 한 번쯤은 다루거나 듣게 되는 T-Test가 그의 연구입니다. 두 집단 간의 평균 차이를 검증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 남성과 덴마크 남성은 평균 신장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와 같은 연구를 진행할 때 쓰이는 방법이죠. T-Test의 ‘T’가 고셋의 가명 ‘스튜던트(Student)’에서 유래 됐다고 <PRICEONOMICS>는 전합니다.

또 다른 가명 : ‘사일런스 두굿’
출처: The Museum of Hoaxes
사일런스 두굿 상상도

1706년 1월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집안에 13남매 가운데 10번째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납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교육은 2년 밖에 받지 못했지만 아이는 또래에 비해 뛰어난 글솜씨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아이는 열두 살 때 형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게 됩니다. 1720년 아이가 일하던 인쇄소에서는 <뉴잉글랜드 커런트>라는 신문을 인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보스턴 회보>라는 신문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바람이 분 셈이었죠.

출처: Massachusetts Historical Society
당시 사일런스 두굿의 글이 실린 <뉴잉글랜드커런트>

처음에는 인쇄소장의 지인들 중 식견 있는 자들이 글을 실었습니다. 신문이 점점 좋은 평을 듣고 여러 사람에게 팔려나갔습니다. 아이는 자신도 신문에 글을 싣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의 형은 평소 글 쓰기 좋아하는 이 아이를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때문에 아이는 필체를 바꾸고 ‘사일런스 두굿(SILENCE DOGOOD)’이라는 필명을 만듭니다. ‘사일런스 두굿’은 낮에는 견습공으로 일하고 새벽엔 글을 써 인쇄소 문틈에 원고를 넣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인쇄소 직원은 그 글을 보고 감탄하며 꽤 학벌 좋은 사람이 쓴 글이구나 추측했다고 합니다.

용기를 얻은 ‘사일런스 두굿’은 비슷한 방식으로 사회 풍자가 담긴 글 몇 편을 <뉴잉글랜드 커런트>에 기고했습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뉴잉글랜드 커런트>의 사회 비판적인 기조는 시의회의 검열 대상이 되었고 신문은 발행 중단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가로서 ‘사일런스 두굿’은 필라델피아에서 인쇄업자로서 성공했고, 1732년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Poor Richards Almanac)>이라는 책을 통해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피뢰침을 발명하다
자서전에 실린 사일런스 두굿의 실험 상상도

뿐만 아니라 ‘사일런스 두굿’은 과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두굿은 번개도 전기의 일종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1752년 번개가 치는 날 하늘로 연을 올려보냅니다.

출처: InstituteForEnergyResearch
‘연 실험’ 상상도

‘사일런스 두굿’은 연의 끝에 쇠 철사를 매달고 직접 번개를 맞았습니다. 구리 열쇠와 맞닿은 손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을 확인한 ‘사일런스 두굿’은 자서전에 “매우 강한 충격이었지만 나는 아픔보다 기쁨을 훨씬 크게 느꼈다. 이 실험으로 번개가 구름 속에서 생기는 전기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라고 남겼습니다.


비록 성공했지만 ‘사일런스 두굿’의 실험은 실로 위험천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를 따라하려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1753년 물리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리히만은 번개의 전기 세기를 측정하려다 벼락을 맞아 즉사했습니다. 당시 실험을 기록한 <범독일인 전기>라는 책에는 “그의 이마엔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도 불에 그을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의 실험 결과와 리히만의 죽음을 보고 번개속에 담긴 높은 전기에너지를 알게된 ‘사일런스 두굿’은 뾰족한 철막대에 번개를 유도하여 빠르게 땅으로 흘려보내는 피뢰침을 발명합니다.

‘사일런스 두굿’은 사실 미 건국의 아버지
100달러에 실린 벤자민 프랭클린의 얼굴

‘사일런스 두굿’의 일화는 밴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자서전 내용입니다. 100달러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미국인들에게는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라고 불리는 프랭클린에게도 가명을 써야만 했던 과거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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