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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안중근 의사가 사용했던 총은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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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게 뚜벅뚜벅 걸어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편에 이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사람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있었다.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바로 단총을 뽑아 그를 향해 4발을 쏜 다음, 생각해보니 그자가 정말 이토인지 의심이 났다. 나는 본시 이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잘못 쏘았다면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다시 뒤쪽을 보니 일본인 무리 가운데 가장 의젓해 보이며 앞서가는 자를 향해 다시 3발을 이어 쏘았다.

-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옥중 자서전 중
질문: 그대가 가진 브라우닝식 단총은 7연발인가 8연발인가.

안중근: 8연발이다.

질문: 단총을 조사해보니 약협이 7개 있고 발하지 않은 것이 1발 있는데 어떠한 까닭인가.

안중근: 나는 목적하는 사람을 쏘았으니까 그 후는 발사할 필요가 없으므로 멈췄다.

-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 심문 기록 중
질문: 그대가 십자형의 흠이 있는 탄환을 우의 총에 재어 준 이유는 어떠한가.

안중근: 이토를 죽이기 위해 재어 주었다.

질문: 흠을 낸 탄환은 힘이 있으므로 그대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었는가.

안중근: 나는 탄환 끝에 흠을 낸 것만 있었다.

질문: 끝에 흠을 낸 탄환은 명중하면 상처가 크기 때문인가.

안중근: 나의 탄환은 다 끝에 흠이 나 있다. 특별히 상처를 크게 할 목적은 아니다. 나는 흠이 나 있는 탄환을 샀다.

-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 심문 기록 중

M1900 사격 재현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확인했다. 주변 상황을 다 배제하고 오로지 사격과 ‘표적 제거’에 한정해서 나온 결론은 세 가지였다.


  1. 죽음을 각오한 경우에는 표적을 제거 할 수 있는 방법론이 더 많아지고, 확실해진다.
  2. 이토 히로부미라는 ‘캐릭터’ 덕분에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3. 안중근 의사는 명사수다.


‘죽음을 각오한’이라는 표현 때문에 ‘자살 공격’을 떠올릴 수도 있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퇴로’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다음 탈출하겠다.’고 했을 경우 M1900으로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게 어려웠을 수도 있다.


사수가 생환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면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게 원거리 저격 혹은 시한폭탄 같은 실행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일 것이다. 원거리 저격에 한정한다면 사격 포인트는 한정된다. 경호하는 쪽에서도 저격 예상 포인트를 확인하고 이쪽에 병력을 배치하거나 예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대통령 행사 때 주변의 높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하는 게 괜한 ‘뻘짓’이 아니다.

출처민중의소리

안중근 의사는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기에 이토 히로부미 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실제 사격 거리는 7.25m라는데, 팔 길이 등을 감안한다면 7m 정도에서 사격했다고 볼 수 있다.


M1900에 들어가는 7.65mm탄, 그러니까 32ACP탄은 위력이 강한 군용탄이라기보다는 호신용 권총탄으로 볼 수 있다. 위력이 약한 대신 반동이 적어서 한 손 사격을 해도 안정적인 사격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이 32ACP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면, 상당히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렇기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의 코앞까지 다가갔고, 이토에게 4발을 발사했다. 이 중 3발이 이토의 몸에 박혔다.


범용한 사람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퇴로를 찾아 도망칠 생각을 했을 텐데, 안중근 의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인원 3명에게 각각 1발씩을 발사했다. (아이러니한 게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의 총격에 죽지만, 안중근 의사의 총을 맞은 수행원 3명은 천수를 누렸다.)


