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고백을 강요하는 사회

조회수 2021. 4. 22. 0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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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가난할 뿐이지, 가난함이 나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2019년 출간한 나의 책 『공채형 인간』에 대한 비난 글을 트위터에서 본 적이 있다. 고작 3년 일하고 퇴사한 사람이 회사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책을 쓰며, 세계여행을 간다고 하는 걸 보니 빚 없는 있는 집 자식이 분명하다는 조롱의 트윗이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가, 보면 볼수록 재밌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캡처본을 보내주고 다녔다. 책은 팔리지 않고 있었지만 잠시 셀러브리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반응에 대한 적절한 피드백을 알고 있다. ‘흙수저 고백’이다. 퇴사하고 해외여행을 가거나, 창업을 하거나, 하다못해 유튜브에 명품 하울(haul, 구매 후기)을 올리는 사람들까지 모두 끊임없이 본인의 형편을 축소해 말하지 않던가. 본인의 학자금 상환기, 마이너스 통장, 월세방 평수 고백이 줄줄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그들이 증명한 가난을 들으며 “가난하지만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이 시대의 청년”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부여한다. 듣고 보니 당신은 ‘누릴 자격’이 있으시군요! 라는 의미일 테다.


자격을 부여하는 주체도, 자격을 얻은 대상도, 도대체 그 자격이라는 게 뭔지도 모호하지만 이런 흙수저 고백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고백은 대중의 지탄으로부터 면죄부를 가져다준다. 타당하게 가난을 증명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드러내야지만 발언권을 얻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는 사람이 눈꼴시려 하기 때문이다.

출처: Photo by Jezael Melgoza on Unsplash

다행히 나는 그런 점에서는 증명할 것이 차고 넘치는 가난의 부자다. 가난하지만, 주제넘게 사치했다는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가난하다. 평생 내가 가진 불행과 편견을 적절하게 이용해 값싼 동정표를 얻어 왔기에 이 분야라면 자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기가 싫다. 사람들이 나를 있는 집 자식이라고 판단하고 욕할 때마다 “아니에요. 사실 저 되게 가난해요!”라고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하는 삶은 조금 슬프지 않은가. 무엇보다 우아하지 않다.


퇴사하고 긴 여행을 갔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못 하는 선택이라며 욕한다. 그런데 가난한 자가 해외여행을 가면 세금으로 주제넘게 사치한다고 욕한다. 이렇게 빈자들에 대한 마녀사냥과 흙수저 고백이 반복되는 사이, 부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빈자와 부자가 누려야 할 것이 나뉘어 있다는 시선, 가난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시각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의 기본권을 좁힌다. 둘 다 똑같은 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가 그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준 돈을 밥 먹는 데만 쓰든, 책을 사보든, 여행을 하든, 자기의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규정할지는 그 권리자가 정할 문제라는 말이다.

밥 먹지 않는 곳에 쓰면 ‘어, 먹고살 만한가 보지?’라고 보는 것이야말로 ‘먹는 동물’로서만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태도일 것이다.

- 고병권, 『묵묵』, 돌베게

당연히 돈이 많으면 풍요로운 삶을 살 확률이 높다. 하지만 제한된 형편 안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우아함을 누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우리는 버거운 일상에서 나름 투쟁하며 어떤 것은 포기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각자의 아름다움만은 기필코 쟁취해낸다. 빚이 많아도 일 년씩 해외를 떠돌며 갭이어를 가질 수 있다. 그건 그 사람이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삶의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가난한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가 있다는 편견은 단순히 그의 좁은 식견 때문에 슬픈 것만은 아니다. “있는 집 자식이나 세계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사고는 본인의 삶도 그런 방식으로 좁게 만든다는 점에서 슬프다.

출처: Photo by Suhyeon Choi on Unsplash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삶의 사례를 특수한 개천용 사례로 간주하지 말고, 나도 저럴 수 있겠다는 용기를 주는 케이스 스터디의 하나로 여기는 게 좋지 않을까? 가난의 랭킹을 매기지 않고도, 대부분의 사람이 원할 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수준의 최저임금이 보장하는 사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나의 가난을 내가 원할 때 말하고 싶다. 욕먹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가난하다는 사실을 구구절절하게 증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학자금을 간신히 갚고, 모은 돈도 없이 무모하게 여행을 떠났지만 이런 흙수저 고백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퇴사하고 갭이어를 가진 사람”이란 꼬리표를 얻는 것은 더더욱 싫다.


나는 어쩌다 가난할 뿐이지 가난함이 나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우아하게 가난하고 싶다.

출처: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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