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명함의 무게

조회수 2021. 4. 13. 14: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사회생활 짬이 쌓일수록 절절히 느껴지는 '명함'의 무게

서점에 가면 책 왼쪽 날개를 들춰 작가 소개부터 확인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에 낯선 이름이 뜨면 인물 검색부터 해본다. 인터넷 백과사전의 인물 항목은 연계성까지 더해져 내겐 헤어 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이다.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연신 클릭하다 보면 시간이 살살 녹는다.


이렇게 난 누군가의 프로필을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기에 적힌 몇 줄로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헤아려 본다. 호떡 뒤집히듯 인생이 휙 하니 반전을 맞은 사람. 달걀말이처럼 인생이란 뜨거운 팬 위에서 구르고 굴러 두툼한 살집을 불린 사람. 


수타 피자 반죽처럼 쉴 새 없이 여기저기 떠돌며 발을 넓힌 사람 등등 세상 그 어디에도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은 이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복제된 인생을 산 이는 없다.


언젠가 이제는 고인이 된 대기업 회장의 명함을 본 적 있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 브랜드가 된 대기업의 총수. 그의 명함에는 입체감 있게 박힌 회사 로고와 검은색 영문 사인으로 된 이름, 그리고 직함인 Chairman. 딱 세 가지만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클래스가 다른 명함. 그 흔한 전화번호도, 주소도, 이메일도 없었다. 이름 석 자만으로 모든 게 설명 가능한 사람이기에 탄생할 수 있는 명함이었다.

그 유명한 故 이건희 회장의 명함

(나는 만들어 본 적 없지만) 딱히 소속이 없는 프리랜서들은 보통 개인 명함을 만든다. 내가 일하는 직종의 경우, 섭외가 잦은 프로젝트를 할 때는 해당 회사의 이름이 들어간 명함을 회사에서 지급받는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해, 내 이름이 적힌 명함을 받았을 때는 그저 신났다. 나라는 사람을 완연한 사회인이라고 인정한다는 도장이 찍힌 기분이었다. 그때까지도 명함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가로 90mm, 세로 50mm. 고작 손바닥 반만 종이가 그리 무거울 줄 상상도 못 했다.


사회생활 짬이 쌓일수록 ‘명함’의 무게를 절실히 느낀다. 명함이 가진 힘을 체감한다. 명함은 단순히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 같은 단순한 정보만 제공하는 건 아니다. 낯선 이와 처음 만날 때, 인사를 하며 명함을 주고받는다. 짧은 시간 명함을 빠르게 스캔해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한다.


어떤 조직에 속한 사람인가? 조직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자와 인연을 맺으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등등 다각도로 판단해 미소의 양과 질을 결정한다. 


직위나 직업에 따라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상대를 대할 때 동태 같은 딱딱한 자세가 필요한지, 곰치처럼 물렁한 자세가 필요한지 텐션 조절을 한다.


선거철이 되면 산책로에 후보자들 혹은 캠프 관계자들이 인사를 하며 명함을 뿌린다. 받아보면 대부분 깨알 같은 글씨로 학력부터 공약까지 빽빽하게 적혀 있다. 그 명함 한 장으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고, 이 지역의 머슴이 되기를 자처하며 자신을 어필한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수법인데?

허풍을 떨며 투자금을 유치하라던 사기꾼이 그랬고, 각종 보석 이름을 들먹이던 다단계꾼들이 그랬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 하기 위해 달콤한 말을 흘리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이 그랬다. 분명 대박 날 거라고 큰소리만 지르던 내실은 없는 텅 빈 사람들. 그들의 공통점은 빽빽한 명함이었다.

출처: Brando Makes Branding on Unsplash
이 한 장이 어떻게 그렇게 무거울까

얼마 전, 브런치 작가 소개란을 고쳐 썼다. 이곳의 작가 소개란은 일종의 명함이다. 기존 프로필을 쓸 때 하고 싶은 100만 가지였지만 줄이고 줄여 썼다. 그런데 다시 보니 간결하게 쓴 그 몇 줄조차 구차해 보였다. TMI 가득한 명함을 건네는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정작 나는 그러지 못했다. 오래 고민하다 마음에 드는 단어를 찾았다.

산책자

난 매일 산책하는 사람이다. 산책을 즐기다 못해 중독됐다. 그럴 수만 있다면 산책하듯 슬렁슬렁 살고 싶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나를 경주마처럼 살라고 채찍질한다. 그러니 더더욱 산책자, 산책하는 사람처럼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그 단어를 써넣었다.


낯선 사람에게 나라는 사람을 알려야 할 때 단어를 덕지덕지 붙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단어 몇 개 혹은 단순한 문장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긴 할까?


이름 석 자. 이것만으로 누구든 나라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는 날을 기다린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쓴다. 부지런히 쓴다. 꾸준히 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