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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내 개만을 위한 사랑, 다른 동물에게도 확장하기로 했다

일단 무언가 ‘시작’하는 일은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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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 운동을 하는 한 단체에 한 달에 3만 원씩 정기 기부를 시작했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유기견 보호소 봉사활동에 다녀온 다음의 일이다. 순이와 10년이 넘게 함께 지내면서 그 특별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범위를 넓혀갔고, 유기견 문제에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는 했다. 관심을 가지기는 했다. 딱 그 정도의 표현이 적확할 듯하다.


한 번쯤은 봉사활동에 참여해봐야지 하면서도 막상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유기견 보호소에 갔다 와서 괜히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에게 병균이 옮을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관심이 확장되어봤자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내게 특별한 개는 순이 하나였고, 순이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일에 쉽사리 발을 디딜 수 없었다. 그 무서움을 뒤로하고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오히려 충동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기견 보호소라고 했을 때 나는 무엇을 상상했나. 그런 곳들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이야기를 무수하게 들어왔으나 사람의 상상력은 늘 경험한 것 근처를 넘어서지 못한다. 슬레이트 판자로 덮인 견사는 다행히 뜬장은 아니었으나, 제대로 치워지지 못한 배설물들의 썩은 내는 자꾸만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사람 손이 늘 부족한 곳이라 할 일은 차고 넘쳤다.


배설물을 치우고 쌓여 있는 사료 포대를 정리하고 사료를 섞어 견사마다 넣어주고 여기저기 쓸고 닦는 내내 비지땀이 흘렀다. 더위가 한참 물러가긴 했어도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견사 내에는 습기와 열기가 가득했다. 평상시 볼일이 없던 구더기나 쥐의 사체 때문에 비위가 약한 나는 몇 번이나 표정을 찌푸리기도 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환경은 좋지 않았고 노동의 강도도 셌다.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는 강아지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는 어쩌지 못하고 손등을 내밀었다. 사람 손을 탄 아이는 손을 탄 대로, 타지 못한 아이는 타지 못한 대로, 불쑥 찾아온 사람이 반가우면서도 겁이 나 어쩔 줄을 몰랐다.

이름이 없는 아이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아가, 아가, 하고 부르면 겁을 내면서도 와서 냄새를 맡았다. 아마 주인이 있었을 아이들은 대놓고 저를 예뻐해 달라며 고개를 들이밀기도 했고. 내가 사준 푹신한 방석 위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순이를 나는 여러 번 떠올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들은 순이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견사를 돌아다니며 나는 주문을 외우듯 ‘또 올게, 누나 금방 또 올게’ 하고 개들에게 속삭였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다시 등을 돌려, 지금껏 그랬듯 모르는 척 살 것 같았다. 내 소중한 개 한 마리만 예뻐하면서, 저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굳이 알고자 하지 않으면서.


그 까만 눈들을 쳐다보며 수십 번 다짐해놓고도 결국은 기껏 약간의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내 부채감을 지우려 하고 있다니. 그러니까 그 정기 기부를 신청하면서 나는 뿌듯하기보다 부끄러웠다. 자동이체를 설정해놓으면 나는 더 이상 이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 동시에 내가 그래도 무언가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 된 걸까. 난민 구호를 위해 기부를 하면서는 그래도 내가 여기 한국에서 뭔가 도우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않냐고 변명할 여지라도 있었다. 과연 이 일에도 그럴 수 있을까. 보호소를 다녀온 뒤로 나는 매일 순이의 눈을 볼 때마다 다른 개의 눈을 떠올리고, 그 순간 뭔지 모를 죄책감이 어디선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모르는 척, 자동이체에 기대 알량한 도덕심을 채울 수 있을까.



유기견을 넘어, 동물권을 생각한다는 것
봉사활동을 다녀온 뒤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비슷비슷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운명처럼 이번 달 독서 모임에서 버려진 개들의 현주소를 추적해 거기서부터 ‘동물권’ 논의를 시작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게 되어 차라리 다행이었달까.