처음부터 퇴로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거사였다. 만약 M1900을 들고 ‘생환’을 전제로 한 작전을 펼쳤다면 ‘맞으면 맞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허공에 난사하는 형태로 몇 발 쏘고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1909년 10월 26일의 하얼빈은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한 행사에서 군중의 난동이 일어났다고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이토 히로부미의 캐릭터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이토는 오늘날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 정치’를 했던 인물이다. 하얼빈에서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이 결정됐을 때 러시아 쪽에서 경호 문제를 두고 협의했다. 자신들 관할 안에서의 회담이었기에 러시아 쪽도 이토 히로부미라는 거물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그 회담 당사자였던 코코프체프부터가 러시아 재무장관이었다. 당시 러시아 정치권에서는 소위 말하는 ‘실세’로 불렸다. 자국 장관을 생각해서라도 경호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최소한의 경호만을 말했다. 그는 자신을 보러 온 일본 환영인파를 고려했던 것이다. 과시욕이었다. 그 결과 안중근은 하얼빈역사까지 무사히 접근할 수 있었다.


우덕순 의사가 담당했던 채가구(蔡家溝)역에서는 러시아의 철저한 검문 때문에 우덕순 의사가 체포된다. 10월 26일 하얼빈역 의거는 안중근 의사와 그 동지들이 하얼빈 일대를 다 구역을 나눠서 각자 담당구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오면 사살할 것을 약속했다. 이때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지나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하얼빈역을 담당했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만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일을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하니 그대는 여기 머물러 기회를 기다려 행동하고,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 두 곳에서 일을 치르면 더욱 확실한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일을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성공할 것이요.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가 성공해야 할 것이다. 두 곳에서 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활동비를 마련해 다음에 거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일 것이다.

-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옥중 자서전 중

만약 열차가 채가구역에 섰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는 우덕순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어찌 되었든 이토 히로부미의 과시욕 덕분에 안중근 의사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 이후의 결과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대로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이토 히로부미의 과시욕이 기회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안중근 의사가 뛰어난 사격 솜씨가 없었다면 거사는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다. 하얼빈역을 재현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는 와중에 느낀 건 ‘안중근 의사가 총을 잘 쏘는구나.’라는 기존 평가의 재확인이었다.


‘저격’이란 개념으로 접근했을 때 사수는 표적의 표면적이 가장 많은 정면 혹은 배면을 노린다. 표적의 크기도 크기지만, 치명적인 장기를 바로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서 이토에게 명중한 3발의 탄환 중 1탄과 2탄은 오른쪽 상박, 즉 어깻죽지에 맞았다(오른쪽 상박 위에 1탄, 그 아래에 2탄이 박혔다. 이 탄들이 팔을 뚫고 들어가 몸통에 박혔다).


우리는 단순히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쏴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고만 안다. 그러나 사격 장면을 확인하면 안중근 의사가 보통 사격 솜씨가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역에 도열해 있던 각국 대사, 일본 관료, 청나라 군대, 러시아 의장대 등을 사열했다. 보통 ‘→’자로 이동하는 게 정상인데, 이토는 특이하게 역사 끝까지 가서 ‘⊃’자로 이동했다. 유턴이라고 해야 할까? 이 당시 속도는 시속 2km 정도로 추정된다. 완보라고 해야 할까? 각국대사와 악수를 하고, 일본 관료들을 격려하고, 일본 환영 인파에 손을 흔들고…


이 와중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보폭에 맞춰 같이 평행하게 걸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물론 그사이에는 인파와 군인의 장벽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키는 163cm, 이토 히로부미는 156cm. 그리고 러시아 의장대와 헌병대의 사열을 받는 순간,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의장대 사이의 틈(부대 간의 간격. 오와 열을 맞출 때의 틈으로 추정된다)으로 빠져나가 이토에게 총격을 가한다.

안중근 의사 재판 당시 일본 측에서 제출한 현장 도해도.

하얼빈역에 있는 표지석을 보면 비스듬하게 방향이 잡혀있다. 연구자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안중근 의사의 몸이 12시 방향이라면, 팔은 2시 방향으로 뻗어서 총격을 가했습니다. 7발을 다 발사한 다음의 팔 방향은 3시에 가까운 방향으로 추정됩니다.

