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희생만으로 '완벽한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

조회수 2020. 11. 9. 18: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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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안과 걱정이 엄마의 것으로만 남을 수는 없다

얼마 전 그런 신문 기사를 봤다. 아이를 키우다가 너무 힘들어서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문화센터 수업을 가야 한다며 도와주지 않는 친정엄마에게 서운함을 느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기사의 말미에는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로 끝을 맺었지만, 댓글에는 ‘자기 아이는 자기가 키워라’ ‘못 키울 거면 낳지 마라’는 의견이 가득했다. 


그러면 이 기사의 주인공인 아이 엄마는 다시는 친정엄마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걸까? 아무리 힘들어도 본인이 낳은 아이니 감내하는 것만이 답인 걸까?


솔직히 나는 너무 가혹하다고 본다. 아이는 분명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육아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 잘 알 것이다.


 자기 아이니까 자기가 키우라고? 대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무리 없이 거뜬하게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모두가 ‘완벽한 독박 육아’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키우느라 이미 수년 동안 고생한 친정엄마가 다시 손주 보육으로 고생하는 것도 속상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던가.

남편이 깨닫게 된 이유

남편은 첫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왜 이 조그마한 아이를 어른 한 명이 보지 못하냐”고 말하던 남자였다. 수학 공식처럼 1:1 보육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내가 복직할 때까지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저 기사의 댓글 같던 남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특히 복직을 준비해야 하는 나로서는 산후조리 기간이 힘들기만 했다. 안 그래도 아이 밤중 수유로 만성피로에 시달리는데, 거기다 예기치 않은 분유 갈이를 시작했다. 분유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온갖 고생을 다 하는 아이를 보더니 남편도 ‘우리의 힘만으로는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이 말은 부모님의 도움만을 뜻하지 않는다. 수많은 육아 정보와, 나라에서 제공하는 보육 시스템과, 주변 아이 엄마·아빠들과의 연대 등 모든 것을 포함해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

예전부터 내려오던 말이다. 그 말처럼 우리는 “육아는 우리끼리 충분해”라 외치던 폐쇄 정책을 내려놓고 개방 정책을 도입했다. 모르는 건 책을 읽고 육아맘 카페에 가입해서 묻고 근처의 친정 부모님과 함께 공동 육아체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매일 운동 겸 사이클을 타고 우리 집에 오셔서 하루 몇 시간 아이를 돌봐주시게 되었고, 나는 그동안 복직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동네의 가정 어린이집을 활용하게 되었다. 


아이가 너무 어린 것도 맞고, 아이는 엄마 품에서 자라는 게 제일 좋은 것도 맞다. 하지만 아이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과정은 엄마가 아닌 모든 가족의 일이다. 그렇다면 가족 모두가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 아이를 마을이 키워내듯 공동체가 함께 키우는 데 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는 시스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지적처럼, 나 하나 복직하자고 친정엄마가 하루종일 독박육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젊은 나도 힘들다. 


우리는 몇 주에 걸쳐 동네의 어린이집 리스트를 정리하고 방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설도 살피고, 아이가 어린 경우에는 어떻게 보육하시는지 이야기도 들었다. 그중 가장 믿음이 가는 어린이집에 매일 한 시간씩만 아이를 부탁드렸다. 첫째 주에는 1시간, 둘째 주에는 1시간 30분, 셋째 주에는 2시간 이렇게 천천히 늘려나갔다.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맡기는 입장의 아이 엄마도 아이와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훈련할 수 있었고, 보육해 주시는 어린이집 입장에서도 아이가 적응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에서는 아기 침대도 구입하고 방 시설도 변경하면서 아기를 위한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


‘독박육아’를 하는 엄마들이 얻게 되는 짐이란

십여 군데가 넘는 어린이집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는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에 대해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말도 좀 하고 표현도 할 줄 알고 몸도 자기 뜻대로 가눌 줄 알아야 보육시설에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꽤 긴 시간을 독박육아를 하며 견뎌낸다.

