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서울대공원은 원래 핵무기 개발하려던 곳"

조회수 2020. 10. 8. 18: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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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00만명의 공룡 도시가 된 서울. 과연 서울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땅집고는 서울 도시계획 역사를 다룬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한울)’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서울의 공간 구조 형성에 숨겨진 스토리를 살펴봤습니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⑤ 서울대공원은 어떻게 탄생했나


1984년 5월 1일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청계산 일대에 서울대공원이 문을 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려면 시내버스를 타고 내려 한참 걸어 동물원에서 운영하는 열차를 타야 했다. 교통이 참으로 열악했다. 그렇다면 서울시 행정구역에도 얼마든지 적합한 장소가 있었을텐데 왜 굳이 과천에 서울대공원을 지었을까. 그 배경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있다.

[땅집고] 국내 최초의 놀이공원 겸 휴식공간인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 /서울대공원 제공

1967년과 1968년 사이 당시 직업군인 김재춘은 청계산 허리 136만 평의 임야를 구입했다. 박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1968년 5월 박 대통령은 안보 문제, 대미(對美) 관계, 국제 상황을 언급하며 핵무기 등 신무기를 연구 발전시켜야겠다며 김재춘에게 1억 원을 주고 비밀리에 과천에 200만 평 토지를 구입하도록 하명했다. 박 대통령은 이 부지를 ‘김재춘이 농장을 확장하기 위해 구입한 것으로 위장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당시 심문택 국방과학연구소장과 미국에서 초청해 온 과학자들이 현지를 둘러본 결과, 신무기 생산단지로 만들기에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해당 부지가 북한군 유효사정거리 이내에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무기 연구 생산 기지는 대전 근처로 옮겨졌다.

[땅집고] 서울대공원이 들어서기 이전 과천면 막계리 일대. /자료=서울도시계획이야기(손정목)

신무기 생산 부지를 대전 근교로 결정하자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김재춘이었다. 우선 거액의 자금을 들여 구입한 임야 136만평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골칫거리였다. 특히 이 부지 주변이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재춘은 명목상 이 땅에 농장 확장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1973~1974년 환율이 오르고 석유 파동이 터지면서 한국경제가 큰 위기를 맞으면서 김재춘이 운영하던 배합사료공업과 축산업도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김재춘의 은행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136만평 임야뿐 아니라 용산구 후암동에 소유하던 주택까지 모두 담보로 제공해야 했다. 김재춘의 은행부채는 매일 이자를 더해 늘어나고 있었으니 박 대통령은 마냥 방관할 수 없게 됐다.


이 시점에서 당시 김종필 총리 등이 생각해 낸 것이 과천 부지에 일본기업이 건설 일체를 책임지는 서울대공원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미국 디즈니랜드와 비슷한 대공원을 건설하면 입장객이 쇄도해 김재춘이 지고 있던 은행 부채 등은 모두 상환하고도 남을 만큼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73년 어느 날 김재춘을 데리고 청계산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이 현지시찰에서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수준도 향상되었으니 이제 국민을 위한 대규모 휴식처가 필요해졌다. 이곳을 서울시민을 위한 대공원으로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원래 신무기 생산단지로 게획했던 곳이 대공원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정리= 전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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