이토를 쫓아가 평행하게 쫓아가다 틈을 발견 사격 지점을 확인. 멈춰 서고, 양복 왼쪽 주머니에서 M1900을 뽑아 들고, 표적 확인, 조준한다. 이때까지 이토 히로부미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동했을 것이다. 그래서 팔 방향으로 정면이 아니라 약간 비스듬하게 2시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연구자들과 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린 총 사격 시간은 6초. 찰나와도 같은 짧은 순간. 하얼빈 하늘에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역사는 바뀌었다.



1. 6초

6초라는 사격 시간 앞에서 우리는 고민했다. 고민의 대목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6초라는 시간 동안 경호 인력은 뭘 했던 걸까?
  2. 6초라는 시간 동안 7발을 발사해 4명의 사람에게 6발이 명중했다.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몇 명의 전문가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격선수 출신으로 경찰특공대 지원자와 특수부대 지원자들에게 사격 훈련을 시켜주는 사격 전문가, 모처에서 VIP의 경호를 맡았던(외곽 경호지만) 인물, 그리고 안중근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역사 전문가였다.


① 사격 전문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인터뷰했다.

“6초? 6초 동안 7발을 쏘게 내버려 뒀다고?”

“그럼 지금이라면 어떻게 해?”

“초탄까지는… 아니, 백 보 양보해서 두 번째 탄까지는 양보해도, 나머지 다섯 발이 나갔다는 건 명백한 경호 실수지.”

“어째서?”

“총 소리가 나자마자 VIP를 덮쳐야지.”
이때부터 안중근 의사의 의거란 걸 말하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만해. 전문적인 경호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몸으로 덮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지. 어깨에 모신나강 메고 있네.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기보다는 네 말대로 의장병이야. 이런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을 거야.

② 경호원 출신


안중근 의사의 의거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인터뷰했다.

“기본적으로 차탄 이후의 탄이 나갔다는 건 사수를 제압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수를 제압했다면, 이후의 발사는 제지됐고, 이후의 피해는 없었을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경호대상을 안전한 곳으로 퇴피시켜야죠. 그리고 사수를 제압해야죠. 그래야 재탄, 삼탄이 안 나가게 할 수 있죠.”

③ 안중근 연구자

안중근 의사가 6초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3가지 정도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일본 측 경호 인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급작스런 상황에서 대응을 못 했다.

둘째, 러시아 측 병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경호의 축소를 원했고, 당시 러시아 의장대는 ‘부동자세’였다. 즉 이토 히로부미가 사열을 시작하는 상황이라서 부동자세를 취했고, 이 타이밍에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측에서는 자신들의 VIP인 코코프체프를 먼저 챙기는 게 순서였다.

셋째, 당시 소음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의장대가 경례하고 군악 소리가 울리며 귀를 때렸다’는 내용이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나온다. 당시 하얼빈역에서는 이토를 환영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환영인파가 내는 소리, 군악대의 연주 등이 뒤섞여 있어서 상황 파악이 힘들었을 것이다.
6초 동안 안중근 의사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격할 수 있었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천안 독립기념관의 현장 재현.

다음 문제는 6초라는 사격 시간이다. 6초 동안 4명에게 7발을 발사해 6발을 명중시켰다. 1초당 1발씩이라면 어렵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여기에 제약 조건이 하나씩 붙었다.


  1. 표적은 시속 2km로 걷고, 사수도 똑같은 속도로 걸어간다.
  2. 시야가 제한됐다. 당시 도열했던 사람들에 의한 ‘인의 장막’이다. 특히 러시아 의장대에 이르렀을 때는 시야가 더 제한됐다. 당시 하얼빈은 얇은 서리 같은 흰 눈이 내린 상태였고, 러시아 병사들은 두꺼운 코트와 우샨카(방한모)를 썼다. 당시 사수의 키는 163cm였는데, 이 러시아 병사들 건너편에 있었던 표적의 키는 156cm였다.
  3. 사수는 10월 23일부터 의거를 준비했다. 3일 전에 하얼빈역 1번 플랫폼을 동쪽에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4. 사수는 표적의 얼굴을 몰랐다. 표적을 특징할 수 없다는 건 상당한 핸디캡이다. 어찌어찌 사격 타이밍을 잡았다 하더라도 목표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사수는 필연적으로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판단할 시간이 필요 한 것이다. 한 팔이 묶인 채 링에 오른 권투선수라고 해야 할까?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에 분노한 원태우 열사의 돌팔매질에 부상당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사진이 퍼지는 걸 극히 꺼렸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른 채 의거에 뛰어든 것이다.)
  5. 표적은 시속 2km 내외의 속도로 걸으며, 정면이나 배면이 아닌 측면만이 사수에게 노출된 상황.


