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 상권마저 무너지고 있다

조회수 2020. 9. 27. 06: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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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대학생 때부터 서울 강남에 자주 다녔는데, 대로변에 이렇게 빈 상가가 많은 건 처음봅니다.

지난 3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 인근에서 만난 회사원 이모(49)씨는 대로변 빈 상가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강남 빌딩이 이렇게 텅텅 비는 걸 보니 정말 모두가 먹고 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신논현역 5번 출구 인근 ‘A빌딩’ 1층 상가 유리문에는 빨간색으로 큼지막하게 ‘임대’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2011년 대형 스포츠의류 브랜드 매장이 입점해 약 8년 동안 운영했지만 지난해 말 문을 닫은 이후 반 년 넘게 공실 상태다. 이 빌딩에서 강남대로변을 따라 2분 정도 걸으면 보이는 ‘B빌딩’ 1층도 비었고, 또 다시 2분 거리인 ‘C타워’ 1층도 공실이었다.

강남구와 서초구 경계선 역할을 하는 왕복 10차로 강남대로. 이 중 2호선 강남역에서 9호선 신논현역, 7호선 논현역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대한민국 최고 번화가 중 하나로 꼽힌다. 대로변 빌딩에는 대기업·은행 등 다양한 업무 시설이 있고, 글로벌 의류 브랜드와 대기업 프랜차이즈 카페도 줄줄이 입점해 있다. 워낙 번화한 거리여서 ‘대한민국 최고의 상권’ 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그랬던 강남대로변 상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1~2년 강남 주요 상권은 불황 직격탄을 맞았다. 강남대로를 따라 걷다보면 4~5곳 걸러 한 곳 꼴로 대형빌딩 저층부가 비어있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강남대로 상가 공실률은 2019년 1분기 3.8%에서 올해 2분기 8.5%로 일 년 동안 2배 이상 뛰었다. 빌딩 업계 관계자들은 “체감 공실률은 이보다 높은 10% 중반대”라며 “대개 상가에서 가장 인기 좋은 1층 점포에 ‘임대 문의’ 현수막을 일 년 넘게 걸어두고 있는 건물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 “임대료 감당 못한다”…대기업·은행마저 줄줄이 철수


강남대로 공실률이 치솟는 가장 큰 이유는 경기 침체 장기화로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기업 자체가 줄어든 탓이다. 강남대로 빌딩에는 개인 점포보다 대기업 지점과 단기 팝업스토어 매장이 입점한다.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매장을 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경기 침체 장기화에 올 초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대기업도 두 손을 들고 강남을 떠나기 시작했다.

올 5월 강남대로 빌딩 1층에 입점했던 아모레퍼시픽의 뷰티 편집숍 ‘아리따움 라이브’는 매출 감소에 비용 부담으로 폐점했다. 강남역 근처 현대백화점 ‘VR스테이션’과 ‘유니클로’ 역시 비슷한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은행도 강남에서 철수하고 있다. 전하나 에이트빌딩 팀장은 “강남대로 1층에 입점했던 은행들이 현금자동인출기(ATM) 4~5대만 남겨두고 문을 닫거나, 임대료가 더 저렴한 2층 이상 상층부로 옮겼다”고 했다. 그는 “신제품 광고 등을 위해 대기업이 단기로 내는 ‘안테나 매장’도 기존에는 4개월 정도 계약하는 것이 기본이었는데, 이제는 한두 달 ‘반짝 임대’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로변 건물 상층부나 이면도로 상가 공실률은 더 심각하다. D빌딩 중개법인에 따르면 논현역 7번 출구와 맞붙은 지상 20층 빌딩의 경우 7개층이 ‘즉시 입주 가능’, 1개층이 ‘협의’ 상태로 임대시장에 매물로 나와있다. 논현역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지하 1층~지상 5층 빌딩도 4개층이 공실 상태로 임차인을 찾고 있다.



■ 건물주 “월세 내리면 끝장”…공실 늘어도 임대료 안 내려

공실이 길어지면 건물주가 임대료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강남대로 빌딩은 공실이 나도 월세를 낮추는 건물은 거의 없다. 실제로 한국감정원의 강남대로 상가 3.3㎡(1평)당 임대료 추이를 보면 올해 1분기 33만8580원에서 2분기 33만7920원으로 변동이 거의 없었다. 같은 기간 명동에선 임대료가 2% 하락(97만9110원→95만9310원)한 것과 비교된다.

노창희 리맥스 부사장은 “건물주들은 임대료가 떨어지면 건물 가치도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차인 유치를 위해 임대료 무료(렌트프리) 혜택을 더 주거나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신흥 상권과 달리, 강남대로에는 오래 전부터 건물을 보유해 대출이자 비용 부담이 없는 건물주 비율이 높아 공실 압박을 덜 느끼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권강수 상가의신 대표는 “강남대로같은 핵심 상권마저 비어간다는 것은 내수 침체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이라며 “건물주들이 큰 맘먹고 임대료를 낮추거나 경기가 호전되지 않는 이상 ‘공실 악순환’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글= 이지은 땅집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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