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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 많은 여행이 좋은 점

조회수 2019. 8. 22. 15: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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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계산기로 두드리는 숫자 게임이 아니다.

성격이 팔자라는 말이 있다. 난 나 자신이 늘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잘하지 못하면 열심히라도 하자’가 20대 때 나의 삶의 모토였다. 나의 단점을 채우기 위해 많은 시간, 꼼꼼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에 단련되어 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 내 책임’으로 돌리고 나를 갈아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 나를 갈고닦았다. 하지만 그 강박은 나의 목을 조르고 결국 나의 무릎을 꺾이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닳아 없어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무너질 거 같아서 훌쩍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방전된 나를 채워 오곤 했다.


여행이 뭔지도 모를 때 남들처럼 남들이 좋다는 곳, 남들 입에 맛이 있다는 곳, 남들이 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는 것들을 나노 단위로 빽빽하게 채워 여행 계획을 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을 할 때처럼 철저한 사전 조사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출장 계획 보고서를 쓰듯 여행 계획서를 준비했다. 남들이 해 본 걸 안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계획을 철저하게 짜도 여행에는 늘 변수라는 게 존재한다. 예상치 못한 폭우나 폭설, 노조 파업으로 인한 대중교통 중단, 공사로 인한 임시 휴무, 그 외의 각종 사건 및 사고 등등 출발 전에는 전혀 예상 못 한 일들이 여행자들을 기다린다. 이런 예상 밖의 변수와 마주하고 보니 나노 단위로 여행 계획을 짜는 일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빈틈 많은 여행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큰 기대가 없기에 큰 실망도 없지

남들 다 봤다는데 나만 놓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동동거리며 여행지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던 날들이 있었다. 절경이 보이는 기차 자리를 쟁취하는 법! 메뉴판에는 없지만 요청하는 손님에게만 제공된다는 서비스를 얻는 법! 한참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을 대기 없이 입장할 수 있는 법! 등등 각종 여행의 꿀팁을 얻기 위해 선배 여행자의 후기들을 정독해갔다. 그 정보들이 내 안에 쌓여 갈수록 나는 큰 기대에 부풀었다.


내 안에서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편 결과는 늘 실망이었다.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겨우 이 정도? “라는 아쉬움이 항상 따라왔다. 그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여행의 만족감은 떨어졌고, 내가 여기까지 와서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싶었다.


남들의 찬사 가득한 여행 후기보다 기대 없이 내가 발 도장을 찍어 직접 겪은 것들이 감동을 줄 때가 더 많다. 걷다 지쳐 우연히 별 기대 없이 들어간 카페가 인생 카페가 될 수도 있고, 티켓 자판기 앞에서 우왕좌왕할 때 시크하게 도움을 주던 어떤 현지인의 작은 친절에 감동할 수도 있다. 적당한 기대는 적당한 감동과 실망을 주지만, 큰 기대는 큰 감동이 아닌 실망을 불러오는 법이다. 반대로 기대가 없으면 뭐든 감동이다.


그래서 나는 빈틈 많은 여행을 좋아한다. 그 빈틈과 빈틈 사이에는 여유가 존재한다. 시간의 여유, 마음의 여유. 생각의 여유. 여행을 통해 여유들이 단련되면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에서도 그 ‘여유’를 유지하게 애쓴다. 빠듯한 일상 속에서도 여행에서 배웠던 대로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나를 즐겁게 만드는 것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나만의 유니크한 추억

빈틈 많은 여행을 다니면서 하지 않게 된 것들이 많다. 남들 다 가는 관광 명소에서 판에 박힌 인증샷을 찍는 일, 그 지역을 대표하는 맛집에서 줄을 서는 일, 그곳이 분명 중국이 아닌데도 made in china 표시가 찍힌 기념품을 사는 일 따위 말이다.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아도 할 일은 40만 8,000개가 넘는다.


골목이 예쁜 동네에 가면 목적도 없이 일부러 길을 잃어 동네를 구석구석 둘러보는 일, 외부인 출입이 허용된 현지 대학교 학생 식당이나 관공서에서 식판 밥을 먹는 일, 우연히 만난 길고양이와 한참을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일, 현지어를 1도 모르지만 그림책을 보는 심정으로 서점에서 느긋하게 책을 구경하는 일, 외식이 지겨울 때는 동네 마트에서 장을 봐서 간단하게 집밥(?)을 해 먹는 일…….


크고 대단한 걸 보고 경험하지 않아도 괜찮다. 배경만 여행지로 바뀌었을 뿐, 일상에서 하던 일을 해 보는 것도 분명 대다수 여행자가 쉽게 지나치곤 한다. 그 유니크한 경험과 추억은 그 누구도 훔쳐 갈 수 없는 나만의 보석이 된다. 빽빽한 여행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사소한 감동을 빈틈 많은 여행을 할 때면 비교적 자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남들이 여행 가서 다 했다는데 나만 못했다고 동동거리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대신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나만의 유니크한 경험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여행은 충분하다.



‘진짜’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

일상 속의 나는 정적이고, 폐쇄적이고, 시니컬하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니 이제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 성향과 기질이라 인정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여행에서의 나는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적극적이다. 여행을 통해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나 나 스스로 놀라곤 하는 일을 빈틈 많은 여행에서 자주 경험한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이렇게 정반대의 이 성향을 모두 가진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일상 속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나의 또 다른 성향들이 여행을 통해 발견하게 될 때,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칭찬 스티커’를 받은 어린이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여행에 빠져든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과 거리낌 없이 얘기를 하거나, 몸을 쓰는 각종 액티비티에 도전하기도 한다. 평소에 즐겨 먹지 않은 음식도 ‘여행 중 하나의 경험’이라는 핑계로 먹어 본다. 일상 속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는 일들이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여행자의 가벼운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게 바로 여행이 만드는 마법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 짓고 재단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난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난 뭐든 될 수 있는 사람이다. 빈틈 많은 여행을 통해 나라는 인간의 가치와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어쩌면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때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깊게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여행은 계산기로 두드려 효율성을 따지는 숫자 게임이 아니다. 여행이 주는 감동이 얼마나 내 가슴속에 깊이, 그리고 오래 남는지가 더 중요하다. 적어도 내 기준에는 말이다. 차비를 아끼고 밥 대신 고급 디저트를 먹는 일, 2시간을 달려가 겨우 5분 일출 감상하는 일. 누군가는 이것들이 비효율적이라며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지치고 힘들 때, 그 여행들의 기억들이 나를 일으키고 또 버티게 해 준다면 그것만으로 난 충분하다. 별 기대 없이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면 탓할 사람이 없다. 남들의 취향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택하면 당신의 여행은 분명 실망보다 만족이 큰 여행이 될 것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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