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완주: '자전차왕 엄복동' 리뷰

조회수 2019. 3. 6. 16: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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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헛도는 페달에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한다

※ 이 글은 IGN 코리아에 실린 글입니다.


100억 원대의 제작비, 다른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은 배우들을 구석구석 꽉꽉 채워 넣은 캐스팅까지. 2006년 〈누가 그녀와 잤을까?〉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김유성 감독의 신작 〈자전차왕 엄복동〉이다. 촬영은 2017년 봄에 이루어졌으나 2년을 기다려야 했고, 촬영 중반에 감독이 자진 하차하며 이범수가 사실상의 감독직을 맡는 등 영 쉽지 않은 길을 걸어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는 조선의 민족의식을 꺾고 그들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조선자전차대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일본 최고 선수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엄복동의 무패 행진에 조선 전역은 들끓기 시작한다. 때맞춰 애국단의 활약까지 거세지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엄복동의 우승을 막고 조선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최후의 자전차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시작부터 의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바이오와 주식시장을 뜨겁게 달군 셀트리온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셀트리온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이 달린 첫 번째 영화다. 대표 이범수를 필두로 소속 연예인인 신수항도 이름을 올렸다. 이 정도의 대작에 4대 제작사의 로고가 등장하지 않는 것부터 새삼스러운 출발이다.

영화는 아무것도 모르던 주인공이 최고의 선수로 거듭나는 스포츠물의 구성을 비교적 충실히 따른다. 물장사를 하며 입에 풀칠도 힘들어하지만 청년 엄복동은 오로지 순수함과 열정으로 세상을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신문물 자전차는 운명처럼 손을 내밀고, 순전히 생활고 때문에 시작하게 된 자전차 경주는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정확히는 노력보다 재능으로 승부하는 전개의 전형이다.


여기에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했으니 독립운동이 빠질 수 없다. 독립은 무력으로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쪽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우선이라는 쪽이 충돌한다. 전자는 폭탄 테러와 암살을 계획하고, 후자는 경성에서 최고 인기인 자전차 경주를 정복하고자 한다. 변방에서 자라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엄복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저 자전차가 좋아서 페달을 밟는 사이에 후자의 가장 큰 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전자가 남는다. 김형신(강소라)과 안도민(고창석)을 필두로 자전차 경주와는 꽤나 무관한 전개가 이어진다. 〈밀정〉이나 〈암살〉 등에서 볼 법한 그림이다. 그들을 잡으러 나선 사람은 윗선 하세가와(박근형)의 지시를 받은 사카모토(김희원)다. 엄복동 쪽만 해도 비, 이범수, 이경영, 박진주, 신수항, 이시언, 최대철, 민효린, 정석원, 조혜리(왁스)까지 몰린지라 벌써 버겁다.


거대한 두 줄기는 섞일 듯 섞여들지 않는다. 황재호와 안도민은 영화의 오프닝과 동시에 갈라선 탓에 둘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엄복동과 김형신의 로맨스 아닌 로맨스가 된다. 엄복동은 그저 자전차가 좋아서 경기에 참여했을 뿐,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군중을 이끌 위인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영화를 관통할 하나의 중심이 부족한 셈이다. 애국단의 비중이 연출 욕심으로 비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엄복동 쪽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시골 청년에서 구국의 우승자 사이엔 응당 ‘성장’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맞다. 그러나 영화는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묘사할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 극 중 등장하는 모든 갈등과 시련은 엄복동의 선천적인 비범함으로 극복된다. 속으로는 순박하고 착해서 화도 낼 줄 모르고, 밖으로는 페달을 밟기 시작한 지 며칠 만에 프로급 선수들을 제치는 실력을 갖췄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완벽하다. 주인공의 조력자로는 안성맞춤일지 모르나, 관객들이 자신 혹은 타인을 투영하기는커녕 실재하는 인물이라고 느끼기도 어렵다. 맞닥뜨리는 문제들은 언제든 피해 갈 수 있지만 착해 빠져서 당하는 일들뿐이라 오히려 매끄러운 전개를 방해한다. 다른 인물들과의 연계는 우연히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누군가가 나타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넘쳐나는 캐릭터들은 각자의 첫 등장에서만 존재 의의를 갖는다. 그러지 않아도 바쁜 각본은 서로가 서로와 얽혀들며 갖게 되는 감정선을 하나하나 챙겨줄 여력이 없다. 민효린, 박진주, 신수항이 대표적인 희생양이 된다. 이렇다 할 효용이나 결과물이 없음에도 끊임없이 눈도장을 찍으려 하고, 결국엔 이들이 등장하는 많은 장면이 엇박자가 된다.


모래 운동장에서 구형 자전거로 벌어지는 시합이라 시각적인 잠재력도 크지 않은데, 그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속도감과 박진감조차 기대할 수 없다. 설정 구멍들도 뒤따른다. 엄복동의 명성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 지가 언제인데, 정작 가족들은 생사조차 알지 못해 속앓이한다. 초반부터 그리 대단하지 않았던 만듦새는 후반부에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의외로 배경음악과 긴 호흡으로 소위 ‘억지 감동’을 쥐어짜 내려 공을 들이지는 않는다.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던 장면에서도 절제 아닌 절제에 성공한다. 최소한 마지막 장면까지는 그렇다. 이런 걸 언제든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대미를 장식한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지키던 마지막 위엄마저 사그라든다. 그렇게 ‘자전차왕 엄복동’은 예상했던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



THE VERDICT


자전거 경주와 독립운동이 만났다. 영 섞이지 않을 것 같던 둘은 뚜껑을 열어 보니 정말 섞이지 않는다. 인물은 넘치고 사건은 단순하다. 시골 청년이 전국구 스포츠 스타이자 구국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전개에도 어떤 쪽의 희열도 느끼기 어렵다. 예상 혹은 우려가 하나씩 맞아들 때마다 실망은 포기에 가까워진다. 태극기와 애국가로 눈과 귀를 가리려는 시도는 2019년에도 이어진다.


원문: IGN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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