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종말, 그리고 한국인의 집

조회수 2019. 8. 23. 16: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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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 공동체의 역할을 하던 직장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직장의 시대가 끝난 오늘날 한국인은 무엇으로 살까요? 먼저 직장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물론 직장은 지금도 중요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에서 직장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지금이 베이비 붐 세대가 은퇴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인구 구조상 한국인이 곧 베이비 붐 세대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해도 한국인의 상당수가 이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들의 소비와 취향이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좌지우지합니다.


거꾸로 말해 보면 한국인이 직장의 시대를 살았다는 말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베이비 붐 세대의 사람들이 직장에 매여서 오직 직장만 바라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더 이상 회사에 다니지 않거나 앞으로 회사에서 은퇴해 살아갈 시대입니다. 앞으로는 더욱 그렇겠죠.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다시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한국인은 무엇으로 삽니까?


두 번째 의미는 오늘날 평생직장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그럴듯했던 과거에는 직장에 들어간다는 건 단순하게 일해주고 돈을 받는 고용 관계로 들어간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평생 나를 지켜줄 어떤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죠. 이런 관점에서는 회사가 망하는 게 곧 내가 망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20세기의 구식 회사원의 이야기를 들으면 회사란 단순히 월급 주니까 받는 만큼 일하는 장소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젠 이런 평생직장의 개념은 끝났습니다. 직장의 의미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직장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이젠 평생 나를 지켜주고 평생 내가 지켜나가야 할 테두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줄 건 줘야 하지만 받을 것은 받아야 하는 그저 계약의 장소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직업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는 건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전에 테일러 피어슨의 『직업의 종말』이라는 책을 잠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간단히 언급만 하고 지나가면 ‘대학을 졸업해서 어딘가에 직장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면 보상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옳지 않다’는 겁니다.


세상이 연결되고 국제화되면서 경쟁이 너무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직업의 종말이란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피어슨이 강조한 것은 지금은 창업가의 시대라는 거였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릴 것은 직업의 종말에 관한 조금 다른 면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봅시다. 제가 직장의 시대라고 부른 한국의 과거는 수출형 산업이 발전하고 경제가 고도성장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때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회사들과 돈이 많은 서울로 모여드는 것이 먹고살 방법이었다는 겁니다.


지금의 노년층은 자신은 못 배웠지만 자식들은 힘들게 교육을 해서 회사에 취직시켰습니다. 전국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자리를 잡았고, 사람이 모여드는 서울에서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하면 그 부동산 가격이 올라서 그걸로 돈을 벌었습니다. 자식이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에 취직하면 그걸로 이제 평생 살아갈 방도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안심했습니다. 전 국민의 절반이 사는 곳, 경제·문화·정치적으로는 더 큰 의미가 있는 수도권은 기본적으로 뜨내기들의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인은 무엇으로 살았는가? 바로 직장과 부동산으로 살았다 돈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에 익숙한 많은 사람은 그럼 누구나 이렇게 살지 지금은 이렇지 않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직장도 부동산도 돈도 중요합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퇴의 시대, 평생직장의 개념이 깨어진 시대,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에 과거만큼 그것들로만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공동체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직장의 개념이 깨지고 회사를 나를 지켜줄 공동체로 보는 관점이 약해진다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줄 공동체가 약해졌을 때 순수히 돈으로 메꾸려면 엄청나게 효율이 높지 못합니다.


나이 들고 스마트폰도 못 쓸 정도로 시대에 뒤진 노인이 매우 외로워서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이 정말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을까요? 그 돈이 엄청나게 줄줄 새거나 아예 한 방에 사기로 다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까? 공동체는 흔히 공기처럼 당연하게 주변에 존재하기에 그 존재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망가지기 시작하면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큽니다.


한국은 뜨내기들의 나라가 되었다는 겁니다. 지역 공동체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겁니다. 한국 사람 중에 자기가 태어나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 지역에서 아직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자녀와 자기가 어릴 적에 다니던 국숫가게에 가고 자기가 산책하던 공원에서 시간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 계속 살거나 사람들이 돌아오는 곳은 신기한 구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하나 있다고 해봅시다. 뜨내기들만 있다면 그 나무는 그저 돈이나 모양으로 따질 ‘물건’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 나무와 관련된 기억이 있습니다.


가게가 하나 생긴다고 해봅시다. 그게 무조건 좋은 일일까요? 한국 사람도 나고 자란 곳을 가집니다. 고향에 가도 아는 가게 하나 없고 재개발로 건물도 모두 사라져서 알아볼 수도 없다고 한다면 섭섭하죠. 한국인은 이런 의미에서 대다수가 실향민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걸 막기 위해 한 가지를 직접 생각을 해 볼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전에 다시 질문해 봅시다. 한국인은 무엇으로 삽니까? 그게 어떤 것이든 표면적인 돈이나 지식 이상으로, 결국은 공동체로 삽니다. 일단 공동체가 무너지면 그러니까 나라가 없어지고 가족이 없어지면 돈이나 지식 같은 것은 갑자기 돌멩이처럼 가치가 없어집니다.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바로 직장을 자기 공동체로 여기며 살았던 면이 큽니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들이 그랬죠. 직장이 그런 의미를 잃고 자영업자들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난 지금 우리가 의지할 공동체를 재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국가 공동체를 강화하는 것, 즉 복지 정책을 펴는 것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족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가족 공동체가 파괴되는 걸 막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분은 또 다른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역 공동체도 아주 중요합니다.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은 한국에서는 너무 오랜 시간 무시되었습니다. 모두가 뿌리 없이 실향민처럼 사는 게 한국에서는 그냥 정상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평범한 보통 사람에게 공동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직장을 구하고 가게를 운영하는 돈의 문제만 그런 게 아니라 나아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사교, 음식, 여러 생활 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여러모로 보통 사람은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직장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럴 때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불안한 삶을 살 것입니다. 이유 없이 지출이 늘어나는 고비용의 삶을 살 것입니다. 이때 생각해봐야 하는 건 바로 한국의 주거 문화, 즉 아파트입니다.

주거 문화가 삶을 다 결정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삶은 집이나 거리의 모양과 큰 관련을 가집니다. 그런데 뜨내기들의 삶이 아파트 문화를 만들더니 이제 아파트가 좋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뜨내기라서 아파트가 좋아 보였던 걸까요? 아니면 아파트가 우리를 계속 뜨내기로 만드는 걸까요?


아마 둘 다일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아파트는 반공동체적인 주거입니다. 아파트는 뜨내기들의 주거답게 거의 완벽하게 폐쇄되어 있습니다. 공동체적인 주거란 이웃과 무언가를 공유하는 데서 나옵니다. 공유 경제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꽤 되었는데요. 공동체적인 주거란 공유함으로써 모두가 다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공재를 늘리고 독점적 소유를 줄이는 거지요.


그런데 아파트는 거리의 공간이 공유되고 그 거리의 정보가 자연스럽게 담장을 넘어서 들려오는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드나드는 것도 알 수 없어서 독거노인이 고독사를 해도 몇 달 동안 주변 사람이 모릅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획일적으로 같이 살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한 소속감을 주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생각해봐야 합니다. 직장이 공동체의 역할을 하던 직장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한국인은 무엇으로 삽니까? 이런 시대에 아파트가 아름답고 멋져 보이기만 하는 건 시대착오적이 아닐까요? 나이 든 분들도 공동체가 절실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기들이 뭘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왜 사는 게 불안하고 여유가 없는지 알지 못합니다.


소위 흙수저들은 세상에 기댈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바로 지금의 한국의 기성세대가 고도성장기에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고 한국을 아파트로 채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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