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얉은 지식 0』, 고대 사상과 떠나는 명쾌한 사유 여행

조회수 2020. 9. 16. 14: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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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 책은 일종의 '프리퀄'이다.

왜 ‘3’이 아니라 ‘0’인가

반가운 그 이름 『지대넓얕』이 돌아왔다. 5년의 공백기를 뚫고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 마침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부제가 좀 특이하다. ‘지대넓얕’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니 당연히 ‘3’이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책을 보면 3권이 아니라 제로(0)다. 어찌 된 영문일까. 이 책은 일종의 ‘프리퀄’인 것일까?

정말로 0이다. 왜 그럴까?
업그레이드가 어느 정도를 벗어나면 제로의 영역에 도달 (아님)

숫자 ‘0’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를 의미하는 동시에 시작점을 나타낸다. 이 책 역시 숫자 ‘0’이 지닌 이와 같은 양가적인 의미를 책의 구성 속에 고스란히 체현하고 있다. 무슨 뜻일까. 찬찬히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이 책은 우주의 탄생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대략 138억 년 전이다. 감도 오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게 먼, 엄청난 스케일의 과거다.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우리에겐 138년이란 시간도 일생을 초과하는 엄청난 시간인데 하물며 138억 년이라니. 그런데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138억 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거기에는 ‘0’이 있었다. 태초의 시간, 그러니까 빅뱅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간은 무(無)의 상태로서의 ‘0’으로 존재했으며 그 ‘0’으로부터 우주가 생성되었고 지구가 생성되었고 생명체가 나타났고 인류가 진화했고 마침내 삶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0’은 무(無)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점이다.


이 책이 『지대넓얕』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면서도 ‘0’을 표방하고 있는 건 그래서일 테다. 이 책은 인류, 아니 우주가 시작되기 직전의 순간, 그러니까 ‘0’의 상태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우주의 무(無)에서부터 긴 지혜의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은 인류의 고민을 우주의 시작이라는 엄청난 시공간 속에서 파악해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책을 펼쳐 든 사람이라면 상당한 정도의 아득함과 무상함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인식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는 다차원의 우주, 지금도 끝없이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작은 구성 부분인 태양계, 그 태양계 안에서도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지구 등등… 하지만 그 점에 불과한 지구조차 무려 46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100년의 시간을 머물다 가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어떤 문제와 씨름해왔으며 어떤 사유의 체계들을 발전시켜왔는가.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물음을 진지하게 마주하게 만든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 이 작은 점 안의 작디작은 우리는 어떻게 살다 가야 하는 걸까? 이 책은 이 고민을 전달한다.

거대 사상과 함께 하는 지혜의 여행

이 책이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이른바 고대의 거대 사상들이다. 하지만 책은 곧바로 고대의 거대 사상들을 조명하지 않고 시간 이전의 시간, 그러니까 빅뱅이 일어나 우주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사유가 도달한 시간의 극단”에 스스로 서 볼 것을 제안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은이 채사장은 고대의 사상들을 자아의 존재 속에서 우주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로 규정함으로써 우주에 대한 근원적 사유가 자아 및 세계에 대한 인간적 탐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책의 서두에 소개된 현대 물리학의 각종 우주론은 이후 펼쳐질 고대 사상의 우주적 문제의식의 시공간적 배경이 되어 준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이 전제하는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넓을지언정 얕지는 않다. 무려 우주의 시작 이전까지 파고 들어가니 말이다.

이후 책은 빅뱅과 지구의 탄생을 거쳐 현생 인류의 진화 과정을 추적한다. 하나하나가 논쟁적이고 상당한 이해의 수준을 요구하는 토픽들이지만 채사장 특유의 명쾌하고 핵심을 찌르는 설명이 독자들의 이해를 충분하게 돕는다. 인류의 등장과 문명의 출현을 거쳐 비로소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대 사상들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나타난다. 


여기서 채사장이 주목하는 것은 이른바 새롭게 등장한 문명 속에서 자아와 세계의 문제를 고민했던 ‘인류의 스승들’의 행적과 사유이다. 카렌 암스트롱의 유명 저서 『축의 시대』를 주된 참조점으로 해서 서술되는 이후의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대의 사유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부딪치는 각종 문제들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역력하게 보여준다.