이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반려견을 향한 사랑은 종종 유기견을 향한 걱정으로, 번식장에 관한 고민으로, 개 식용에 관한 질문으로, 종국에는 다른 농장 동물에 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물권’ 생각이다. 관심이 옮겨갔다고 해서 이 새로운 관념의 논의까지 혼자 끌어가는 것은 어려운 것. 그 과정에서 누구나 부딪히는 모순에 관해 책에서 좀 더 명쾌한 설명을 찾을 수 있었다.
모든 타자가 내게 특별해진 존재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깨달음과 일치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감상주의를 넘어서야 했고 내 안의 도덕적 한계를 재설정해야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튀어나오는 자기모순을 당혹감에 휩싸여 응시해야 했다.

동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들은 이 모순에 대해 공격적인 질문을 받는다. “개, 고양이를 먹지 말자고? 소, 돼지, 닭은?” “모피를 입지 말자고? 가죽 신발과 가죽 가방은?”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을 쓰자고? 동물실험을 한 의약품은?”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나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중요한 선택을 한 사람들, 생명윤리에 있어 엄격한 생활을 하는 실천주의자들(나는 아니다)은 극단적인 동물 애호가라는 조롱을 당한다.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 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이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하며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 4년간 들었던 심리학 강의를 통틀어 내게 가장 임팩트를 크게 남겨준 문장이 순간 다시금 떠올랐다.
생각과 행동이 다를 때 사람들은 이 모순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둘을 일치시키기 위해 생각을 바꾼다. 행동을 바꾸는 것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처음 듣자마자 뒤통수를 때리는 듯 얼얼한 충격이 있었던 이론이었다. 그 뒤로도 많은 경우에, 나를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 문장을 여러 번 상기해왔다. 동물권에 관한 문제도 결국 이 문장을 인용해 이해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삶은 실제로 많은 동물의 희생 위에 놓여 있다.


동물권의 문제를 좀 더 깊게 인식하면 할수록 나는 내 생활의 많은 것들에서 스스로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내 옷장에 걸린 가죽 재킷과, 아마 동물실험을 여러 번 거쳐 내게 왔을 화장품들, 내가 덮고 자는 오리털 이불과 내가 거의 매일같이 소비하는 육류. 극단적인 실천주의자가 되어 이 모든 것을 배제하는 삶을 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서 계속 동물권의 문제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불편한 일이다. 편해지고 싶다면 딱 하나, 생각을 바꾸면 될 일이고.


그 유혹을 견디고 어떤 식이라도 행동을 해보려고 해도 바로 모순과 비난을 직면하게 된다. 돼지는 먹으면서 개는 예뻐해? 소는 신으면서 개는 예뻐한다고? 그간 내가 이런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이런 질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질문에 결코 이 담론에 ‘All or Nothing’이라는 극단적인 사고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한다.

예를 들어 개 식용을 찬성하며 “소, 돼지, 닭은?”이라고 묻는 사람들은 모순된 현실(개와 고양이는 사랑받고 소, 돼지, 닭은 착취당하는 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쪽을 그릇된 일로 치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농장 동물의 착취를 비판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그가 육식을 한다면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농장 동물이 당하는 가학 행위에는 침묵하는 반면 개 식용에 반대하는 사람은 위선자라고 비난한다. […] 무엇보다 동물과 관련해 완벽한 실천주의자가 되지 못할 바에는 실천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편이 차라리 일관성 있다는 입장이다.

바로 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를 자격의 기준으로 삼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동물의 고통에 이야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면 개 식용을 반대할 자격이 없다. 가죽 제품을 사용한다면 모피를 반대할 자격이 없다. 일관성 있게 소비하거나 일관성 있게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완벽한 실천주의자가 아니면 어떤 동물의 고통도 말할 자격이 없는가. 자격 없는 자들은 다수의 입장, 즉 가학적인 동물 착취에 침묵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가. 완벽한 비거니스트도 아니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위선자인가.

다른 도덕성에 관한 담론에서는 누구도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결국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외면하고자 하는 것뿐. 소와 닭과 돼지는 고통받고 있으니 개와 고양이도 ‘평등하게’ 그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도 궤변에 가깝다.


저자가 지적했듯 우리는 평등을 말할 때 ‘상향평준화’로서의 평등을 논해야 하지, ‘하향평준화’로서 평등을 맞추려 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 ‘더 고통받는 동물’과 ‘덜 고통받는 동물’이 있을 때 모든 동물을 ‘더 고통받는 동물’로 만들어야 동물 간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가치 없는 주장이다.


