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퇴사를 말리는 부모님 설득하는 법

조회수 2020. 4. 8. 15:3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일단 한번 대화해 보자, 부모님을 믿고

코로나 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만큼 부모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20~30대 직장인들의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나도 어디 가서 퇴사를 했다고 말하면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느냐”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10대도 아니고 30대 중반인데,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하는 나의 마음이 곤혹스럽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실제로 퇴사와 부모님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는 부모의 기대와 지원을 많이 받고 자란 세대다. 헬리콥터 맘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밀레니얼 세대가 학창 시절을 보낸 시기였다. 헬리콥터 맘은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회생활을 하게 되어도 자녀 주위를 맴돌며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서는 엄마들을 말한다. 


자녀의 거의 모든 것에 관여한다. 밀레니얼 세대 중 많은 이들이 이처럼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탓에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 퇴사를 결정하는 데 있어 부모님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닌 것 같은…

물론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해라”, “취업해라” 소리 한 번 안 듣고 ‘방임형’으로 길러진 친구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친구들도 퇴사를 앞두고서는 부모님을 떠올린다. 우리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유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인 경우가 많다. 


스스로의 성취를 위해서인 경우도 있지만, 부모의 기대를 벗어나는 일에 대한 내면의 두려움이 있다. 부모는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효녀, 효자에 대한 강박이 생긴 탓이다.


본래 10대의 사춘기는 부모님의 관계를 포함해 인생의 다양한 고민들에 대한 답을 내리는 시기이다. 하지만 ‘대입’이라는 획일화된 목표 때문에 사춘기를 앓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떻게 보면 사춘기는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첫 기회이기도 한데 말이다.


두 번째 대화의 기회는 20대 초반에 찾아온다. ‘대2병’이라고도 불리는 제2의 사춘기가 바로 그것이다. 진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날들이 지속된다. 다른 사람의 스펙과 나의 스펙을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도 ‘취업’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서 내 목소리는 묵살되고 ‘취업하고 나서 생각하자’며 자신을 달랜다.


그러다 어렵게 취업을 한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이건 아니다’ 싶은 상황에 맞닥뜨린다. 직장생활 3년 차, 나이로는 대략 30대 초반이다. 취업만 하면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중2병’ 때, ‘대2병’ 때 해결하지 못했던 고민들이 밀물처럼 들어온다.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게 되고, 내 꿈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이는 퇴사 고민으로 이어진다. 당연한 수순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그 고민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대체적으로 40대에 접어드는 시점에 한 번 더 사춘기가 오는 것 같다. 대학을 나와 회사에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은 후에 ‘삶은 무엇인가?’ 하며 현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한번 대화해 보자, 부모님을 믿고

현재 나이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한 번 챙기고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사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닌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자기 자신과 충분히 대화를 해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의 대화 또한 필요하다. 만약 퇴사까지 마음먹고 있다면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런데 부모님께 넌지시 퇴사 이야기를 꺼냈다가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부모님들이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게 이유는 자식을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회사가 좋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부모님들은 그저 자식이 행복하길 바라신다. 그래서 눈앞에서 자식이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어떤 일을 하면 성공하고, 어떤 일을 하면 실패하는지 부모 역시 알 수 없다. 단지, 취업 준비의 어려움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섣불리 퇴사에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부모님이 퇴사를 반대할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갈등을 회피하려는 심리는 알겠지만, 그러다 보면 내 안에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샘솟는다. 실제로 부모님은 자녀의 상황이나 마음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자녀 입장에서는 부모님을 막연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 내 말을 안 들어줄 것 같고, 말이 안 통할 것 같고, 내가 상처만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부모님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공연히 먼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막상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렇게 크게 반대하시진 않았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한 번의 대화로는 어렵고, 꾸준한 소통이 필요하다.


부모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진로에 대해 좀 더 확고히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모님일 수 있다.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구체화시킬 기회도 된다는 것이다. 최상의 시나리오다. 이런 대화를 통해 부모님의 찬성과 지지를 이끌어낸다면 더할 나위 없다. 가장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셈이다.


설사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 없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결론이 ‘퇴사 반대’로 끝난다고 할지라도 내가 정한 대로 밀고 나가면 된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누군가에게 인증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설사 부모님이어도 말이다.


두렵더라도, 주체적으로 살아갈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답다

물론 퇴사를 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사람은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사회가 ‘정상성’이라고 설정해놓은 궤도에서 이탈한 셈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나 구성원들에게 그 사회에서 ‘정상성’이라고 규정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이것이 사회를 유지시켜나가는 작동 원리다. 한국 사회에서는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하고, 적령기라고 불리는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 낳는 것을 ‘정상’이라고 보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이 정상성은 ‘평범함’과도 잇닿아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대기업에 가야 사람 구실 하며 살 수 있다”
“결혼 적령기를 놓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
“둘째는 언제 낳을 것이냐”
“평범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이렇게 ‘정상성’에 대한 기준이 확고하다. 머릿속으로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실제 이러한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일례로, 결혼을 안 한 사람에게 차별과 배제의 원리가 강하게 작동되던 시기가 있었다. ‘노처녀’ ‘노총각’ 딱지를 붙이고 무언가 모자란 사람 취급을 했다. 중년 남성은 낮 시간에 배회하는 것만으로 ‘백수’ 취급을 받는다. 여성이 살림을 하는 것은 ‘정상’이지만, 남성이 살림을 하는 것은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취준생은 또 어떤가. 취업을 해야지만 사람대접을 해준다. 정상성의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특성, 취향, 개성은 쉽게 무시된다.


정상성의 궤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부모님을 보수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정상성, 즉 평범함에 대한 가치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해 보면 사회가 엄청나게 변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사회의 진보는 정상성에 조금씩 균열이 나면서 시작된다.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 어떤 남성이 자신의 꿈을 찾아 퇴사 결정을 한다고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반발에 부딪힐 것이다. 1970년생이 비혼을 선언한 것과 1990년생이 비혼을 선언한 것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윗세대에서는 자녀가 없는 부부를 안쓰러운 시선(사실은 폭력적인 시선)으로 보겠지만, 지금은 ‘딩크족’이라며 부러워한다. 이처럼 정상성의 이데올로기는 균열이 나게 돼 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준과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정답인 이유다. ‘정상성’이라고 설정된 궤도에서 이탈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원문: 슈뢰딩거의 나옹이의 브런치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