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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스 101' 이후, 아이돌은 어디로 가야 할까

조회수 2019. 12. 16. 17: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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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프듀가 망한 지금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프로듀스 101’ 이전의 세상

지금이야 자주 못 하지만, 2014년도까지만 해도 방송 3사의 음악방송을 거의 매주 챙겨봤다. 그래서 현재 인기 그룹들의 신인 시절을 거의 다 기억한다. 당시 가장 인상 깊던 그룹은 (순식간에 슈퍼스타가 된 당시의 엑소를 제외하면) ‘다칠 준비가 돼 있어’와 ‘hyde’를 연속으로 선보였던 빅스였다.
정말 정말로 과격한 콘셉트였는데… 무대를 보면 신기하게 납득이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까지 콘셉추얼한 그룹은 잘 없다. 비주얼은 지금 기준으로도 많이 화려한 편이고, 안무도 워낙 과격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스꽝스러워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빅스는 발군의 퍼포먼스 실력을 가진 그룹이라 그 함정을 모조리 피해갈 수 있었다.


또 한 그룹의 이름을 외웠다. 마침 운이 좋아 한 아이돌 그룹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후보로 같이 꼽았던 기억이 난다(인터뷰 자체는 여러 사정 탓에 불발되긴 했지만). 그때 내가 골랐던 그룹이 블락비와 빅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방탄소년단이다. 당시의 방탄소년단은 ‘No more dream’과 ‘N.O.’ 정도만 발매했지만, 나 같은 헤비 케이팝 유저는 꽤 눈길을 찍어둔 그룹이었다.

어떤 요소가 ‘뜰 만한’ 그룹을 결정지을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는 음악이 좋아야 한다. 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음악이 좋은 것만으로는 초특급으로 뜨는 게 어렵다. 그래서 이 요소가 더 중요하다. ‘생동감’이다.


사실 이 단어는 설명하기가 무척 애매하다. ‘기세’ 같은 단어나 ‘쎄하다’와 비슷할 정도로 관념적인 단어라 어떻게 정의해야 잘 이해될지 모르겠지만, 대강 설명하자면 무대 끝까지 눈을 잡아두게 만들고 끝난 후에는 다음에 한 번 더 챙겨보고 싶게 만드는 기운이라고 보면 된다. 브라운관 너머 시청자까지 기운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으로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 재미있는 무대 구성력(좋은 안무가 필요)
  • 좋은 노래(음악 듣는 귀가 좋은 프로듀서 필요)
  • 다른 그룹과 차별화된 기획,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뚜렷한 콘셉트(감이 좋은 프로듀서 필요)
  • 같은 동작이라도 생명력 넘치게 표현하는 멤버(많은 연습량 필요)
  • 잘 관리된 외모(타고난 요건과 근성 필요)

앞서 말한 ‘생동감’은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나오는 기운에 가깝다. 이 5가지를 다 갖춘 노래는 거의 히트한다. 하지만 적어도 3가지, 많으면 4가지만 갖춰도 헤비 케이팝 유저들에게는 눈도장을 찍는다. 그래서 대개의 아이돌 그룹은 저 중 3가지 정도를 갖춘 노래를 2–3곡 발표해서 팬덤을 모은 뒤, 야심 차게 준비한 훌륭한 곡 하나를 발표해서 폭발적인 인기로 승화시킨다.


안정적인 계단식 성장 공식이다. ‘으르렁’ 이전의 엑소, 이전의 방탄소년단, 이전의 소녀시대, 이전의 트와이스 같은 아이돌 그룹들도 저 공식을 따랐다. 그런데 공식이 무너지기 시작한 게 정확히 2016년 이후다. 이 시기 이후로 데뷔한 아이돌 그룹은 몇 곡을 발표하든 곡과 무대의 힘만으로 자생력을 갖추는 게 어려워졌다. 시장에 ‘프로듀스 101’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프로듀스 101’ 이후에 맞이한 세상

말하자면 ‘프로듀스 101’(이하 프듀)은 편리한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부분이 편리하냐면, 케이팝 팬덤이 해야 할 것을 대신해 주었기에 편리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그룹을 발견하기 위해 음악방송으로 3개씩 볼 필요가 없어졌다. 프듀에서는 자기소개부터 매력 어필까지 2회 만에 축약해서 보여주었고, 나의 감상이 개입할 필요 없이 심사위원의 감상으로 등급까지 매길 수 있었다.


그렇게 얼굴을 알린 가수들이 1년여 정도의 기간을 들이며 2–3곡을 발표하고 매력을 선보일 필요도 없었다. 두세 개의 미션을 수행하면 실질적인 무대 위 모습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멤버를 직접 뽑을 수 있다는 메리트까지 더해졌다. 기존 아이돌 시장보다 훨씬 빠르고 자극적이었고, 심지어 지루하지 않게 매년 진행하면서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1년에 한 개씩 뽑아냈다.

1화에서 등장하는 모든 연습생은 이름을 붙이고 나와 자신을 소개한다.
아예 1분 동안 자기소개를 할 수 있는 PR 영상을 네이버에 공개하기도 했다.

