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해지고 싶어요: 영화 '박화영'

조회수 2019. 7. 12. 16: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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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당해도 좋으니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의, 고독감

『사채꾼 우시지마』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 일본 뒷골목의 세계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굉장히 자극적이고 무섭다. 그 험악함으로 인해 호불호가 매우 갈리기도 한다. 물론 나는 아주 좋아하지만.

만화 『사채꾼 우시지마』

우시지마를 읽다 보면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힌다는 우파적인 세계관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거기엔 흔히 ‘사람 냄새’로 대변되는 어떤 인간미 따위는 전혀 없다.


오히려 자연의 생태계에 더 가까운 아주 촘촘한 먹이사슬이 있다. 그리고 그 먹이사슬은 야생의 그것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


학교에서 자신보다 약한 아이들을 협박하고 돈을 갈취하는 일진 여학생들은 다시 동료인 불량 남학생들에게 돈과 성을 착취당한다. 그 남학생들은 다시 그 돈을 좀 더 거물급인 선배 양아치들에게 빼앗긴다.


후배들에게 삥을 뜯은 양아치들은 사채업자에게 뼛속까지 털린다. 그리고 사채업자는 그렇게 모은 돈을 야쿠자에게 강제로 상납 당한다. 그야말로 정글인 것이다.

무자비하고 괴로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를 계속해서 볼 수 있는 데에는 그나마 절대적으로 선량하고 무고한 피해자가 없기에 심정적으로 덜 괴롭다는 것이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이 분명한 먹이 사슬에 기꺼이 뛰어든다. 마약, 도박, 강도, 살인, 강간 등.


단 한 명 유일하게 착한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그런 그 역시도 막판에는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처한다. 선량한 그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 참으로 보기 괴로운 장면인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무고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는 그렇게 순진한 것 자체가 어쩌면 죄악이었을지 모른다고. 남을 믿는 것, 마음을 내주는 것, 기대를 갖는 것, 경계를 허무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영화 <박화영> 역시 잔혹함으로 따지면 우시지마의 세계 못지않다. 불량 청소년들 사이의 권력과 서열은 성인들 사이의 그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분명하다. 서열을 거스르거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응징과 보복 역시 가차 없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래?라는 질문은 여기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때리지 않으면 맞는 곳, 뜯어내지 않으면 뜯기는 곳, 박화영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영화 <박화영>

이 곳 역시 절대적인 약자도 절대적인 강자도 없다. 여자아이를 강간하는 남자아이에 대한 분노를 미처 수습할 사이도 없이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며 화장실을 기어 다니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 세계에서 남자아이들은 힘, 여자아이들은 성을 도구로 삼아 권력을 구축한다. 물론 ‘성’이라는 것은 남자에게 버림받는 순간에 모든 힘을 상실해버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통하는 순간에는 꽤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자아이들만큼 강하지도 않고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예쁘지도 않은 박화영에게는 내세울 것이 없다. 그녀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집.


엄마에게 버림받고 전셋집 한 칸과 함께 달랑 남겨진 박화영의 집은 어느새 불량 청소년 무리의 아지트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박화영은 스스로를 ‘엄마’로 정체화한다.


그녀는 불량 청소년들을 위해 음식, 빨래, 등 온갖 시중을 들고 때로는 잔소리를 하기도 하며, 그럴 때마다 외친다.


니들은 진짜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다른 아이들 역시 박화영을 엄마라 칭하긴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존재할 때뿐이다. 속으로는 모두 그녀를 깔보고 무시하고 대놓고 이용한다. 심지어는 박화영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 순간 공허하게 웃으며 외친다.


하하하, 이것들, 니들은 진짜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엄마에게 버림받은 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그녀는 아마도 존재의 의미가 필요했을 것이다. 설사 이용을 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는 나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두려워하고, 화를 내면서도, 결국은 스스로를 내던진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는 공허한 울림은 어쩌면 스스로를 위한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용을 당해도 쓸모 있어지고 싶다는, 이용을 당하는 것이 필요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자기 확신.

박화영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렇다 할 사이다나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고 내내 이용과 모욕을 번갈아 당하는데, 조금은 잔인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관객 입장에서는 그런 그녀를 동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왜냐하면 박화영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달아날 수 있는 상황에서 달아나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무시만 당하는 엄마 역할에 집착하고,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집단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쓰고, 그 과정에서 홀로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사실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마츠코의 모든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그렇게 내던지면서까지 사랑에 매달리고,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라면 결국 누구도 그녀를 구원해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자기는 자기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고 마츠코를 보며 늘 이야기했었다.


문득, 그 모든 것은 내가 강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유달리 강인해서가 아니라, 이용당해도 좋으니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독함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박화영을 보다가 깨닫는다.


“근데, 엄마, 내가 집에 가면 집에서 혼자 뭐 해?”
“…존나 기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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