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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내 비밀이 죽고 나서 밝혀진다면

내 비밀이 죽은 이후 전시되지 않을 권리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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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자살을 많이 하는 어느 지역에 한 푯말이 세워진 이후 자살률이 낮아졌다고 한다. 푯말에 적힌 말은 이러했다.
당신의 하드디스크는 깨끗하게 지웠습니까?
트위터에서 본 이미지라 진위는 모르겠다만, 죽기 위해 자살 바위까지 간 자의 마음을 돌리는 공포에 대해서는 다소 공감이 간다. 내 사생활과 치부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프라이버시 폭로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맞아요? 제가 일본어를 못 읽어서…ㅋ

안타까운 건 지금과 같은 시대에 하드디스크를 지우는 것 정도로는 사생활을 지킬 수 없다는 점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삭제된 디스크의 복원/복구가 가능하며, 카카오톡 대화 복구도 가능한 시대다. ‘범죄’ 단서를 찾기 위한 기술, 일명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의 대상이 될만한 범죄자로 죽지 않더라도 산 자가 망자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간단하게 카톡 대화창에 들어가거나,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계정에 접속하기만 한다면. 요컨대 이 시대의 인간들은 많은 것을 남기고 죽는다. 이 방대한 클라우드에. 그러니 죽는 것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내 치부가 죽은 이후에 밝혀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과거처럼 서류 몇 개 책 몇 권 장작불에 불태우는 정도로는 내가 싸지른 똥들을 전부 삭제하기 어렵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죽은 이후 내 정보가 모두 사라지길 바라는 것, 혹은 필요하다면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내 정보가 공개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절대 공개되지 않았으면 하는 비밀도 있다. 가족이라고 해서 내 모든 부끄러움과 진실과 치부를 알고 까발릴 필요는 없다. 고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하지만 고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밝혀진 이야기에 대해 우리는 꽤 많이 안다. 막스 브로트는 자신의 원고를 태워 버리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다수의 책을 펴냈고, 페르난두 페소아의 지인들은 페소아가 살아 있을 때 출판하지 않고 처박아둔 트렁크 속 원고를 발견하고 분류해서 『불안의 서』를 출간했다.


불우한 결혼 생활과 우울증으로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미국의 작가 실비아 플러스의 일기는 그녀가 자살한 결정적 원인이었던 남편 테드 휴즈에 의해 사후 출간되었다.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쓴 트루먼 커포티가 10대 시절에 쓴 미발표 소설집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커포티가 약물과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지 30년이 지나 출간됐다.

카프카와 막스 브로트

그들의 글은 내 세계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고작 내 세계의 확장을 위해, 누군가 밝히기 원하지 않았던 세상의 한쪽을 동의 없이 봐도 괜찮은지 죄책감이 든다. 『실비아 플러스의 일기』는 그녀가 자살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운 순간을 담은 글이지만 불행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남편은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은 모두 삭제 후 출간했다.


실비아 플러스는 그녀의 ‘편집된 일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커포티는 동의 없이 출간된 자신의 10대 시절 소설집과 “성숙한 작품은 아니지만 자기 기예를 발전시키려는 젊은 작가의 노력”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작가의 20대 욕망”이라는 평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오래된 관용구만이 떠오른다.


어떤 대학교수는 사후 출간된 카프카와 페소아의 작품에 대해 “작가의 의사를 배신한 어떤 선택에 공익적 성격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작가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다면 그 훌륭한 책들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훌륭한 책이라는 결과 때문에 공익적 성과를 부여하는 과정 자체가 결과론적인 사후 해석이며 산 자의 오역이다. 죽은 자의 작품 사이에 우리의 오만과 욕망을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명작이 된 그들의 유작을 즐기며 하마터면 재가 되어 사라질 뻔한 문장들을 생각하고 아찔해 한다. 이 아찔함이야말로 그들의 작품의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한다. 하지만 ‘방대한 세상에 숨겨져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존재의 극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서사에 취해 그들의 글이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공익이라는 가치를 들먹이며 그들 삶의 비밀을 은밀한 관음과 맞교환하는 건 아닐까. 결국 그들의 죽음마저 감상에 빠지는 촉매제로 활용하는 건 아닐까.



죽은 자의 권리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까
자기 결정권(自己決定權), 즉 사적인 영역에서 국가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하지만 이 자기 결정권은 전적으로 산 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죽은 후 고인의 삶의 재산과 기록, 흔적은 모두 가족에게로 넘어간다. 이건 가족과 연을 끊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숨기고 싶은 삶의 치부도 직계존비속에게 가감 없이 공개된다.

출처비마이너
2016년 노숙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쪽방 거주인의 약 70%가 가족이나 친지, 즉 법적 연고자 중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존재는 죽고 나서 부고를 통해 알려지는데, 부고를 접하고 찾아온 혈족에게는 시신뿐 아니라 그간의 삶이 낱낱이 전시된다. 그런 이유로 쪽방에서 사는 사람들의 소망은 자신이 사망했을 때 법적 연고자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쪽방 거주자와의 인터뷰를 다룬 한 기사에서 정 씨는 말했다.
내가 죽었는데, 그쪽(가족)에서 만약에 누가 찾아왔다 그러면 내가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거 같아서 연락이 안 갔으면 좋겠어요.

기사의 부제처럼 ‘삶은 죽음 이후 다시 한번 전시된다.’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이 된 사람에게 내 쪽방과 빚, 쓸쓸한 삶이 밝혀지는 것은 그들에겐 고립사보다 더 고독한 일이다. 누구도 죽음 이후 내 삶이 전시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위대한 작가들도 어쩌면 그걸 공개한 사람들에게 제일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망인의 삶을 열람할 권리, 나아가 그들 삶을 전시하고 관리할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가 낳은 새로운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붕괴하는 정상 가족, 1인 가구의 증가, 죽은 자의 사후 자기 결정권, 모든 흔적이 클라우드에 남는 디지털 시대의 방대한 데이터… 현세대가 ‘사후 자기 결정권’의 의미와 가치를 재정립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죽은 이후에도 ‘동의 없이’ 전시될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권리가 무엇이 중요하냐고. 왜 우리는 망자의 기록을 존중해야 하냐고. 답은 간단하다. 산자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살아있는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존중하는 방식은 산 자의 미래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 내 삶 전체가 해부되고 부검되는 과정은 산 자에게 내 죽음도 이와 같으리라는 확신을 준다. 애도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저승세계의 기억을 다룬 영화 〈코코〉

내가 남긴 흔적은 회상의 매체가 된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는지까지가 내 삶의 굴레에 포함된 것이라면, 그것도 내가 결정하고 싶다. 나는 내 비밀이 죽은 이후 전시되지 않을 권리를 원한다.


원문: 사과집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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