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치졸한 무역 해코지로부터 얻어야 할 뼈저리고 실용적인 교훈

조회수 2020. 12. 24. 16: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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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산업 강국이 되기 위해 주력해야 할 과제

1.

자동차 바퀴 안에 들어가는 제동장치의 부품을 만드는 제조업체에 다닌 적이 있다. 공장을 두 개나 둔 견실한 하청업체였고, 원래 있던 주안공단의 공장은 상당히 낡았지만 새로 지은 남동공단의 공장은 시설이 꽤 괜찮았었다.


국내 완성차 업체에 납품할 뿐 아니라 수출을 한다는 말도 들었는데, 나 같은 생산직은 오래 다닌 정규직이더라도 좋은 수입은 아니었다. 근속기간이 긴 정규직 생산직의 경우, 거의 늘 있는 잔업과 제일 바쁠 때의 주야 2교대로 노동자 평균연봉을 약간 넘는 벌이를 맞추는 듯했다. 그래도 정규직이면 학자금 지원이 있다는 게, 계속 다닐 인센티브로 작용했다.

사무직에서 밀려난 듯 보이는, 나이는 부장 정도로 보이는 아재 한 명이 라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나처럼 중개업체 소속의 신입을 상대로 ‘크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은’ 작업 관리를 하곤 했다. 출근한 지 며칠 안 되었을 때, “이런 데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것 없다”며 비밀 아닌 비밀을 그 양반이 조언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런 말은 중간 수수료 업체들을 떠돌며 최저임금에 걸쳐 있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이기도 하다.


2.

독일은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명 ‘히든 챔피언’이다. 한국의 원하청 관계에서 불법을 넘나들며 만연하는 갑질의 해결책을 거론할 때 독일의 사례가 곧잘 인용된다.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은 수출을 통해 판로를 다각화할 수 있으며, 자국 내 원청에 종속되지 않아 자체적으로 갑질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청업체 노동자의 처우도 개선할 수 있다.


이런 경로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반화는 곤란하다. 앞서 제동장치 납품업체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 하청업체 노동자의 처우는 그 사업체의 기술력이나 견실성, 수출 여부만으로 좌우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1차 벤더는 회사의 실적이나 원청과의 관계, 직원의 처우 등이 괜찮다지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제조업) 노동자의 그 처우 개선에 관해서는 원청이냐 1–3차 협력업체 소속이냐에 상관없이 최대한 균질하게 양호한 수준을 확보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나아가 특히 여성 노동자와 전체 국민의 고용 및 생활 여건을 고르게 높일 대책이 필요하다. 전에 한 번 상세한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저임금·단시간·무세금의 미니잡을 활성화해 여성 고용률을 끌어올린 독일의 경우 (여성) 저소득층의 생활 여건이 유럽의 선진국 가운데 눈에 띄게 좋지 않다.



3.

최근 일본 정부는 한국의 반도체 대기업을 대상으로 자국 중소기업이 생산하는 3가지 핵심 소재에 대해 이렇다 할 명분도 없이 수출 규제를 강행했다. 향후 경과에 따라 반도체 생산이 아예 멈출 수 있는 위험한 조치다. 차후 더 많은 수출 규제가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재, 부품, 장비 분야에서 필수 품목들의 상당수를 수입에 의존한다는 것은 이전부터 한국 산업의 취약점이었고 이 부문에서 일본이 막대한 교역 이득을 얻어왔다. 일본으로서는 일종의 ‘을의 횡포’를 자국 기업의 손해까지 감수하며 저지른 셈이다.
선진국 경제는 고부가가치 재화를 팔아야 하고 제조업에서는 소재, 부품, 장비가 그 대표 상품이다. 여기에 강점이 있는 기업들은 세계를 대상으로, 표면적으로는 ‘을’이면서도 종종 거의 ‘갑’의 지위에서 납품할 업체를 상대한다. 탄탄한 기술력으로 무장한 이 ‘강소기업’들은 선진국 수준의 산업과 국민의 생활을 지탱하는 기반이 된다.

오래전부터 (욕도 많이 먹는 장하준을 비롯해) 많은 학자와 관련 전문가가 이런 내용을 지적해왔다. 한국이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이기는 하지만 고부가가치 부품 소재나 설비 등을 수출하는 글로벌 중소기업들이 늘어나야 한 단계 위의 제조업 강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쇄국 정책’을 펴는 현시점에 와서는 ‘산업 안보’를 위해서라도 ‘국산화’가 당면한 과제로 부상했다.