기억할 것이다. 2017년 9월 주말부부를 하던 주부가 우울증으로 인해 아이들을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을 기도했던 사건 말이다. 범행 동기로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게 힘들었고, 주말에만 집에 오는 남편도 아이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고 이야기했다. 이외에도 생후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충동적으로 친자식을 살해한다든지, 아이를 안고 8층에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사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우울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우울증은 주변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때 더욱 발전한다. 비극적인 사태로 이어지기 전에 해결되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엄마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우울증을 자각하거나 병원을 찾아가 건전하게 해결하고 도움을 받기보다는 ‘내가 엄마인데 이래도 되나?’라고 자책하거나 ‘엄마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힘들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되는 순간 트랜스포머 변신하듯 책임감을 장착하고, 육아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한다. 도움을 구하는 엄마는 부족한 엄마고, 자신의 아이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여자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보건소에서 검사한 산후우울증 고위험 판정 산모는 총 5,810명이다. 하지만 정신건강센터 상담까지 이어진 경우는 절반에도 못 미치는 2,623명 뿐이다. 2016년에도 고위험 판정 산모 4,801명 중 51%인 2,494명만 정신건강센터에 상담을 의뢰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렇게 산후우울증이 제대로 치료되지 못한 상태로 독박육아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안타까운 사례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 불안과 걱정이 엄마의 것으로만 남을 수는 없다

엄마 혼자는 힘들고, 보육 시설에 맡기기는 불안하다. 그래서 1차적으로 생각하는 게 조부모 육아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황혼 육아”할마”할빠’라는 신종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이것도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분명 손주를 보는 기쁨도 크지만, 황혼 육아를 통한 스트레스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육아정책 연구소가 2015년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를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의 주당 평균 양육시간은 42.53시간으로 법정근로시간 40시간보다도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15년 보고서를 보면 조부모가 손주를 돌볼 때 체력적으로 힘들고 (59.4%) 교우관계나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 (41%) 이 크다고 이야기했다.


일본에서는 손주를 돌보며 생기는 우울증을 ‘손주블루’라는 신조어로 부른다고 한다. 흔히 손주를 돌본 뒤 조부모들이 부쩍 늙는 것 같다고 토로하는데, 이는 의학적으로도 그럴듯한 말이다. 어린아이를 안고 씻기다 보면 척추후만증(등이 솟고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는 척추 변형)이 오기도 하고, 노인성 골다공증으로 척추를 압박하게도 된다.


물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요즘 뉴스를 보면 완벽한 대안은 될 수 없다. 꽤 큰 비용이 드는 육아도우미 또한 마찬가지다. 완벽한 대안이라는 것은 없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그냥 인정해버리자는 거다. 

나는 일하면서 육아를 하는 엄마이다 보니, 아이를 좀 더 밀착해서 돌볼 수 없었다. 내가 청한 모든 도움 중에는 조부모의 희생도 있었고, 어린이집도 있었다. 나의 부모님 또한 아이와 시간을 보냈고, 보육에서 교육의 단계로 넘어갈 때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없듯이, 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이는 자기 또래보다 꽤 일찍 어린이집을 다녀야 했다. 아이 아빠는 점심시간에 유치원 전화를 받고 달려오는 일도 경험해야 했다. 좋은 가사도우미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나 면접을 보면서 가족이 아닌 누군가도 가족처럼 받아들이는 경험도 했으나, 동네 부녀회나 엄마 카페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게 내 욕심 때문인가, 싶던 때도 있었다. 나 때문에 아이가 느린 건 아닌가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아이는 성장하며 스스로 나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었지만, 나의 불안과 걱정은 아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불안과 걱정은 엄마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아이와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공동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잘 해결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하면 또 어떤가. 실패 덕분에 새로운 길이 보일 수도 있다. 엄마가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벽한 성장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는 엄마의 계획으로 크는 것이 아니기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말이지만,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마인드이다. 나도, 아이도, 가족도 힘들 수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실패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함께 고민하고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도 쉽게 희생하지 말라. 누구도.


원문: 석혜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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