이 제약조건들을 대입해서 사격의 순간을 정리하면,


  1. 사격 지점 확보 후 1차 정지: 목표물을 확인하고, 판단하는 시간.
  2. 표적의 오른쪽 상박에 2발 명중, 관통의 반동으로 표적의 몸이 사수의 정면으로 돌아설 때 표적의 윗배를 향해 3발째 명중: 이때까지 총 4발을 발사.
  3. 1차 표적 제거 후 2차 정지: 1차 사격 직후, 1차 표적이 아닐 경우를 대비 2차 표적 탐색.
  4. 표적 2, 3, 4를 향해 각기 1발씩 발사. 명중.


의거에 걸린 시간은 6초지만, 2번의 표적 탐색으로 최소 2–4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가정하에서 실제 사격 시간은 2–4초 사이란 소리가 된다. 이 모든 조건을 사격 전문가에게 제시했을 때의 반응은 간단했다.

“굉장히 어려운 사격 조건이다.”

“그 정도인가?”

“그렇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뭘 물어보려는 건가?”

“그 총이 안중근 의사 총인가?”
여기서 새로운 조건이 하나 더 추가된다. 바로 ‘총’이다.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총의 출처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을 지원해줬던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자금 지원 등에 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거나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누구에게 뺏었다’ 등등으로 표현했다.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의하면,
[…] 이때 동지 우덕순을 만나 계책을 비밀히 약속한 다음 각기 권총을 휴대하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생각하니 […]

라고만 나와 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권총은 ‘누군가’가 조달해 줬다고 판단한다. 우덕순과 각기 M1900 한 자루씩과 탄창 2개씩을 나눠 가졌다는 점에서 누군가의 지원을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인물은 거부 최재형(崔在亨)이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기 위해 우덕순과 안중근의 동행을 주선했고, 유동하와 조도선으로 하여금 통역으로 합류하도록 했다.


최재형은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구한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러시아로 넘어가 정착했다. 태어나길 노비의 아들이었지만, 군수업으로 큰 부를 쌓고 이 덕분에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고 5개의 훈장까지 받았다(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 해군 소위로 임관 통역관으로 활약한다). 이렇게 부와 명예를 얻은 최재형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게 된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아버지’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는 의병들에게 군량과 군자금, 무기를 제공했고, 직접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최재형이 가장 유력한 총기 제공자라 할 수 있다. 아니라면 이석산, 윤능효, 이강 선생 등이 지원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급하게 지원받은 총으로 거사를 치른다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가급적이면 손에 익은 총으로 사격을 하는 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원래 안중근 의사는 총을 잘 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집안에 포군(砲軍)이 있어서 사냥을 따라가고, 총을 쏘고, 직접 사냥을 했었다. 김구 선생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는데, 안중근을 총 잘 쏘는 청년으로 말했다. 이미 안중근은 사격 솜씨는 근동에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그가 1908년 지린(吉林)성 훈춘(琿春)시의 한 시골 마을에서 석 달간 사격 훈련을 했다고 한다. 이 집의 소유주는 안중근 의사의 친척인 안동렬 씨였고, 그가 머무르면서 사격했던 기간은 1908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이었다. 만약 이때 사용했던 권총이 M1900이었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다.

영화 〈도마 안중근〉 속 거사 장면. 여기에서의 모델은 브라우닝 하이파워다.