격변하는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강소기업의 육성은 중요하다. 설혹 어느 대기업이 쇠퇴하더라도 품질이 높은 설비, (기)자재 등을 팔 수 있는 중소기업들이 살아남아 대기업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느냐는 산업과 국민의 생활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양승훈이 지적하듯, 한국과 일본에 밀려 조선업이 쇠퇴했던 스웨덴은 주요 기자재와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들이 조선업 강국의 명맥을 이으며 자국의 산업과 노동자를 상당 부분 지켜냈다. 결은 좀 다르지만 핀란드에서도 ‘그 노키아’가 쇠망했을 때 관련 인력들이 게임을 비롯해 숱한 IT 중소기업들을 창업했고, 이내 핀란드는 IT 스타트업의 메카로 떠올랐다.

핀란드는 노키아 위기의 여파로 몇 년간 고용률이 약 1%p 정도 하락했다가 이후 회복했는데, 그와 더불어 이른바 세계행복 국가 순위에서 연이어 1위를 차지했다. 그전까지는 ‘노키아 위기와 무관하게’ 항상 최상위권이었는데 떨어진 고용률이 회복되는 가운데 선두로 뛰어올랐다. 이 같은 주관적 지표의 호전은 나빴다가 좋아진 핀란드의 경제 여건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동시에 산업의 근간이었던 노키아의 쇠락에도 세계 최상급의 행복도를 구가한 것은 핀란드의 강한 복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세계행복지수 보고서」 2014–2016에서 잠시 하락했던 핀란드의 행복 순위는 고용률 회복과 함께 선두로 뛰어올라 2015–2017, 2016–2018에서 연달아 1위를 차지했다.

혹자들은 삼성이 망해도 한국에 별문제가 없을 거라며 희망에 찬 낙관론을 주장하기도 하나, 여러모로 어이없는 발상이다. 한국 같은 복지 후진국에서 주축 대기업의 몰락은 심대한 피해를 불러온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한국의 대표기업들이 망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이 시대에 제2의 플랜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우리의 산업과 삶과 미래를 위해 막대한 비중의 대기업을 대체할 수 있는 강소기업들의 육성 체계를 갖춰야 한다. (조세저항을 누그러뜨릴 허심탄회한 공론화를 통해) 세계적인 수준의 복지체계 또한 완비해야 한다. 일본의 치졸한 무역 해코지로부터 얻어야 할 뼈저리고 실용적인 교훈은 분명 여기에 있을 것이다.



4.

말단의 생산직은 흔히 말하는 ‘단순 반복 작업’을 수행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을 해보면 단순 반복 속에서도 요령이 있고 숙련이 생기고 작업의 능률이나 안전과 관련해 개선사항을 떠올리게 된다.


여러 단순 생산직을 거쳐본 경험으로 보건대, 이러한 현장의 숙련과 개선에 대해 최선의 의사소통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자율적인 개선 의지를 약화하는 작업장의 환경이 큰 요인이다. 대우도 좋지 않고, 언제 그만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스스로 최선의 개선책을 찾는 일은 드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그럼에도 인간의 고유한 성실함으로부터 혹은 한국 특유의 근면함에 따라 노동자의 자율적인 숙련과 개선이 일정 부분 이뤄진다).


말단의 생산직까지도 최대의 숙련을 쌓고 물 흐르듯 자연스레 개선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한국의 산업을 가장 빠르게 재도약시킬 수 있는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기층 노동자에게 이런 분위기가 조성될 정도라면, 더 어려운 숙련과 기술력의 축적에서도 이전에 없었던 높은 효율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쉽사리 간과되지만, 업무 자체에서 순수하게 흥미를 찾을 때 발생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혁신의 강력한 동력이다.

출처: 서울경제

생각해보면 한국이 약한 산업 분야에서 강점을 가진 선진국은 그 대부분이 한국보다 훨씬 노동자 친화적인 사회를 구축했다. 가장 말석에 있는 노동자의 삶이, 작업장에서도 공공복지 측면에서도 한국보다 우월하다. 바로 이런 지점들이 한국이 지금보다 한 단계 위의 산업 강국이 되기 위해 정말 주력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원문: 장제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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