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동 부지에 대하여: 때로는 '빽도'가 신의 한 수다

조회수 2020. 12. 24. 16: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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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평이 넘는 송현동 부지를 5,000억 원이나 들여서 공원화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출처: YTN

대한항공과 서울시 간 송현동 부지 건을 보다 보면 1980년대 조성된 경희궁공원이 생각난다. 


아재분들이야 친숙하겠지만 현재 신문로에 위치한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은 과거 서울고등학교 자리였다. 이는 경기고, 휘문고 등 많은 도심부 중고등학교 교외 이전 정책이 일어났던 1970년대 발생한 일인데, 1978년 현대건설은 2만 9,841평의 해당 부지를 110억 원에 매입하게 된다.


당초 대규모 사옥을 지으려던 현대건설은 반대 여론이 심해 이를 실현하지 못했는데, 이때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시민을 위한 공원화’였다. 다만 법치국가에서 현대건설에 이 땅을 강제로 뺏을 권리는 없고, 감정 가격 책정 등으로 시간이 흐르다가 결국 1985년에 이르러 서울시는 해당 부지를 정말 공원화하겠다고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서울시는 해당 부지를 구입할 재정적 능력이 없었다. 당시 해당 부지의 감정 가격은 498억 원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등가교환이었다. 지금이야 84제곱미터 한 채에 14억 원에 이르는 구축 현대 아파트들이 즐비한 강변역 인근은, 당시만 해도 10년가량 쓰레기를 비롯한 잡다한 물질로 매립해 지반을 다지던 곳이었다. 1980년 개통된 지하철 2호선 강변역은 그때까지 무인 정거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10년 정도 후에 후세 사람들은 과천지식정보타운역을 보고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다.


여튼 현대건설은 돈도 없는 서울시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 강변역 주변 5만 621평을 서울고 부지와 맞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이 등가교환은 실제로 이루어졌고, 이 시점이 1986년이었다. 이것이 강변부터 광나루까지 그렇게 현대아파트가 많은 이유다.


등가교환이라 현대건설은 양도소득세도 취득세도 내지 않았다고. 다른 말로 하자면 서울시는 1978년 110억 원 주고 현대건설에 옛 서울고 부지를 팔고 고작 6년 만에 500억 원 수준으로 다시 사 왔다는 말이다. 6년간 세수 낭비 390억 원을 한 것이다. 1978년 예산이 4,600억 원 수준이니 대략 10% 날아갔다.

출처: 동아DB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무슨 등가교환이냐 싶겠지만, 재정이 풍부하지 않던 과거에는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기성 줄 돈 없던 지자체들이 틈만 나면 일을 시킨 건설업체에게 하던 말들이 그런 것들이었다. 저기 저 터미널 부지로 퉁 치면 안 될까?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말이다.


현재 해당 부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이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물들의 가치가 과연 서울시 연간 예산의 10%를 투입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었나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판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5,000억 원 상당의 송현동 부지, 나는 과연 1만 평이 조금 넘는 이 부지를 5,000억 원이나 들여서 공원화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 서울시 재정 중에 5,000억 원이라는 프리 캐시가 있다면 차라리 한강의 다리를 두어 개 더 지어 강남북의 교통격차를 줄이든지, 지중 BRT 같은 것을 만들어 도심 간·광역도시 간 간선/광역버스망을 구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건설 비용까지 하자면 6,000–7,000억 원을 들여 만들 송현동 공원에 어느 시민이 대단한 효용을 느낄 수 있을까. 가만히 대한항공과 제삼자 간의 계약을 지켜만 봐도 취득세, 지방교육세, 농어촌특별세가 아마도 230억 원이나 하늘에서 뚝 떨어질 텐데, 굳이 없는 살림에 수천억 원을 들여 공원 부지를 매입할 필요가 있을까.


부디 시정도 좀 실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봤으면 한다. 지금 서울을 구성하는 인프라의 대부분은 박정희 정권 시절 3대 관선 시장인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으로부터 만들어졌다. 강변북로, 여의도, 남산터널, 지하철 1–4호선, 강남 개발 등.

출처: 위키백과

물론 당시 그 양반들이 뭐 꼭 국민을 위해서 했겠냐만은, 그래도 그 시절 그런 인프라를 안 만들어 놨으면 아마도 지금쯤 서울은 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한강종합개발이나 강남개발과 같이 뭐 매머드급 개발을 원하는 건 아니다만, 그래도 1만 평짜리 부지매입에 수천억 원을 쓰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싶다.


요즘 손정목 교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읽다 보면 1970년대 펼쳐진 서울 도심부 중고등학교 교외 이전은 꽤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아닌가 싶더라. 아무리 유신 시절이라 할지라도 이게 버튼 하나 누르면 되던 일은 아니었다.


상기 서울고 부지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언제나 돈이 걸린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현대건설도 중앙정부와 서울시에서 강제로 권유해서 샀다고 한다. 1970년대 대학진학률은 20%대에 불과했고, 당시 서울고나 경기고 부지는 현재 대학부지처럼 넓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서울 도심에 있는 대학을 수도권으로 이전해보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지 않나 싶다. 


따지고 보면 미국도 아이비리그가 뉴욕이나 워싱턴DC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영국도 옥스브릿지가 런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 SKY를 비롯한 서울 도심의 대학들이 서울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 고밀도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건 강제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다양한 인센티브 부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영종도나 시화 같은 곳에 대학타운을 만드는 것도 좋아 보인다. 새만금이라는 기회의 땅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좀 너무 멀기도 하고.


이전된 대학부지를 건설사들이 매입해 아파트 단지로 만든다면 그 매입과정에서 발생한 세금, 아파트 매매 시 발생한 세금, 그리고 기부채납 등으로 조성할 수 있는 재원 등을 통해 청년임대아파트 및 공공임대아파트도 더 많이 만들 것이고 말이다. 그 많은 대학생이 서울에서 빠져나간다면 교통의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본다. 


세종시로 정부를 옮겨도 서울은 여전히 국제도시이듯, 대학들 위치를 옮긴다고 서울의 경쟁력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여튼 이렇게 조금 더 과감한 정책을 통해 서울을 살기 좋고 지속 가능한 도시로 만들었으면 하는데, 여전히 수천억 원을 들여 도심지 1만 평 땅을 공원화할 생각을 하는 분들은 도통 어떤 분들인지 궁금하다. 이제 그 아이디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분도 안 계시건만 굳이 계속해서 밀어붙일 필요 있을까. 


부디 이런 어정쩡한 주제에서 대립각 세우지 말고, 빽도라는 신의 한 수를 택하는 지혜를 보이는 서울시가 되었으면 한다.


  • 서울고 부지 관련 숫자는 모두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권(손정목, 2003)을 참조했다.
  • 어느 동네 아재의 잡상이므로 과도한 의미 부여하지 말 것. 서울시 안에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똑똑한 늘공들 많으니, 필요하면 그분들 붙잡고 물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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