한참 아이돌 시장이 자라나던 2008–2015년에도 대형 그룹은 한 해에 한두 그룹이 등장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프듀가 배출한 신인 그룹은 데뷔하자마자 대형 그룹 파이를 가져갔다. 그래서 남은 아이돌 그룹은 그 나머지 파이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판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2016년 이후에는 이렇다 할 만한 성공을 거둔 신인 아이돌 그룹이 잘 없다. 기껏해야 2019년의 ITZY 정도인데, 여기도 리더인 류진이 유사 아이돌 프로그램인 ‘믹스나인’에서 얼굴을 알린 경력이 있다. 이외에는 그렇게 주목받았던 SM의 NCT조차 주목 대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 그룹은 2015년 5월 데뷔한 몬스타엑스, 여자 그룹은 2015년 10월 데뷔한 트와이스가 막차를 탔다.



아이돌 산업은 이제 어떤 윤리 위에서 걸어 나가야 하나

그러면 시장은 어떻게 됐을까? 그 이후에 론칭된 그룹들은 관행처럼 프듀 출신 멤버를 넣어서 데뷔했다. 그래도 그들 자체의 노래가 인기를 얻기보다는 프듀에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자잘한 유입을 기대하는 식이었다. 그조차도 하지 못한 그룹들은? 재데뷔를 위해 프듀에 나갔다. 프듀가 어지럽힌 생태계에서 살아남고자 다시 프듀에 나가는 것이다.
‘프로듀스 X 101’에서 최종순위 2위를 한 김우석은 그룹 ‘업텐션’ 출신이다.
마찬가지로 엑스원으로 데뷔한 한승우 또한 그룹 ‘빅톤’ 출신이고, 연습생 송유빈은 그룹 ‘마이틴’ 출신이다.

이런 실정이었으니 프듀 시리즈가 무너진 건 거의 필연에 가깝다. 방송 프로그램 하나에 산업 전체가 요동을 쳤다. PD는 편집권으로 사람 하나 인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신이 되었다. 하지만 인격은 신이 아니었으니 그대로 타락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래도 결국 프로그램 하나에 불과하기에 솎아내는 게 쉬웠다는 것 정도다.


관련자들이 실형 살 가능성이 없긴 해도 구치소 집어넣은 정도면 꽤 선전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싸움이었으니,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제2의 프듀도 기대하기 어렵다. 애초에 그 수많은 아이돌 서바이벌 중 성공한 게 프듀 하나뿐이었다. 사람들은 프듀가 방영하기만을 기다렸고, 프듀를 본 이후에는 경쟁에 진이 빠져서 다른 프로그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문제는 이다음이다. 황폐해진 산업과 분노에 휩싸인 대중이 남았다. 이제 뭘 하지? 손쉽게 대중을 탓할까? 비인간적이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콘텐츠에 몸을 내맡겼다고? 그러면 동시에 또 다른 궁금증이 떠오른다. 그보다 윤리적인 선택지는 대체 무엇이 있을 수 있지?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돌을 찾아서 소비해주는 일은 윤리적인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혹독한 연습생 생활을 하고 격렬한 내부 경쟁을 거쳐 여기까지 왔노라며 1위를 하고 나면 세상 무너지듯이 우는 아이돌을 소비하는 것은? 혹은 그 뒤에서 거의 똑같은 과정을 거쳤음에도 이런저런 요소가 부족해 몇 년 동안 박수만 보내다 내려가는 비인기 아이돌을 열심히 응원해주는 일은, 윤리적인가?


그러니까 나는 이 모든 일이, ‘프로듀스 101’의 등장과 아이돌 산업의 황폐화와 프로그램 조작 논란까지, 아이돌 산업 자체가 개선하지 못했던 비인간성에서 기인했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겠다. 그냥 그 산업이 레일 위를 달리다 보면 도착할 역이었던 것이다.


프듀 시리즈에 나온 사람만 404명이다. 10–20대 소년소녀들이 종일 카메라에 노출되는 비인간적인 프로그램인데도, 거기에 나가고 싶은 연습생 또한 아직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비인간적인 산업을 동시다발적으로 꿈꾸고 있는 게 과연 맞는 길일까? 이게 올바른 사회적 욕망인가?


난 이제 회의적이다. 가장 적극적인 아이돌 소비자이면서도, 동시에 아이돌 시장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최소한 10대로서의 삶과 10대로서 배워야 할 교육을 더 보장해주는 제도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유아 시절부터 아이돌 콘텐츠에 노출하는 프로그램들이 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새 유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는 ‘샤이닝 스타’. 바로 이런 콘텐츠부터 우려된다는 것이다…

아이돌이라는 꿈은 과학자, 소방관, 경찰관과는 다르다. 매년 100명이 시험에 통과해서 먹고살 만한 소득을 올리는 직업이 아니다. 매년 데뷔한 100명 중 1명만 고수익을 올리고 나머지 99명은 굶는 직업이다. 그에 비해 사회의 안전장치는 거의 전무하다. 그래서 10년을 기다려 데뷔했다고 말하는 아이돌을 보고 눈물 짓는 게 아니라, 10년을 연습실에 넣어두고도 책임지지 않는 기업에게 새로운 책임을 안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돌 산업을 줄지 않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꺼져야 했을 흐름이지만, 해외의 거대한 케이팝 팬덤이 생기면서 도저히 져버릴 수 없는 게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시장 자체는 넓어졌음에도, 아이돌 산업에 대한 규제와 권리 보장, 지원에 대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못 봤다.


그러니 프듀가 망한 지금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중소 기획사의 야심 찬 신인 그룹이 다시 주목을 받을 수 있는/소비자는 음악방송을 보며 그들을 파악하는/좋은 음악과 여러 경쟁력으로 승부하는 정상적인 흐름이 다시 돌아올 수 있어서. 그나마 이것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 보여서.


원문: 도수안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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