출처영화 〈도마 안중근〉
다만 확실한 건 안중근 의사가 총을 잘 쐈다는 것, 여기에 더해 3개월간 집중적으로 사격을 연습했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최소한 사수가 총을 처음 쏴보거나, 사격에 서툰 것이 아니라 베테랑이란 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을 넘어 표적을 사살할 수 있었던 게 운이 아니라 실력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


2. 우리는 안중근을 아는 걸까?

올해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0주년이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안다고 생각한다. 되물어 보고 싶다. 우리는 안중근을 아는 걸까? 안중근 의사의 기록 필름이라고 해서 의거 직후에 끌려가는 영상을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이 영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토 히로부미와 회담을 하는 러시아의 코코프체프가 당시로써는 신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영사기를 들고 와 이토와의 만남을 촬영했다.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필름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선물로 건네줬을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코코프체프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선물로 줘야 할 필름이 ‘의거의 기록물’이 됐다. 이 필름은 의거 직후 일본 인사(외교 관련 인사)가 재빨리 입수했다(돈을 주고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필름은 어떻게 됐을까?


공식적으로 이 필름이 세상에 공개된 건 1995년이다. 일본의 한 방송사가 저격 장면을 제외한 25초가량의 필름을 방영했다(국내 방송사도 2008년쯤 이 필름을 입수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던 장면은 촬영되지 못했던 걸까? 아니다. 촬영됐고, 심지어 상영되기도 했다.


1910년 8월 14일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보면, 러시아 촬영기사가 촬영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장면 필름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이게 실제로 상영됐다는 기사가 나온다(필름 두 통이 태평양을 건너와 상영이 됐지만, 당시 미국인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 필름이 어디로 갔을까? 학계 전문가들은 이 필름을 일본 정부 기관이나 영상 관련 단체가 입수해 보관한다는 확신이 있다. 필름뿐 아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에 두 아우에게 남긴 유언
숙명여대 뒤편 효창공원에 가면 삼의사 묘역이 있다. 1946년 7월 9일 김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소를 만든 것이다. 김구 선생도 3년 뒤에 이곳에 안장된다. 이 삼의사 묘의 옆에 보면, 비석이 없는 무덤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을 수가 없다.

효창공원의 안중근 의사 묘터.

일본은 안 의사의 흔적을 빨리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이 당시 한반도에서는 안중근 의사 엽서가 불티나듯이 팔렸다안중근 의사의 변호사비를 모으기 위해 가족들이 엽서를 만들어 팔았다. 일본은 이 엽서 판매를 중단시켰다.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의 상징이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의 유해를 암매장시킨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총은 어떻게 됐을까?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M1900은 증거품으로 분류돼 일본 검찰에 넘어갔다. 재판이 끝난 뒤에 일본 본토로 넘어간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 총이 사라진다. 


일본 측 주장에 의하면 ‘관동 대지진 당시 분실했다.’ 1923년 9월 1일에 있었던 대지진, 뒤이은 사회적 혼란과 수습 과정에서 M1900을 분실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일본 땅 어디에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총번 262336의 총이 있을 것이다.



3. 이 ‘황당한’ 프로젝트의 시작
저거 브라우닝 하이파워인데?
2018년 4월 우연히 중국 하얼빈 안중근기념관에 전시된 ‘의거 사용 총기’ 사진을 보았다. M1900이 아니라 브라우닝 하이파워였다.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건 맞지만(기초 설계만 했기에 존 브라우닝의 작품이 아니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M1900은 그의 첫 번째 자동권총이었다(상업적으로 판매한).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안중근기념관에 왜 브라우닝 하이파워가 전시된 걸까?
호기심은 이어졌다. 서울 안중근기념관, 전쟁기념관, 천안 독립기념관을 샅샅이 훑었다. 안중근 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M1900은 아니더라도 동일한 모델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국 땅에서는 FN 社에서 생산한 M1900은 없었다. 서울 안중근기념관에는 M1900의 플라스틱 모형이 있었다.

