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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학문, 현대인의 공부: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조회수 2020. 12. 29. 09: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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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를 하는 현대인

공부가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우아아아아앙

어쩌다 과외 수업을 맡게 된 적이 있다. 맡게 된 학생은 한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의 고등학교 3학년 따님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느지막이 귀가하는 학생이었으니, 오후 10시가 지나 시작해서 자정을 넘겨야 끝이 나곤 했다.


수업을 시작할 때면 거실에서는 여지없이 TV 소리가 났다. 공부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 고3과의 수업을 마치고 방문을 나서면, 불 켜진 거실의 TV 소리를 자장가 삼아 소파에서 잠든 교감 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교육자 집안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구나. 자녀가 공부를 하는 사이 조용히 책을 읽거나 함께 공부하며 조용히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정은 도덕책 삽화에서나 가능할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하길 바라 마지않는다. 그러나 함께 공부하는 것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고도 자녀 교육을 이유로 저녁에까지 원치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휴대폰 게임 몇 개 돌리고 드라마 하나만 몰아 보아도 시간은 훅. 밤을 새워 놀 거리가 널린 요즘 세상이다.


그래서일까, 학교에서 공부, 학원에서 공부, 집에 돌아와서도 잠을 줄여가며 자기 주도 학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아래 과제와 공부를 해야 하는(해야 한다고 했지 실제로 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퇴근 후에 잔뜩 늘어져 잉여로운 생활을 즐기는 어른들이 부럽다.


어른들도 가끔 공부를 한다. 꼭 필요한 순간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마지못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자조 섞인 한마디로 다음 세대들에게 훈계를 전한다.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두뇌 회전이 둔해져서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니, 한참 할 수 있을 때 공부하렴.”

이런 말들로.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세대에서 세대를 따라 내려오는 잔소리 레퍼토리로는 기가 막힌다. 지금으로부터 사천여 년 전, 고대 수메르의 점토판에도 쓰여 있었단다. “요즘 젊은 놈들 하는 짓을 보면 말세야, 말세” 말세는 그렇게 영속(永續)하고 있다.

도대체 왜 학교를 안 가고 빈둥거리고 있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느냐? 너의 선생님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항상 인사를 드려라.

왜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지 않고 밖을 배회하느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너라.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땔감을 잘라오게 하였느냐?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쟁기질을 하게 하고 나를 부양하라고 하였느냐? 도대체 왜 글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자식이 아비의 직업을 물려받는 것은 엔키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운명이다. 글을 열심히 배워야 서기관의 직업을 물려받을 수 있다. 모름지기 모든 기예 중 최고의 기예는 글을 아는 것이다. 글을 알아야만 지식을 받고 지식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너의 형을 본받고 너의 동생을 본받아라.

– 수메르의 점토판 중에서

공부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를 하는

역설 가운데 살고 있다. 지금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꾹 참았다가 대학 가서 원 없이 놀라고 한다. 공부를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야 고생 덜하면서도 돈 많이 버는 일자리를 갖게 된다고도 한다. 


대학 가도 공부를 해야 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도 좋은 일자리 얻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현실에 대해서는 최대한 입에 올리지 않아야 오늘 하루 공부하기 싫어 몸을 비틀어내는 아이를 설득해낼 수 있다. 아, 이 공부라는 것, 누가 만들어서 이다지도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가.


시작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인간에게 공부는 가진 자의 특권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러하였으니 신기한 일이다. 고대는 자유민과 노예로 구분되는 사회였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생산의 축은 노예였다. 노예만이 경제적 생산을 위한 노동을 담당하였다. 노예는 그 주인의 몫까지 일했다. 노예를 보유한 자유민은 생존을 위한 노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이었다.


오늘날 생계를 위해서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 시간으로 채워야 하는 현대인들과도 다른 지점이다. 우리의 24시간의 최소 1/3 정도, 8시간가량이 노동에 할애된다. e-나라지표에는 2018년(가장 최신 자료다) 남녀 취업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을 41.5시간으로 적고 있다. 주말을 제외하면 하루 8시간 정도 생산 활동으로 시간을 소모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취침 시간, 노동을 위한 이동 시간 등을 제외하면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은 얼마나 남게 될까? 이에 대한 통계 지표도 존재한다. 2018년 문체부 자료를 보면, 한국인은 평균적으로 평일 3.3시간, 휴일 5.3시간 가량의 여가 시간을 갖는다. 이는 하루 24시간 중 평일의 경우 13.75%, 주말의 22.08% 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대의 자유민들은 어쩌면 현대인보다 사정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처럼 다양한 놀거리를 누리지는 못했겠지만,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스스로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오롯이 얻어낸 자유의 시간을, 그들은 무얼 하며 보냈을까?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이 지점에서 공부가 등장한다.


