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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넷플릭스의 〈빨간 머리 앤〉이 가진 따스한 시선과 뚜렷한 한계

넷플릭스의 앤은 다르다. "여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당대의 페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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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with an Equality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의 영어 원제는 <Anne with an E>다. 영어 원제(<anne of the greengable>)와 다른 제목을 사용했다. 나는 이 제목을 지금까지 대중문화에서 묘사된 앤과 차별점을 두겠다는 선언으로 읽고 싶다.


실제로 넷플릭스의 앤은 달랐다. 수줍어하지 않고 특별함을 드러내는 소녀라는 점에서 ‘비호감’이었고 “여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주장하는 당대의 페미니스트였으며 동성애자, 흑인, 캐나다 원주민을 존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Anne with an E>의 ‘E’가 ‘Equality'(평등)를 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앤이 비호감인 이유

사회는 ‘여성 상위시대’라는 표현을 들며 성차별의 완화를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더 정교해진 성차별이 여전히 굳건하게 작동하고 있다.


남자아이가 잘하는 걸 뽐내는 것은 ‘장군감’이라며 긍정하지만, 여자아이가 그런다면 ‘나대는 것’이라며 비하한다. 남성 청소년이 음담패설을 하면 ‘남자애들이니까 으레 그럴 말한 일’이지만, 청소녀의 음담패설은 용납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청소녀가 편견으로 점철된 ‘고아’라면 어떠할까? 앤은 ‘고아’와 ‘청소녀’라는 이중의 타자성 때문에 있는 그대로 수용받지 못하고 철저히 비호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학교에 온 첫날, 앤은 자신이 잘하는 시낭송을 열정적으로 보여주지만 또래 문화와 다르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산다. 자신이 아는 성(姓) 지식을 말하자, 천박하다며 모두가 기피하는 왕따가 되고 만다. 남자아이들이 앤을 고아라며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이미 일상일 정도다.

열정적으로 시를 낭독하는 앤. 이 일로 친구들의 비웃음을 산다.

어느 학교에나 이런 소녀가 있었을 것이다. 남다르다는 이유로 또래문화에서 ‘이상하다’ 놀림받아야 했던 소녀. 아마도 그 소녀들은 또래문화에 스며들기 위해 자기 자신을 지우거나 또래 집단에서 존재를 배제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앤의 ‘남다름’을 ‘이상함’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운, 앤이 지닌 특성 중 하나로 그릴 뿐이다.


드라마는 앤의 맥락을 꾸준히 드러내며 우리가 앤을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등교 첫날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시 낭송을 열심히 했던 앤, 하지만 조롱과 비난만 듣자 시무룩해져 집에 돌아온 앤, 결국에는 학교에 가기 싫어 버둥거리는 앤 등. 이 장치들은 나조차도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성장기 시절의 나를 긍정하도록 만들어 준다.


모두에게 앤과 같은 시절이 있지 않겠는가? 또래 문화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상하다’라고 조롱받았기에 아팠던 시절, 나조차도 ‘남다른’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시절. 


이 점에서 드라마 <빨간 머리 앤>은 교실에서 당당한 여성이었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던 여성 아웃사이더들에게 큰 위로와 공감이 될 터이다.


페미니즘 텍스트로서의 <빨간 머리 앤>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은 페미니즘 텍스트로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시즌2의 섬세한 연출은 차별받는 사람이 아닌 차별하는 사람들에 주목하여 현재에도 유효한 페미니즘 담론을 담아낸다.


마을 사람들은 새로 부임한 여성 교사 스테이시에게 과도한 관심과 편견을 갖는다. 스테이시는 ①결혼하지 않은 여성이자 ②바지를 즐겨 입고 ③코르셋을 입지 않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수군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전거를 타지 않게 된 스테이시는 학교까지 걸어서 출근하던 중, 한 마을 남성의 호의로 함께 마차를 탄다. 그러나 그조차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남성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고 만다.


