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올)바름’은 우리 인간이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어떤 것이다. 사람들이 바름을 추구하는 까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름이 그르다거나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바름에 대한 관점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바름을 추구하면 할수록 바름의 차이 때문에 다툼이 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바른 마음』에서 다루는 문제가 이것이다. 부제가 이를 잘 표현한다.
우리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에티켓 상의 통념과 달리 정치와 종교를 가지고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누라.
도덕심리학의 3가지 원칙이 근거다.
- 첫째, 직관(코끼리)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코끼리 위에 탄 기수)은 그다음이다.
- 둘째, 도덕성은 단순히 피해와 공평성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 셋째, 도덕은 사람들은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이 3가지 원칙은 전체 12장에 걸쳐 이어지는 제1–3부의 세부 주제를 이룬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도덕성의 원천은 어디일까.
인간의 마음은 동물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인식하는 모든 것에 끊임없이 직관적으로 반응하며, 또 그 반응을 기반으로 응답을 내보낸다. 무엇을 처음 보고, 처음 듣고, 다른 이를 처음 만나는 그 1초 동안 코끼리는 벌써부터 몸을 어느 한쪽으로 틀기 시작하고, 이는 나의 사고와 곧 이어질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 125쪽
바른 마음은 하나가 아니다. 도덕성은 그 내용이 너무나 풍성하고 복잡하며, 다층적이고 내적으로 모순도 있다. 그래서 하이트는 도덕성을 합리적인 이성에 기반하여 연역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무론자(칸트)나 공리주의자(벤담)가 아니라 미각이나 감성 차원에 있는 것으로 분류하는 감성주의자(흄)을 따른다.
이들의 대비는, 자폐증 연구의 일환으로 사람들의 성향이나 인지 양식의 두 차원을 ‘공감 능력’과 ‘체계화 능력’으로 나누어 살핀 사이먼 베런코언에 따른 것이다. 이에 의하면 공리주의자 벤담의 철학은 고도의 체계화를 보여주는데, 그는 공감 능력이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
벤담은 주변 사람들을 한여름 날리는 파리떼만큼도 여기지 않는다.
의무론자 칸트 역시 플라톤처럼 변치 않는 선(善)의 형상을 찾아 그것을 영원불변한 도덕률로 세우는 데 평생을 매진했다. 그 역시 높은 체계화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공감 능력은 높지 않았다.
하이트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강하게 논박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의 합리적인 도덕률만 있다고 여기는 도덕 일신론자들, 정의 이분법주의자들이다. 나와 당신의 도덕이 그들을 악덕으로 똘똘 뭉친 파렴치한으로 몰아세울 때 그들 역시 고개를 저으며 우리를 악덕에 찌든 사람으로 낙인찍을 것임을 기억하라. 그래서 700쪽에 가까운 거작의 결론은 너무나 상식적이지만, 도덕성에 관한 한 조급하고 성마른 우리가 따르기 쉽지 않은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도덕은 사람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도덕이 우리를 뭉치게 한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편을 갈라 싸우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편이 나뉘면 우리는 매 싸움에 이 세상의 운명이라도 걸린 듯이 서로 이를 악물고 싸운다. 도덕이 우리를 눈멀게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각 편에는 저마다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이야기 중에는 뭔가 귀담아들을 것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554쪽
원문: 정은균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