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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 속에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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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그래서 어딘지 괴기스러워 보인다. 흔히 청년 세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개 절망과 포기로 수렴된다.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로 인해 우울, 좌절, 증오, 혐오 같은 현상이 얼마나 일상화되었는지가 늘 문제시된다. 그런데 정작 청년 세대가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SNS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 그곳은 언제나 밝고 희망차고 화려하다. 청년 세대에 대한 담론과 인스타그램의 간극은 마치 매트릭스의 밖과 안처럼 극명하다.

수많은 청년이 끊임없이 여행을 떠난다. 인스타그램에서는 동남아, 유럽, 미국, 남미 그 어느 나라의 어느 구석에 있는 마을이나 도시를 해시태그로 검색해도 그곳에서 웃는 청년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청년이 실시간으로 계속 업데이트된다. 마찬가지로 핫플레이스라 불리는 각종 카페나 식당은 청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몇 시간씩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커피 한 잔과 밥값으로 몇만 원씩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처럼만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하루 숙박이 수십만 원은 되는 호캉스의 주인공들도 대개 청년들이다.


사실 이 간극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는 한 청년 담론, 청년 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 간극이야말로 청년 세대가 지닌 딜레마의 핵심이자 청년들의 가장 절실한 실존적 문제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그들이 언제나 이와 같은 밝고 화려한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전시하고, 또 그렇게 전시된 이들 속에 있는 동안에만 온당한 곳에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나는 예전부터 이를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라 불러왔다.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몇만에서 몇십만 정도의 팔로워를 거느린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있다. 그런데 보면 그들이 대단한 무엇을 하는 건 아니다. 대단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크리에이터들도 아니고, 자기 삶을 전시하는 스토리텔링에 뛰어나다든지, 팔로워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제공하는 건 단지 어떤 ‘이미지에 속해 있다’는 느낌뿐이다. 이 사람을 팔로우하면 나도 뒤처지지 않고, 소외되지 않고, 흐름에서 쫓겨나지 않은 채 어떤 ‘최신의 이미지 유행’에 속할 수 있다는 위안을 느낀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계속 보면 현실감각을 묘하게 잃어버린다. 내가 속한 현실에 어떤 인지 부조화가 생기고, 삶 혹은 세계가 오직 저 밝고 화려하며 채색된 이미지들로 치환되는 듯한 경험이 일어난다. 삶이란 잘 정돈되고 단정하게 꾸며진 홈 인테리어의 순간, 잘 차려입고 멋진 공간을 거니는 순간,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는 순간,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칵테일을 마시는 순간, 어느 햇빛 드는 오전 따끈따끈한 브런치가 나온 순간으로만 구성되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들은 대체로 연출된 단 한순간의 이미지일 뿐이지, 현실도, 삶도 아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순간들은 삶의 극히 일부, 아주 잠깐의 시간들에 불과할 뿐이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실제로 그러하며, 그러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점점 심화된다는 것이다. 특히,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들의 삶을 보면, 마치 언제나 그들은 그런 이미지 속에 살아가는 것처럼만 보인다.


그 ‘이미지의 세계’란 사실 누구도 그 안에 살 수 없는 천국과 환영의 이미지 같은 것이다. 예쁜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더라도, 사실 사진을 찍는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수다와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유행하는 여행지에 가더라도, 아름다운 풍경 앞에 황홀하게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호텔의 수영장에서도 그냥 사진만 찍고 숙소로 돌아가 TV나 보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러한 이미지와 실제 삶의 간극이 일상화되면서, 어쩌면 절망과 우울, 분노가 더 극적이 되어가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삶이 실제로 놓여 있는 대부분의 시간들은 사진으로 찍었을 때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혹은 예쁜 이미지에 속해 있는 나를 보며 느끼는 쾌감이나 행복이 우리 삶에서 결정적일 수도 없다.


어떤 이미지로 전시된 자기 자신에 대한 흡족함은 결코 지속 가능한 행복이나 기쁨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초콜릿이 주는 일시적인 쾌감이나 도파민에 불과할 뿐, 우리가 실제로 먹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온전한 영역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전방위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들을 주입하고, 그 이미지를 좇으며, 그 이미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결국 그 이미지 속에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을 심어놓는다.

삶이 온전해질 가능성은 적어도 ‘타인들의 이미지’ 속에 있지는 않다. 모든 시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빼앗는데 이 시대는 확실히 사람들의 삶을 잊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활용한다. 이미지를 보고, 이미지를 좇으며, 삶을 잊어버릴 것. 삶과 현실이 놓인 실제적인 맥락으로부터 이탈될 것. 그리고 계속 위안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들에 돈과 시간을 바칠 것. 그것이 이 시대의 지상명령이고, 우리가 삶을 박탈당하는 방식이다.


청년 세대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사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다만 청년 세대가 그런 흐름을 가장 예민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또한 자본과 권력을 거의 할당받지 못한, 가장 적은 파이를 손에 쥔 청년 세대가 그런 삶과 이미지의 간극을 가장 거대하게 느낄 뿐이다.


문제는 이 간극이 계속 벌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간극을 좁히려는 여러 시도들이 생기겠지만 그런 시도가 무색할 정도로 간극은 벌어질 것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각자가 가장 절실하게 마주해야 할 진정한 전선은 그 어디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삶을 되찾기 위한 전쟁일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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