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코로나 대응과 갑자기 나타난 사회적 신뢰

조회수 2020. 5. 4. 17: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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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다른 K-사회자본
한국의 코로나 대응이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한 이유 중 하나, 특히 시민들의 성숙한 대응에 대한 설명으로 등장하는 게 ‘사회적 신뢰’. 대표적인 게 코로나 사태에서 사회적 신뢰를 직접 조사했던 한국리서치 결과다. 코로나 사태는 한국이 신뢰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까지 얘기한다.
출처: 한국일보

그런데 한국은 사회자본과 신뢰가 부족해서 문제인 사회라고 지금까지 마구 비판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상호신뢰는 바닥을 긴다는 연합뉴스. 최하위 사회적 자본으로 선진국 못 된다는 동아사설. 다른 예도 차고 넘친다. 한국경제, 한겨레 블로그 등등.


없던 사회적 자본과 신뢰가 코로나 사태 속에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당혹스러워하는 사회학자들. 이 블로그에 가끔 소개하는 최성수 교수도 페이스북에서 이 당혹감을 어떻게 설명할지 포스팅했다. 논리가 매우 재미나니, 읽어볼 수 있는 분들은 일독을 권한다.


없던 사회적 신뢰가 코로나 사태 와중에 갑자기 생겨나서, 다들 사회자본 숨은그림찾기 중이다. 이 숨은그림찾기의 가장 간단한… 하지만 설득력은 의문인 설명이 ‘이게 다 문재인 덕분'(이문덕)이다.


코로나 사태 속에 사회적 신뢰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나는 콜만, 후쿠야마 등 타국에서 검증된 사회자본 이론이 옳다고 믿고 한국에서 감춰진 사회자본을 찾는 연역적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자본과 신뢰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기획이 틀렸다는 증거로 삼고, 다른 설명의 기획을 찾아보는 것이다.


잘 이해를 못 해서일 개연성이 크지만, 나는 원래 사회 자본의 설명력에 좀 회의적이다. 사회자본으로 한국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그리 전망이 밝다고 보지 않았다. 앞의 두 개 기획 중 후자가 더 전망이 밝다고 본다.


사회학, 특히 교육사회학에서 사회자본으로 교육격차를 설명했던 학자가 콜먼이다. 콜먼의 주장은 학교 효과보다는 가족, 친구 등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 ‘자본’이 학업 성취도를 결정한다는 것. 콜먼이 교육 성취에 사회자본을 끌어들인 이유는, 일천하지만 내가 이해하기로는, 미국은 공부를 강조하는 문화가 일부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출처: YTN

한국은 공부하는 문화가 일부 이웃이나 가족이 아니라 국민 국가(nation-state) 레벨에서 형성되어 있다. 공부 안 하는 (주로 하위) 계층에게 공부의 사회적 자본을 불어 넣어주는 게 과제가 아니라, 다들 공부에 너무 미쳐있어서 좀 완화하려고 노력하는 사회다. 미국과 완전히 다르다.


즉, 한국은 적어도 교육에 관해서는 사회자본을 끌어들여서 계층 격차를 설명할 필요가 없이 동질적 문화가 지배적이다.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면 낮은 사회적 자본과 이웃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도 동질적 문화의 공동체가 유지되는 이유가 같이 설명되어야 한다. 동질성이 한국 사회에 대한 설명의 전제가 아니라 설명의 대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 동질성을 잘 설명하지 못하니까 툭 하면 나오는 게 유교(confucianism). 이번 사태에서 외국 언론이 한국의 성공 이유로 유교문화를 들고나오니 다들 그거 아니라고 하는데, 그럼 한국 사회 시민들이 정부의 지침을 다른 사회와 달리 매우 잘 따르는 이유는 뭔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정부가 준비를 잘했다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온 설명이 한국은 시민저항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했고, 박근혜를 탄핵하는 등, 정부에게 양질의 행정 서비스를 주문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자본 이론에 따르면 신뢰가 낮고 사회자본이 낮으면 시민적 관여(civic engagement)가 떨어진다. 뭔가 설명이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건 뭐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간섭의 문화’.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에서 통쾌하게 풍자한,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 ‘오지랖 문화’가 실은 한국사회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제하는, 신뢰는 빠지고 규범의 사회화와 제재(sanction)의 기능이 큰, 뭔가 다른 K-사회자본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


사회적 표준(norm)을 강제하고 간섭하는 전 국민이 탑재한,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오지랖 문화가 한국 사회에서 교육, 가족 형성, 기타 행위 양식의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는 긍정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이런 문화적 동질성을 긍정적이라고 믿는다면).

출처: 동아일보

한국과 달리 미국 사회는 이러한 간섭의 문화가 없다. 이웃, 동료, 친구는 물론, 가족 간에도 없다. 간섭을 안 하고,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게 기본 규범이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의사도 환자에게 의학적 선택을 간섭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국은 가족 형성, 교육 투자 측면에서 상당한 동질성을 유지한다. 계층에 따른 규범과 문화의 분화가 약하다. 다른 사회가 겪는 많은 문제를 피하면서 사회적 동질성을 유지한다. 대다수 한국인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비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사회학자분들에게 미국의 사례에 천착해 한국 인구 현상의 계층적 분화에 주목하기보다는, 인구 현상의 동질성을 먼저 설명해야 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좀 더 썰을 풀자면 동일한 규범을 강요하는 ‘간섭의 문화’는 가족, 친구, 이웃, 동료 등 모든 사회적 접촉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고는 피해갈 수 없다. 따라서 분절된 문화 형성을 위한 별도의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지 않다.


간섭은 문화적 동질성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스트레스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회적 관계의 형성은 간섭을 동반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 기형성된 관계 외의 사회적 관계 형성은 꺼리게 되는, 즉 혈연, 지연, 학연 등 검증된 네트워크 외부의 이웃과 관계 맺기를 기피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신뢰와 사회자본이 낮다고 나오는 조사가 이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번 코로나 사태의 성숙한 대응도 간섭의 문화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문덕으로 정부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도에 변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는 신뢰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책 수단의 효과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 따르거나 무시할 수밖에 없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안 하면 들어오는 온갖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간섭을 견딜 수 없고, 그 사이에 자신도 그 규범을 내재화해 간섭을 실천하는 주체가 된다.


원문: S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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