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송가

조회수 2019. 4. 9. 15: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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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에겐 보석이 있었다.

노회찬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10년 전,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눈팅하던 한 커뮤니티에서 그의 간담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노회찬을 보러 갔다. 아내와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담소를 나누었는데, 그 인연이 확고부동한 평생의 짝으로 이어졌다(인연의 계기가 돼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회찬 님).


호프집으로 이어진 2차에서 우연히 노회찬의 옆에 앉게 됐다. 잠시였지만 10년 전 그때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정말로 복지를, 다른 좋다고 하는 나라들처럼 하려면 부자 증세로는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진보정당 등에서 강조해온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이거는 상당 부분 왜곡된 구호 아닌가요?

10년 전엔 지금과 달리 아는 게 적었고, 단지 소수의 부유층만 들쑤셔도 사회가 아주 좋게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심스러운 기대를 갖고 있었다. 노회찬은, 그가 속한 정파의 주장과는 다른, 사실을 얘기해 주었다.

복지 제대로 하려면 저소득층도 더 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이 건강보험료 1만 원을 더 내면 잘사는 사람들은 10만 원을 더 내야 해요. 그렇게 복지가 강화되면 저소득층에게 더 이롭습니다.

노회찬이 세상을 등졌을 때, 중앙일보의 한 특파원은 그와 며칠 전 사석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사로 썼다.

민주당도 정의당도 솔직하지 못했다. 이걸 (최저임금을) 올리고 안 올리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노동시장 개편과 함께 맞물려 가야 했다. 문제의 핵심은 경쟁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린 경제활동인구의 28%가 자영업자인데, 미국은 7%다. 이런 경쟁 속에선 카드수수료를 1%대로 낮추거나 상가임대차보호법을 고쳐봐야 해결이 안 된다. 음식점 창업해 1년 못 버티고 망하는 게 전체의 70%다. 미용사 국가 자격증을 가진 이가 60만 명이다. 이들은 하루 20명의 고객을 받아야 먹고산다고 한다. 하루 1,200만 명이 가야 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 이런 걸(노동시장의 기형적 구조를) 다뤘어야 했는데 그냥 우리 정의당은 2019년까지, 문재인은 2020년까지, 안철수·유승민은 2022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하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이야기한 셈이다.

노회찬은, 몇 안 되는 좋아하는 정치인이다. 아니 이 세상에 없으니 ‘이었다’. 이제는 기록으로만 볼 수 있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정치인이고 사람이다. 서슴없이 표를 준다는 의미에서 지지하는 정치인이냐면, 꼭 그렇지는 않다. 나는 진보 노동 진영의 정강·정책에 공감하지 못하는 게 꽤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비판적인 대목은 심각하게 굴절된 세금과 복지관을 한국에 퍼뜨린 것이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민주당이 받아서 더욱 널리 각인시킨 이 관점은 안 그래도 문제였던 한국의 각자도생 세태를 한층 강력하게 부채질했다.


부자가 아니라면 세금 분담에 신경 꺼도 된다는 저 구호, 부자한테만 걷어도 저 무슨 나라들처럼 복지가 될 거라는 달콤한 격려의 말. 그렇게 간편하고 속 편한 세상은 지구상 어떤 통계에도 없다. 소수 부유층은 여타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만큼 세금을 부담하지만,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이례적으로 세금 부담이 적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소수 부자도 더 내야 하지만 절대다수의 소득 계층도 세금 부담을 더 져야 복지다운 복지를 해볼 수 있다. 세금 인상의 금액 면에서는 부유층의 개별 부담액이 월등하겠지만, %p의 인상률 면에서는 부자가 아닌 이들의 부담 수준이 매우 높아져야 한다(덧붙여 응당 세금을 잘 써야겠지만, 그것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세금이 마련된다고 주장한다면 사기꾼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러한 기초 사실을 안타깝게도 노회찬처럼 무척 좋아하는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터놓고 이야기를 하진 못했다. 대신 그는 허름한 호프집의 사석에서 사실에 부합하는 속내를 알려줄 뿐이었다. 현실 정치인으로서 조세저항에 찍힌다는 건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을까? 그가 속한 진영의 대세 주장에 반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을까?


