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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청년 우파”: 청년 의사들의 분노를 이해하는 법

밥그릇 투쟁이지만, 그들에게는 '정의롭고 숭고한' 밥그릇 투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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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 ‘최대집’ 조차도 파업 직전에는 정부와 타협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를 걷어차고 지금까지 투쟁을 주도해 나가는 것은 젊은 전공의와 의대생들이다. 파업 참여율에서도 의대생>전공의>전임의>개업의 순으로, 연령이 낮으면 낮을수록 조직율이 높게 나타난다. 지금 이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건 젊은 의사와 의대생들이다.


‘주 80시간 노동하는 전공의의 열악한 노동환경’이라던가, ‘비인기과의 낮은 수가’ 같은 이슈는 쉽게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구호임에도 투쟁의 전면에서 한참 밀려나 있다. 오히려 전면에 도드라지는 구호는 공공의대 만들면 현대판 음서제가 된다던가, 정부가 북한에 의사 퍼주려고, 혹은 전라도에 의대 하나 만들어 ‘특혜’ 주려고 일을 벌인다는 쉽게 논박 가능한 가짜뉴스 수준의 프로파간다뿐이다. 


그러나 젊은 의사들은 진지하게 이런 주장들을 생산하고, 또 퍼나르고 있다.

일련의 이슈들은 이미 지상파 뉴스에 의해 해명된 바 있다.

뭔가 이상하다. 젊은이들이 파업에 나섰다길래,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순 궤변뿐이다. 정부의 정책은 모두 실패한다고 가정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만 골라 왜곡하여 투쟁의 당위성으로 끌어다 삼는다. 이런 질 낮은 논리에 여론이 등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차가운 여론 속에서도 이 젊은이들은 뭔가 악에 받힌 사람처럼 억울하다는 듯 궤변을 반복한다.


“한해 이과 수험생 중 공부 잘하는 순서대로 뽑은 3,000명의 수준이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의사’라는 안정적 일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평생을 고통받으며 경쟁해왔고, 결국 승리했는데, 그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가만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결국 밥그릇 투쟁이 맞지만, 한 가지 더 있다. 한 세대를 구분 짓는 ‘이데올로기의 전면화’이자 ‘청년 인텔리 우파’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청년 우파’ 이데올로기의 등장

‘이데올로기의 전면화’이며 ‘청년 인텔리 우파’이라고? 단순한 밥그릇 싸움에 대한 지나친 확대해석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기존 표창원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리버럴과 좌파들은 사회 부적응자들이 일베의 사상에 물들며 청년 우파가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일베와 청년 우파를 다룬 많은 사회과학적 연구에서, ‘일베’를 구성하는 인구학적·생애사적 특징을 찾으려는 시도[1]는 대부분 실패했다. 오히려 연구 결과가 보여주는 건, 사회에 누구보다 잘 적응한 청년도 극우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본 수많은 청년 우파들 상당수는 학창 시절에 부모와 교사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더 많은 파이 획득을 위한 무한 경쟁 체제를 ‘삶의 순리’나 ‘게임의 규칙’으로 받아들인 이들이다. 이들이 이 게임에서 승리했든 패배했든, 경쟁을 삶의 순리이자 게임의 룰로 받아들인 이상 이 룰을 위협하려 하는 이들은 모두 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게임의 규칙’을 위협하는가, 바로 ‘평등’이니 ‘균형’이니 ‘진보’니 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들이 우파적 구호를 반복하는지 이해되는가?

수능 몇 달 전 정신 차리고 바짝 공부해서 서울대 붙는 시대는 90년대에 끝났다. 과거 엘리트와 현재의 엘리트는 마인드셋 자체가 다르다. 지금 의대생과 전공의를 이루는 세대들은(80년대 이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노력과 인내, 그리고 이 고통의 끝에는 밝은 미래가 있을 거라는 자기암시를 통해 그 자리 위에 올라선 이들이다.


70만 명이 일렬로 등수 매겨지는 수능에서 이과 상위 3000명에 든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렇게 간 의대에서도 공부와 경쟁은 끝이 없다. 그러나 이는 고통스럽지만 견딜 수 있다. 이들에게 시험과 경쟁은 당연한 삶의 순리거나, 게임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한 경쟁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느라 시간 낭비 한 적이 없다.


‘시민단체 추천 전형'(가짜뉴스[2]다)이라든가 ‘지역 균형[3] 담론’이 논의되며 자신들보다 시험을 못 본 자에게도 밥그릇을 나눠주겠다는 정부의 시도는 자신들이 이 위치에 올라오기까지의 노력, 더 나아가 세계관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적어도 이들에게 ‘평등’이니 ‘균형’을 이야기하는 ‘진보세력’이란 냉소가 아니라 ‘뜨거운 분노’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극우 유튜버나 할 법한 가짜뉴스에 동조하는 우파가 되어 대중성 없는 투쟁을 의심없이 해나가는 것이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의사·의대생이 아닌 평범한 청년들은 시험공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냉소[4]하지만, 이들은 환자의 목숨을 쥐고 있는 ‘의사·의대생’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실력행사를 하는 것이다. 