베다에서부터 시작해 중국의 노자와 공자를 거쳐 불교를 관통하여 예수와 기독교까지 아우르는 지적 여정은 그 자체로 무척 흥미진진하다. 특히 개별 사유와 그 사유를 펼쳤던 인물들의 개인적인 행적과 시대적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함으로써 그것들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책의 커다란 장점이다.


이 책은 고대의 거대 사상을 다루고 있지만 철학뿐만 아니라 문명의 역사를 다룬 역사책인 동시에 한 인물의 간략한 전기이기도 하다. 가령 노자의 경우를 보면 노자 개인의 역사와 도덕경이라는 책의 구성 및 내용, 그리고 노자가 살았던 당시 중국의 시대 상황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서술되면서 시대와 인물, 사상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이 빛을 발한다.

춘추시대의 철학자 ‘노자’. 도가의 창시자로 전해진다.

일원론을 위하여

물론 고대 사상가들의 사유를 정리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거나 중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개별 사상가와 사유에 대한 입문서나 학술서가 이미 충분하게 나와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중요한 건 그 사유들을 한데 꿰는 저자만의 관점이다. 채사장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일원론을 핵심어로 하여 고대의 사유들을 재조명한다. 그러니 책의 핵심적인 관건은 그 고대의 사유들을 한 축에 꿰는 ‘일원론’이 지닌 새로운 사유로의 가치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일원론이란 무엇일까? 책에 따르면 그것은 전혀 달라 보였던 두 존재, 그러니까 자아와 세계가 그 근원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유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철학을 살피면서 서구에서 이원론의 출발에 이데아론을 위시한 플라톤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플라톤 이후 서구 철학은 모두 이와 같은 이원론에 입각해 전개되었다고 말한다.

‘이데아론’은 플라톤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간략하게 말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본질’을 뜻한다.

하지만 비서구의 고대 사상에서는 이와 같은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적 세계관이 주축을 이루었다. 베다의 가르침과 불교, 힌두교 등의 종교는 물론이고 노자의 가르침도 그렇다. 하지만 동양의 일원론적 사유는 서구 근대가 보편화되면서 낡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되었다. 


채사장은 현대 물리학의 발전이 서구에서도 다시 일원론의 관점을 회복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며 앞으로 사유의 발전은 이원론의 분열을 극복한 일원론의 관점을 더욱 참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잃어버린 일원론의 세계를 다시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이원론의 세계관이 우리로 하여금 갖은 마음의 지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관련해 채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눈앞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도, 그래서 마음이나 정신은 소홀히 하고 눈앞의 물질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세계와 자아를 독립된 실체로 느끼며 자신이 소멸한 이후에도 세계가 존속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그러니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도, 나의 내면은 보이지 않으니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자아와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갖게 된 사유의 흔적들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아와 세계의 통합성을 강조하는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이행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개인의 가치와 능력에 대한 더욱 견실한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지대넓얕』 제로는 이 점에 있어 상당히 강력하고 선명한 입장을 택하고 있다. 물론 그 입장에 동의하는지 여부는 책을 읽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이후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어떤 색안경의 존재를 의식하게 될 거라는 점이다. 그 색안경은 책의 도입부에 말한 ‘판단 중지’를 통해 발견되는 것이며 동시에 서구화된 근대를 통과해 온 우리의 사유에 덧씌어진 어떤 인식의 틀에 가깝다. 


채사장이 플라톤 이후의 이원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색안경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현실과 본질, 자아와 세계의 이분법을 넘어 그 둘이 근원적인 지점에서 하나라는 사실은 자아와 사회에 대한 새로운 통합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저자의 말처럼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소외 속에 고통받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한 이원론적 분리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에는 그와 같은 이원론적 사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잊혀졌지만 까마득한 고대에는 그 둘을 총체적으로 연결 지어 사유하려는 지혜의 모험이 가득 차 있었다.


『지대넓얕』 제로가 우리에게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그 잊힌 사유의 모험을 재발견하는 데 있다. 138억 년의 시간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담대한 스케일과 지구 문명을 따라 분산되어 전개된 개별적인 철학적 사유를 일원론과 이원론이라는 기준으로 재편성하여 서술하는 저자 채사장의 솜씨는 왜 『지대넓얕』 시리즈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5년 간 시리즈의 새로운 책을 기다려왔을 독자들과 사유의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 모두에게 반가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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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기사는 웨일북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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