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회사가 지옥이었을까: 웰메이드 회사 만화 '지옥사원'의 등장

조회수 2019. 11. 18. 1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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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도 악마처럼 되어야 하는 한국의 회사에 던지는 질문

여러분은 〈미생〉 보셨나요? 드라마도 웰메이드입니다만 원작 만화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미생〉은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회사 이야기가 가지는 한계 때문입니다. 회사가 우리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오히려 이를 콘텐츠로 소비하는 데는 허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종일 시달리다 보니 회사 이야기를 또 듣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판타지에 빠져듭니다. 집에 가서 드라마를 보면 잘생긴 재벌 2세 실장님이 항상 나옵니다. 스마트폰 게임은 중세시대에 칼을 휘두르며 몬스터 잡기 바쁩니다. 퇴근 후 생활에 회사가 다시 등장할 여지는 적죠. 지긋지긋할 테니까요.

성격은 모났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아버지 회사 다니는 수많은 실장님

그럼에도 저는 회사생활을 다룬 콘텐츠를 좋아했습니다. 만화책으로는 『100억 원의 사나이』 『시마 과장』 『기업 전사 야마자키』 등이 그랬고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를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웹툰으로는 〈쌉니다 천리마마트〉(사실 이건 회사생활이라기보다 개그물이지만), 〈미생〉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걸 다 보신 분이 있다면 덕력을 인정해 드립니다.

국내 회사 만화의 전설이라고 생각되는 질풍기획. 필견입니다.

회사생활을 다룬 콘텐츠는 징글징글하지만, 특유의 마력이 있습니다. 회사라는 공간 자체가 인간의 희로애락과 욕망이 춤추는 장소입니다. 한정된 장소에서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된 인간이 그때그때 내리는 판단을 보고 있자면 이렇게 사람의 밑바닥을 보기 좋은 장소도 없습니다. 드라마틱한 장면도 많이 나오죠. ‘인간’을 관찰하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이런 점 덕에 미생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작이 스멀스멀 크고 있음을 최근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보았고, 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브런치 글로 써 봅니다. 바로 다음 웹툰의 〈지옥사원〉이 그 주인공입니다.



줄거리와 전개상의 강점


천국 말고 지옥에서 지내는 엘리트 악마가, 인간계의 음식 맛에 현혹되어 다시 인간에게 빙의합니다. 그런데 사고로 인간은 죽어버리고 몸을 소유하게 된 악마. 죽은 인간은 재산 유무와 사회적 지위가 높고 낮음에 따라 구분하는 악마들의 등급 분류에 따르면 낮은 등급의 인간입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 악마가 무사히 지옥으로 돌아가려면 헬조선의 대기업 ‘선호 그룹’의 임원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고아에 고졸 스펙인 상황에서 악마는 악마적인 지적능력으로 대기업 신입사원 연수부터 받기 시작합니다.

(좌) 악마, (우) 빙의된 주인공 모습

스포하지 않으려다 보니 너무 두리뭉실하게 적었습니다만, 악마라고 해서 막 초능력으로 사람을 죽이고 조종하고 이러지 않습니다. 지극히 인간의 능력 범위 내에서 악마가 인간 세계에 적응해 가는 내용입니다. 


주제와 이야기 전개 방식도 상당히 새롭고 신선합니다. 특히 지옥과 현실 사이를 교차 편집하며 주요 사건을 전개하는 속도감과 몰입도가 매우 뛰어납니다. 이 만화의 칭찬할 포인트는 정말 많습니다만, 크게 3가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1. 지옥과 헬조선 회사의 극명한 대비, 읽을수록 흔들리는 가치관


작가가 묘사하는 지옥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악마들은 지옥에 온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는데, 악마라기보단 지옥에서 근무하는 샐러리맨처럼 나옵니다. 지옥의 관리자(상급 악마)들도 악마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지옥 대마왕은 주인공 악마를 구하기 위한 따뜻한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한국과 회사에 대한 묘사도 사실적이기 그지없습니다. 주인공은 고졸에 고아면서 고급 음식점 주차 보조를 하며 생계를 꾸립니다. 그가 사는 자취방은 좁고 늘 가난에 시달립니다. 그를 사랑하는 여자 친구는 대기업 직원인데, 여자 친구 부모님은 주인공과의 결혼을 당연히(?!) 반대합니다.


무한 경쟁에 내몰려서 면접 때부터 미친 듯 싸우는 젊은이들의 모습, 재벌이 법치주의를 옹호하는 이유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설명, 돈이 없는 자는 돈이 있는 자에게 굽히는 게 자연스러운 현 사회를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 등 만화의 내용이 공감됩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데, 이 만화의 무서운 점은 읽을수록 대체 어디가 지옥이고 어디가 한국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이 오히려 더 악마 같고 악마가 더 인간 같은 장면이 여러 곳에서 나오는데 이 전개가 억지스럽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대그룹 총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주인공

2. 이러한 상황에서 악마가 발전해가는 과정


지옥에서 나와 헬조선에 떨어진 악마는 어떻게든 대기업 고위직이 되어야 합니다. 악마는 인간 세상을 잘 모릅니다. 왜 말을 공손하게 해야 하는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왜 저렇게 생각하는지 등을 하나씩 배웁니다.


이 과정에서 악마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정곡을 찌릅니다. 완전히 제3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엄청난 재미를 선사합니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의 이상한 점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회사생활을 하며 빠르게 회사가 원하는 인재로 커갑니다. 그 과정은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따뜻하게 되어 가는 게 아니라, 악마성을 강화하는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악마가 인간사회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악마성이 강화되는 장면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주인공은 인간을 관찰하며 급격히 성장해 갑니다.

3. 악마도 악마처럼 되어야 하는 한국의 회사에 던지는 질문


저도 회사에 다녀보니, 인간성이 넘치는 해맑은 사람보다는 비정하고 냉혹한 소시오패스가 회사생활을 더 잘할 거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회사는 인정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이윤을 창출하려고 만들어진 곳입니다. 이윤에 적정선이 있다면 윈윈 비즈니스도 가능합니다만, 본디 인간의 욕망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이익이 극대화되면 누군가는 손해를 봅니다. 이윤추구가 아니라 이윤 극대화가 목표인 한국의 대기업 안에서 악마의 생각과 행동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면 좋겠지만) 큰 재미(와 약간의 스릴)를 줍니다. 그냥 회사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악마의 모습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많은 장면에서 우리 모습이 투영되어서입니다.



결론: 또 하나의 웰메이드 회사 만화


2017년 5월부터 연재하고 있는 웹툰인데 이제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가는 중입니다. 임원까지 한참 남았습니다. 끝까지 작가님들이 무탈하시길 기원할 뿐입니다. 만화를 보면서 이렇게 감탄하긴 실로 오랜만입니다. 무조건 추천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을 적어보자면, 악마의 시선으로 회사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조망해 준다면 좋겠고, 악마에 대비되는 천사 캐릭터도 나타나 또 다른 방식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면 좋겠습니다. 선한 의도가 가득함에도 악마적 사회 속에서 선의가 왜곡되는 과정은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요.


악마도 힘들어하는 회사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꼭 보세요!


원문: 길진세 New Biz on the BLOCK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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