저들이 억울해하며 울부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의사정원 증가 반대 투쟁은 기본적으로 밥그릇 투쟁이지만 ‘노력에 따른 대가’라는 ‘삶의 순리’ 혹은 ‘게임의 규칙’을 지키기 위한 숭고하고 정의로운 밥그릇 투쟁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주 80~100시간 노동은 참아도 ‘의사 정원 10% 증원’이나 ‘전라도 특혜 공공의대’는 불공정이라며 못 참는다. 


평생을 경쟁 속에서 살아왔고, 결국 승리한 이 젊은이들을 ‘이기주의’라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들이밀며 비난하는 건 별 소용이 없다. 그들은 연 3000명 정원 제한이 주는 안정된 소득을 누리기 위해 나름 ‘정당하게’ 경쟁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의대에 진학한 사람이다. 


등수가 떨어질까 매일 초조해하며 끝없는 시험공부에 자신을 갈아 넣는 것이 정상적 삶의 모습이라고 가르친 건 그들의 부모와 학교, 그리고 교수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좁고 고립된 사회를 의심 없이 순종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이 의사/의대생들임을 기억하라.


청년들은 ‘시험’이라는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당했기에 분노한다

사실 이런 ‘인텔리 청년 우파’적 징후는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점거 투쟁 때부터 보였다. 이대생들은 한국사에 기록될 역사적 투쟁을 통해 자신이 취득할 ‘이대 졸업장의 가치’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대생들의 분노의 핵심에는, 자신들이 이 졸업장을 얻기 위해 갈아 넣은 청춘의 가치를 희석시키지 말아 달라는 외침이 있었다.


더 최근에는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에 반대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분노의 청원이 있기도 했다. 이 모든 분노의 핵심에는 ‘시험’이 있다. 젊은이들의 이런 모습을 “요즘 젊은이들은 이기적이다” 혹은 ‘엘리트주의’라고 단순화하긴 어렵다. 이 ‘현상’ 혹은 ‘이데올로기’는 좀 더 생애사적 맥락에서 구성된다.


‘생애사적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은 ‘자본주의고 공산주의고 아무것도 몰랐을 시골 청년’이 전쟁통에 국군에 징집되어 반공 전사가 되어 전역하게 되는 것과 닮아있다. 지금 이 젊은 의사들의 학창 시절은 전투와도 같은 ‘시험’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비슷했을 것이고, 의사/의대생이라는 지위는 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무공훈장과 같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의 울분과 비이성을 이해해야만, 현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이 청년의사들의 분노는 무공훈장을 단 한국전쟁 참전 용사에게 “반공 이데올로기는 정부가 만들어낸 지배 담론이고, 할아버지는 이용당한 거예요”라고 말했을 때 할아버지의 분노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청년의사들의 궤변에서 보듯, 이 분노는 논리로 설명되는 게 아니다.

의사들도 알고 보면 가난하고 불쌍해서 저렇게 투쟁한다느니 하는 일각의 나이브한 관점은 제발 집어치웠으면 좋겠다. 그들을 연민해달라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 반대다.


‘경쟁’과 ‘시험’이 이 불안하고 유동하는 세상의 유일한 ‘정의(justice)’이며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던 젊은이들의 분노에서 보듯) 이 젊은이들은 사회 진보의 가장 중요한 시점에 언제고 튀어나와 자신의 얄팍한 세계관과 정체성을 건 반대 투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젊은이들은 경쟁과 시험에 희생된 자신의 젊음을 보상받고, 또 자신의 희생이 옳았음을 인정받기 위해 우파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회가 가진 자원을 ‘시험’이라는 잣대를 통해 차등 분배하는 제도가 공정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제도가 그 사회에 언제나 이롭거나 효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5]. 대한민국에서 시험 제일 잘 치는 사람들이라는 의사/의대생들의 한심한 수준을 보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젊고 진보적인 사람이라면, 2020년의 젊은 의사/의대생들이 보여준 저 비이성과 분노에 익숙해져야만 할 것이다. 당신은 앞으로 평생 저런 또래 우파들과 싸워야만 할 테니까.


어쩌면 이게 우리 세대의 시대정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때 ‘반공’이 그랬던 것처럼.


각주

[1] ‘남성’과 ‘경상도’ 라는 약간의 편향이 관측되기는 한다.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시사인 천관율 기자의 분석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2] 시민단체가 학생을 뽑는다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입시방법/기준을 정할때 교수들끼리만 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밖 외부 인사를 참여시키겠다는 문구를 확대해석하여 비튼 것이다. 이 문구는 오히려 ‘조국사태'(조국은 교수였지 않은가)를 막기위한 방편라고 보는게 맞다.


[3] 공공의대 설립을 반대하는 홍보물에서 ‘지역특혜’라는 문구가 자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4] 김민하의 『냉소사회』 라는 책이 이 지점을 잘 분석했다.


[5] 필자가 기획했던 ‘2012년 수능 생중계’ 사건은 이를 조롱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는데 언론에 의해 의도와 다르게 소비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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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by. 한민성
    사회학을 전공한 IT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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