현 정권과 진보 노동 진영에서 강조해온 무상복지라는 네이밍도 매우 부적절했다. 학술적으로, 또 제한적으로 ‘무상○○’ 식의 표현을 쓰는 거야 수긍할 수 있지만, 정치인이 앞장서서 세금이라는 비용이 들어간 복지를 무상으로 하겠다고 강변한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도 복지선진국도 모든 복지 비용은 ‘세금+개별 요금’으로 충당된다. 각 나라의 사정과 ‘소득 계층’에 따라 세금과 개별 요금의 비율이 달라질 뿐이다.


한국처럼 복지를 무상으로 규정하는 게 일상화되는 현상은 도저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무엇보다 각종 무상 시리즈는 ‘부자 증세’나 ‘세출 개혁’과 좋지 못한 시너지를 일으키며 다수 국민으로 하여금 “내 세금은 안 늘어도 무상복지는 늘어야지”라든가 “무상이라며 왜 개별 이용료가 또 들어야 하느냐” 등의 첫 단추가 잘못 끼인 인식을 하도록 만들었다.

중앙일보의 특파원이 전언한 최저임금 인상에 비판적인 노회찬의 견해는, 이 언론사에 대한 기본 신뢰도는 매우 낮지만,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저임금의 과감한 인상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려면, 더 나아가 임금, 고용, 격차의 문제를 풀려면 세금, 복지, 물가, 자영업 및 영세 사업장의 구조조정,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정상화, 상황에 맞춘 규제 강화 및 완화 등 총체적인 사회개혁이 병행하여 진행돼야 한다. 노회찬은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본인을 포함한 정치권의 설익은 최저임금 인상책에 대해 자성의 시각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비록 사석에서의 말일지언정 노회찬의 상식적인 이야기도, 그 특유의 해학과 위트도 다시는 볼 수 없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좋아했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그가 이따금 그리워진다. 그의 비극으로 치러진 보궐 선거에서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니 더욱 생각이 난다. 노회찬의 비극에 대해 오세훈이 이런 일갈을 했다고 한다.

정의당이 유세하는 것을 보니 노회찬 정신을 자주 이야기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자랑할 바는 못 되지 않냐. 돈 받고 스스로 목숨 끊은 분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 정의당 후보가 창원 시민을 대표해서야 되겠냐.

나는 노회찬 정신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좋게 기억되는 이미지가 강할 뿐이다. 정의당이 그런 이미지에 부합하는 정책 노선이나 세계관을 확고하게 가졌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세훈 같은 보수파가 노회찬의 비극을 폄하하는 건 심히 꼴불견 내로남불이다.


한국 보수정치세력은 부패하기로 둘째가라면 말이 안 되고 친일과 독재, 메카시즘의 이력도 막강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면모를 변호할 때 시대 상황의 맥락이나 선과 악으로 베기 어려운 현실의 어려움과 복잡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상대를 비판할 때는 현실의 복잡성과 맥락을 무시하고 선악 이분법을 들고 온다. 평소엔 선악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면 안 된다고 강조하던 그들이지만, 그것은 자신들에게만 부여해야 할 혜택일 뿐 남에게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내로남불이 민주진보 진영의 전유물인 듯 비꼬는 게 보수파이지만, 내로남불 허물에서도 절대 최고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노회찬은 소수파에 차별적인 한국의 후진적인 정치구조에서 논란의 여지가 큰 정치후원금을 받았지만, 만년 소수정당으로서의 현실적 어려움과 정치자금으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금액, 뒤늦게라도 신념을 지키기 위한 그의 비극적인 선택과 가책 등 여러 가지 복잡한 현실이나 그의 고뇌 어린 처신을 생각하면, 특히나 보수진영의 정치인이 함부로 노회찬을 폄하할 계제가 아니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노회찬 정신을 잇겠다는 정의당이나 그 대표 정치인 심상정의 역량 부족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니 참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앞에서 진보진영을 비판한 것도 어찌 보면 부끄럽다. 노회찬 전 의원의 지역구에서 이뤄진 정의당의 선거 승리를 축하드린다. 여러분들에겐 보석이 있었다. 그보다 더 빛나는 보석이 속속 등장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원문: 장제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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