서울 안중근기념관의 M1900 플라스틱 모형.

출처딴지일보
우리가 하나 만들어 볼까?
40대 남자 세 명이 총을 만들기로 결정을 내렸다. 안중근기념관과 의견을 나눴고, 복각품을 만들어서 기증하는 것에 합의를 봤다. 이때가 2018년 5월이었다. 당시 이 세 남자는 2018년 안에 이 프로젝트를 끝내겠다는 계획을 짰다. 그런데 제안이 들어왔다.
내년이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입니다. 2019년 10월 26일 전달해 주신다면 뜻깊을 거 같습니다.

1년이란 시간을 벌었다. 복각하기 위해 M1900의 설계도를 찾고, 모형 총이 생산됐는지를 확인했다. 참고할 자료와 총기를 확보하기 위해 우선 일본 쪽을 타전해 봤다. M1900은 없었으나(개라지 형태로 소량 생산된 곳은 있지만) M1900의 다음 버전인 M1910은 생산하기에 참고하기 위해 일본 모형 총기 업체에 의견을 타전하다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왜 그 총(M1900)을 만들려는 거죠?

이런 뉘앙스의 질문도 받았다. 그때서야 어렴풋이 느끼게 됐다. 일본 모형 총기 업체에서 암묵적으로 M1900을 만들지 않은 게 아닐까? 우리에겐 영웅의 도구였지만, 그들에겐 ‘흉총’이 될 수 있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럼 무조건 만들어야지.


처음엔 설계도를 입수해서 복각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점점 이야기가 커졌다. 완벽한 복각을 위해서 실총을 빌려서 3D 스캐닝을 통해 설곗값을 뽑아낸 후 이 데이터를 가지고 복각에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 “이 당시 총은 지금처럼 기계에 의해 가공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직접 깎고, 붙이고 만들었다. 설계도는 같아도 사람의 손을 탔기 때문에 미묘하게 다 다른 총이 나왔다.”
  • “이 당시 열처리 기법은 지금과 다르다.”
  • “총 설계도라는 게 정확한 치수나 수치를 적어놓은 설계 시방서 개념이 아니라… 냉정하게 말하면 총기의 형태를 개략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논의가 모인 건 실총 확보였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과 행정 협조였다. 한국은 총기 청정 국가였다. 성인 남성 대부분이 돌격 소총의 분해·결합과 사격, 소부대 전투 전술을 몸에 체득한 상태지만 일단 사회에 나온 순간 총을 접할 기회는 없다. 엄격한 총기 통제 덕분에 민간에서 총을 구할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다. 국내에 총을 들여오는 것도 어렵지만, 상태가 괜찮은 M1900을 구하는 건 더 어렵다.


이 두 가지 난점을 피해 가는 방법이 나왔다: M1900을 빌려서(미국에서는 이런 식의 거래가 흔히 있다. 문제는 이런 클래식 총기에 대한 주인의 까다로운 요구를 어디까지 받아주느냐다. 아예 분해하지 말라는 요구를 하는 주인도 있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3D 프린팅 업체에 맡긴다. 여기서 수치 값을 확보한 다음 이 데이터를 국내에 들여와 총을 제작한다. 예상외로 비싼 랜탈 가격 앞에서 고민했지만 이 방법이 가장 무난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여기에 욕심이 더해졌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실사격을 해보자. 이렇게 해서 나온 방안이 필리핀행이다. 총기 복각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찍자고 했는데, 어느 순간 메이킹이 아니라 본편 다큐멘터리를 찍던 우리는 실총을 확보했다면 이걸 한 번 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안중근 의사가 사격 실력이 좋았다고 말하는데, 실제 얼마나 뛰어났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실사격을 해보자.’

다큐에도 담겨있지만, 안중근 의사의 사격 폼에 대해서 수많은 조사와 연구를 했다. 현대 권총 사격법은 ‘권총 사격선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양손 사격이 기본이다. 그런데 이 당시 안중근 의사는 한 손으로 사격을 했다. 과정은 차차 연재에서 풀어낼 것이고, 다큐멘터리가 공개되면 알겠지만… 6초 만에 4개의 목표물을 향해 급작 사격을 해서 표적에 명중했다. 7m 거리에서.