물론 누구도 이 앞뒤 안 맞는 논리를 머리 싸매고 꿰어맞춰 일부러 궤변을 늘어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지금껏 지속해 온 행동을 바꿀 수 없을 뿐, 그러므로 그 행동 하나하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소한 생각의 단초를 지워버려야 할 뿐. 나조차도 그래 왔으니 이제와서 누구를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전부가 아니더라도, 내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일단 무언가 ‘시작’하는 일은 가치 있다.

출처한국경제

인정한다. 동물권을 향한 이 모든 관심은 내 개를 향한 사랑, 내게 특별한 유일한 존재로 인해 촉발되었다. 결국은 이 이기적인 마음에서 새로운 도덕심이 피어오른 것이다. 중심이 여기에 있으므로 여전히 나는 다른 동물보다 개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점심으로 닭고기를 먹으면서 유기견 한 마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눈물짓는 모순도 여전히 범한다.


그러나 내 개를 향한 관심이 다른 개들로 옮겨갔듯, 모든 개를 향한 관심은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동물로 옮겨가고 있다. 여전히 딱 이 정도의 인간이라서 이기심을 확장해야만 겨우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 조금 부끄럽지만- 비록 그 시작이 이기심이었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내 개에게서 또 하나의 화두를 얻은 것이고, 앞으로 치열하게 그 반경을 넓히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하루아침 대단한 선언을 하듯 내 모든 일상에서 동물 착취를 그만두겠노라 말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오늘은, 다 쓴 수분크림을 한참 바라보다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브랜드를 열심히 검색해 굳이 그중 한 브랜드에 찾아갔다.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맞나요?’ 가벼운 말인 양 슬쩍 던지자 점원은 조금 당황해하는 듯도 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다.


이게 오늘 내가 내디딘 첫걸음. 비록 모순으로 점철된 내 삶에서 이 하나의 사건은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더 이상 그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걸음을 뒤로 물리진 않을 요량이다. 언제나 시작은 미미하지만, 결국 그 한 걸음을 떼지 못한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만약 담뱃갑에 붙어 있는 경고문처럼 식품에, 화장품에, 의류에, 침구에, 그 제품의 생산을 위해 희생된 동물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우리는 매 순간 동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고문이 없으므로 기억은 의지의 문제가 된다.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삶과 죽음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면 우리 또한 그들의 희생에 의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책무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이라고 믿는다.
내가 앞으로도 매 순간 이것을 기억하길. 그것이 내게 얼마나 불편을 주든 간에, 불편하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겨우 얼마의 기부금으로 부채감을 씻었다고 안도하지 않길. 조금 더 인간다워지길, 그래서 인간이 아닌 모든 동물에게 진 책무를 잊지 않길.



마치며
글에서 쓰지 못했지만 동물과 사람의 우선순위를 따지는 논리도 결국 개와 돼지를 구분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실제로 내가 동물권 향상에 관심을 갖고 있노라 말했을 때 누구는 “야, 아직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아”하고 나를 면박 준 적도 있었다. 관련해 생각해봄 직한, 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의 구절을 첨부한다.
동물 문제를 사소한 일로 간주하며 ‘사람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동물 문제가 자본, 환경, 기아, 질병 등 사람과 얼마나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는가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이들의 주장은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문제를 축소하려는 사람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우선순위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일은 동물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다. 나는 동물과 인간 중 하나를 택하는 대신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누가 아젠다를 결정하는가. 무엇이 중하고 경한지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선시 되는 가치 때문에 희생되는 타자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그것을 결정했던 사람들이 교묘한 방식으로 약자를 배제해온 자들은 아니었는가. 모든 사람이 획일적인 사안, 획일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이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동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항상 ‘그래도 사람이 먼저 아니냐’는 반응을 불러오는 것 같다. 이것은 ‘인권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동물권이 웬 말이냐’는 식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 나는 동물을 존중하는 일과 인간을 존중하는 일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 동물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인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생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헌신할 경우 다른 것을 위해 노력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한 사회 안에서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와 동물을 존중하는 태도는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모든 존재가 목적이라는 인식과 모든 생명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의 주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목적으로서의 인간으로 대우받을 것이다.
동물이 대접받는 나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인권 수준이 높고 권리와 복지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들이 동물권과 동물복지를 실현하고 있는 상황은 우연이 아니다. 인권과 동물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상관관계다. 마하트마 간디가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성은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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