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서울에 특급 호텔이 들어선 뜻밖의 이유

조회수 2020. 10. 22. 11: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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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0만명의 공룡 도시가 된 서울. 과연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땅집고는 서울 도시계획 역사를 다룬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한울)’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의 공간 구조 형성에 숨겨진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⑩워커힐 호텔은 어떻게 태어났나


올해 개관 57년을 맞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은 서울 광진구의 동쪽 끝 한강을 굽어보는 아차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워커힐 호텔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초기 김종필이 주도해 지었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군사 정권을 이끌던 김종필은 버거 미국대사, 멜로이 유엔군사령관과 자리를 갖는 일이 잦았다. 1961년 7월 하순 김종필이 멜로이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다가 주한미군 위락시설이 화제가 됐다.

[땅집고]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있는 워커힐호텔. /워커힐호텔 제공

멜로이는 “한국에 주한미군을 위한 위락시설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지금 일본에 있는 우리 미군 장병이 1년에 3만 명 정도 위로휴가를 가는데 만약 비상사태가 나면 즉시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한국 내에 미군 위락시설이 있다면 연간 3만 명이 일본에 쓸어넣고 있는 돈을 여기에 쏟아넣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유사시 비상소집을 하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종필은 멜로이의 뜻을 받아들였고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설득해 승낙을 받았다.

[땅집고] 워커힐의 위문공연 '하나비 쇼'. 세계적인 가수와 댄서들이 초청돼 거의 알몸으로 연출했다. /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호텔 이름은 이 곳의 용도를 고려해 지은 것이었다. 호텔의 성격이 외래 관광객과 주한 유엔군 휴가장병 유치시설로 규정된 만큼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외국어로 이름을 짓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각계에 의견을 물었다. 여러 의견 중 최종적으로 ‘워커힐’이라는 이름이 결정됐다.


워커(Walton H. Walker)는 1889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전형적인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1일 후인 1950년 7월 6일 주한 유엔지상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워커는 북진하던 전선시찰차에 타고 있다가 서울에서 의정부로 가던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신축할 대규모 시설을 그의 이름을 따서 ‘워커의 언덕’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그에 대한 추모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땅집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워커힐. /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호텔 객실 이름도 같은 취지로 명명했다. 객실 55개가 더글러스(맥아더)였고, 48개는 머슈즈와 맥스웰이었으며 45개는 레이먼과 제임스였다. 모두가 유엔군사령관 아니면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인물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이 거대한 위락시설 겸 호텔이 주로 미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을 위한 시설이었던 만큼 그들이 숭상하는 인물의 이름을 붙여 친근감을 얻게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1963년 워커힐 호텔이 문을 열었다.



정리= 전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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