M1900을 확보해서 필리핀으로 가져와 이곳에서 실총 사격을 하고, 이 총을 분해해 수치값을 확보한다는 계획이 추진됐다. 역시나 문제가 많았다. 빌린 총을 필리핀까지 공수해 오는 것도 문제지만, 필리핀도 국가이기에 행정 소요가 아예 없는 게 아니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갔다.

실총을 사자!



4. 실총을 사자!

총기 옥션을 뒤지고, 건 브로커와 접촉하는 3개월 동안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제 눈 감고도 분해·결합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복각을 위해 설계도를 보고, M1900과 관련된 자료와 영상을 확인하고, 총기 옥션을 뒤지는 게 일상이었다. 최소한의 생계 활동. 아니, 총을 사고 복각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총은 넘쳐났다. 블랙 프라이데이 때 어지간한 권총은 300–700달러 수준에 팔리는 걸 봤다(우리나라 K-5의 민수용 버전인 라이온 하트도 상당히 ‘싼’ 가격에 팔리는 것도 봤다). 신품 총기는 차고 넘쳤지만, M1900은 보이지 않았다. 국내 모형 총기 유통사에서 건 브로커를 통해 총기를 구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일을 훨씬 수월하게 진행되지만 문제는 가격대였다.

상태 좋은 녀석을 구하려면, 1만 달러부터 시작해야 할 겁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지금도 신기하다. 나만 빼고 다들 부자인 거 같았다(그건 아니지만). 당시 우리가 구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루트의 업체와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을 대표하는 모형업체 쪽부터 시작해서, 민간의 실총 사격장, 건 브로커, 방산지정업체는 물론 미국에 사는 대학교 시절의 동창들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끌어왔다.


M1900은 어떻게든 작정하면 더 ‘쉽게’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M1900 앞에 붙은 문구였다. 상태가 괜찮은 M1900. 이때쯤 우리들은 내심 말은 안 했지만, M1900을 확보한다면 ‘하얼빈’을 재현하겠다는 생각들을 했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이제 거의 포기할까 생각하던 그때,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그 총 구했다.

프로젝트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의 퇴로가 차단되던 순간이었다.



5. 이제 돌아갈 수도 없어

전쟁기념관에 기증될 FN M1900.

현재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우라웍스는 실물 M1900(총번 710592)를 구입했다. 총기 옥션 몇 군데를 몇 달에 걸쳐서 도전한 결과물이었다. 이 실총을 국내로 들여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재현하고, 이 실총을 베이스로 복각품을 제작하는 게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전쟁기념관에 실총을 기증하기로 협의가 끝났고, 복각품은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하는 것으로 2018년 5월에 모든 논의가 끝이 났다. M1900이 국내로 들어온 이후 군과 민간의 협조를 얻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재현할 준비를 한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은 현재 다큐멘터리로 제작 중이며, 조만간 총기 전문 유튜브 ‘건들건들’에서 진행 일정을 공개할 예정이다.


현재 다큐멘터리 제작비용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총을 구해오고, 복각하고, 배송 및 행정 절차 과정과 시험 발사를 위해 이제까지 준비한 제작비를 다 소모했다. 안중근 의사 의거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 대한민국에 한 자루도 없었던 M1900을 전쟁기념관에 기증하고 이를 베이스로 총번 262336이 박힌 복각품을 안중근기념관에 기증하겠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프로젝트를 끌어 올 수 있게 했다.


지난 17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솔직히 좀 힘들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그만둘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물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이어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지, 후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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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by. 펜더
    『펜더의 전쟁 이바구』 『엽기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전 군사 전문가. 현재는 통칭 글 자판기.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글이 나온다. 양산형을 추구한 건 아니었지만 삶이 날 이렇게 만들었지. 안 될 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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