요새는 대학교 신입생들이 왜 그렇게 공부를 하려 드냐는 선배들의 핀잔 아닌 핀잔을 들으며 대학교를 다녔다. 대학 문화가 변해가던 시기였다. [‘먹고 대학생’ 운운하며 캠퍼스 내에서 적당히 수업이나 듣고 음풍농월하던 대학생활은 이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 일이다.] 하는 문장으로 시작해 입학과 동시에 공부에 뛰어드는 [무서운 1학년] 따위를 운운하는 기사가 있었다. 작성 연도를 보니 2003년의 것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의 대학교는 더욱 격렬한 경쟁으로 가득할지도 모르겠다.


되돌아보면 나는 비교적 열심히 공부하던 대학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가장 여유 있던 시기를 꼽아 보라면 역시 대학 시절이었다. 평소에는 밤늦게까지 영화 보고 게임하느라 정신없었고, 늦잠을 위해 수업은 죄다 오후로 잡았으며, 세 달 남짓 이어지는 긴긴 방학이 되면 이게 사람 몰골인가 싶을 정도로 폐인처럼 지내보기도 했다.


그렇게 원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나면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허무, 허무뿐이었다. 풀어지고 노는 것에도 한계가 있구나, 이 좋은 것이 지겨워질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이어졌다. 지금에 비해 자극적인 놀거리가 훨씬 부족했을 고대인들도 필경 그러했을 것이다.


무작정 놀기도 어려웠으므로, 그들은 남는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새로운 방식의 여가를 찾아 나섰는데, 그것은 세상을 향한 관조(觀照)의 행위였다. 관조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적한 카페에 앉아, 통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군상들을 망연히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리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해 질 녘 해변에 앉아 다가오는 파도를 말없이 바라보면 어느덧 사위가 껌껌해져 있음을 본 적이 있는가? 관조란 이와 같은 것이었다.


가만히 세상을 관조하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 나는 무엇인가?
  •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 인간이 형성한 사회는, 국가는 대체 무엇인가?
  • 인간의 사회는 향후에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 우리를 둘러싼 자연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것들은 변화하는가? 변화한다면, 왜 이러한 변화가 찾아오는가? 이를 이끄는 어떠한 섭리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인격적인 대상으로 치환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학문이 발달하였다. 철학이었다. 철학이라 함은 어떠한 범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그 자체이자 모든 것이었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인문학이라 불렀다. 인간의 존재를, 언어를, 그가 걸어온 과거의 발자취를 연구해 나갔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그 존재를 증명해내는 동물이었다. 따라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에 대한 탐구도,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속성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고대의 자연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이었다.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 학당』 공부하러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귀족 계급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그리고 이 공부는 오직 자유민만을 위한 것이었다. 자유민은 이를 통해 지식을 갖추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짐을 경험해냈다. 지평이 열리고, 지경이 넓어졌다. 인문학을 나타내는 이름 Liberal Arts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첫째, 이는 자유민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의미였고, 둘째, 이에 대한 탐구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현대인들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공부를 한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서. 수단으로써의 공부는 고대 노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범주다. 능률적인 경제적 생산 활동을 가능케 만드는 기술을 획득하는 것. 오늘 우리들은, 또 어린아이들은 돈을 벌기 위한 기술을 배우고자, 그만한 자격을 얻고자 밤잠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유민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의 예속상이라는 측면에서 실제로는 노예와 하등 다름이 없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노예의 속성이 우리의 본질이다. 그렇다. 먹고살기 위해 우리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선택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잊지는 말자. 공부는 본래 자유민의 것임을, 공부가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음을. 강제로 해야만 하는 공부라도, 노예의 일을 위해 억지로 해야만 하는 공부라도, 그것의 본질은 자유의 진리를 담고 있다. 외우고, 시험 보고, 원하는 성적과 지위를 얻고 잊어버리는 공부라면 그것은 노예의 것이다. 하지만 노예의 공부를 하면서도,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인간의 사회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인생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사고를 풍요롭게 한다. 당신의 공부가 앎에 대한 즐거움을 누리는 과정이기를! 유레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원문: 한겨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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