스테이시의 전임 남성 교사는 자신이 맡은 학생과 연애하다 결혼 직전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반면, 여성 교사인 스테이시는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비혼, 코르셋을 하지 않고 바지를 즐겨 입음, 자전거를 타는 것, 학문에 대한 열정)로, 여성이라는 이유(성적 위협)로 쉽게 낙인 찍히고 편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바지 입고 자전거 타는 여성, 스테이시

드라마는 이러한 차별을 문제화하기 위해 차별하는 사람들(가해자)에 주목하여 연출하였다. 차별을 가시화하는 콘텐츠가 흔히 하는 실수는, 차별받는 사람들(피해자)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차별에 공감해야 하는 이유로서 차별받는 사람들(피해자)이 고통받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피해자를 수동적이고 무해하며 연약한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주목했다. 그래서 여성 교사 스테이시를 실수도 잘하고 강직한, 즉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차별하는 사람들(가해자)에게 주목함으로써 그 누구도 대상화하지 않고 차별하는 행위 그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고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대한 백인 여성’ 앤의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간 머리 앤>은 백인 중심적인 페미니즘 텍스트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인종 다양성을 다루는 방식으로서, 유색인종에 대해 시혜적인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앤은 흑인인 서배스찬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캐나다 원주민의 문화에 포용적이며 원주민 카퀫과 친구가 된다. 즉 백인인 앤의 관점에서 흑인 서베스찬과 캐나다 원주민 카퀫은 친절과 관용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는 존중이 아닌 친절과 관용의 대상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친절은 존중이 아닌 시혜라는 점에서 타자화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시혜적인 친절의 이면에는 다음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백인인 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유색인종)을 차별할 수 있지만 관대한 나는 관용을 베풀어주겠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에 나오는 유색인종들은 유독 유순하다. 원주민 소녀 카퀫이 원주민 동화 교육 정책에 따라 정부에 납치당하자, 원주민 부모는 앤에게 수동적으로 도움을 청한다. 


결국 백인들과 함께 간 덕에(!) 원주민 부모는 정부 관계자와 만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거절당하고 만다. 그러자 그들은 조용히 근처에서 야영을 하며 기다린다. 이 정도는 유순해야 백인이 관대하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다는 걸까?


드라마 <빨간 머리 앤>의 결말에 이르러 앤은 퀸즈 대학에 입학하지만, 카퀫이 구출당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원주민 소녀 카퀫과 백인 앤

인종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드라마의 가장 문제적인 태도는, 차별에 항의하는 존재로 유색인종이 아닌 백인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카퀫이 정부에 납치당하자 원주민 부모는 백인인 앤에게 수동적으로 도움을 청하고, 드라마는 기꺼이 도우려는 앤과 매슈를 강조한다.


이 서사에서 능동적으로 차별과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존재는 당사자 원주민이 아닌 백인이다. 마찬가지로 흑인 서베스찬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 탑승을 거절당하자 백인 길버트가 더 강하게 항의한다.


1960년대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을 주제로 한 <HELP>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차별을 문제시한 사람은 흑인 여성들이 아니라 엘리트 출신의 젊은 백인 여성이다. 영국은 대서양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는데, 이 중 흑인은 2명인 반면 백인은 4명이었다. 


별에 대항했던 유색인종보다 이들을 시혜적으로 ‘도와주는’ 백인을 강조하는 기억은 <빨간 머리 앤>에서조차 반복되었다.

영국 노예제 철폐 200주년 기념우표

백인에게 인종문제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관대한 친절이라는 ‘시혜’가 아닐 것이다. 백인으로서 자신이 가진 특권과 인종적 기득권을 인지하고 깊게 생각한 뒤, 그를 바탕으로 유색인종이 겪는 차별에 공감하는 연대하는 ‘성찰’이 필요하다.


<빨간 머리 앤>은 인종차별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법으로서 백인에게 ‘친절과 관용’을 주문하고, 이와 연결하여 유순하게 도움을 부탁하는 유색인종을 전시한다. 


이것은 오히려 현대적인 인종차별일 뿐이다.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유순한 타자로 영원히 남는 존재는 여전히 유색인종이기 때문이다.


마무리하며

<빨간 머리 앤>은 젠더 문제에 있어서는 가해자에 주목함으로써 피해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차별 행위 자체를 문제시했다. 


그러나 인종 문제에 있어서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수동적으로 대상화하고 오히려 인종차별의 가해자였던 백인을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서 서술했다. 이 점은 <빨간 머리 앤>이 가진 ‘백인 페미니즘’의 분명한 한계로 남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비호감 소녀에 대한 <빨간 머리 앤>의 따스한 시선을 한계로만 정의하기 어렵다. 그 소녀는 성장하여 자신처럼 교실에게 소외당하는 친구와 연대한다. 성추행당한 반 친구를 두둔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여성의 성장 서사’를 지나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장면들이 지난 후, 나조차 나를 사랑할 수 없던 시절을 포용한 건 앤이었고 나였고, 그리고 당신일지도 모르겠다.


원문: 레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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