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제안서? 개발계획서? 사업계획서!

조회수 2019. 1. 10. 16:4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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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보다는 무늬만 사업가, 아마추어 개발자

연구의 시작은 연구 제안서(research proposal)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 자체가 이윤추구를 할 수가 없으므로 외부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투자하는 사람에게 어떤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 제안서를 통해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한국에서 정부가 직접 투자하는 연구과제를 국가 R&D 사업이라 하고, 이 사업을 연구원들이 수행하기 위해 작성하는 연구 제안서를 공식적으로 ‘사업계획서’라고 부른다.


사업계획서… 사업계획서라… 한 예로 최근 한국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원하는 ‘산업핵심기술개발사업’의 사업계획서의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 내용은 연구개발 사업의 종류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필자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에서 경험한 연구과제 대부분은 같은 양식이었다.)

  1. 기술개발의 목표 및 내용
  2. 기술개발 추진방법, 전략 및 체계
  3. 수행기관 현황
  4. 사업화 계획
  5. 총사업비
  6. 연도별 사업비 세부내역

물론 이 ‘사업계획서’ 작성의 하이라이트 부분은 ‘4. 사업화 계획’이다. 개발하려고 하는 기술로 어떤 사업을 할 수 있으면 그 경제적 효과는 얼마나 될 것으로 예측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적으라는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연구개발 사업에서 투자 대비 기대하는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될 것인지 이를 가늠하고 가장 효과적인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예산을 집행하는 사람(공무원) 입장으로는 사업계획서를 평가할 때 이 부분을 잘 판단하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사람도 평가하는 사람도 사업의 ‘사’자도 모르는 학생들이나 연구원들이라는 점이다.

눈물

한국의 연구는 ‘사업계획서’로 시작해서 ‘기술이전’으로 끝난다


경험상 박사과정만 되어도 벌써 머리가 굳어서 이 골치 아픈 사업화 계획을 작성하는 것이 아주 고욕이었다. 교수님은 ‘이러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이 기술로 이런 사업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답답하셨는지 ‘사업화 계획’ 부분은 창의적인 석사과정 학생들을 모아서 아이디어 회의를 하도록 하셨고, 간혹 정말 창의적인 사업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다.


반대로 이 부분이 잘 풀리면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고 발표평가를 준비하는 과정은 아주 순조로워졌다. ‘우리는 이러이러한 사업을 할 겁니다’라는 시나리오로 발표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이러이러한 기술 개발이 필요합니다’라고 주장하면 되니깐 말이다.


그런데 뭔가 찜찜한 점이 있다. 이런 사업 중심의 국가 연구과제를 그동안 많이 수행했는데, 뜻한 대로 진짜 사업으로 이어져서 경제적 효과를 창출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첫 번째 문제는 학생이나 연구자들이 작성한 사업화 계획이 현실성이 없을 경우이다. 이런 부분을 예방하기 위해서 지난 정부에서는 연구자들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 전문 경영인이나 컨설턴트 회사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정책도 있었으니(시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음), 연구자들을 돕기 위한 국가 서비스 정책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


두 번째 문제는 기술을 개발한 연구원들의 사업화 노오력이 부족한 경우이다. 하여 정부는 과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 중 하나로 ‘기술 이전 실적’을 요구한다. 연구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연구 결과가 기업으로의 기술이전으로 이어졌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사업화에 이바지한, 즉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연구를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한국에서 연구 개발한 기술의 기술 이전 실적이 있다. 관련 연구로 특허도 있고 논문도 있다.


그런데 그 연구는 그걸로 끝났다. 사업화가 목적이었기에 사업화를 위한 특허를 냈고, 특허를 내기 위한 아이디어를 냈고,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했고,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과제가 성공적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새로운 사업을 위한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 했고, 새로운 연구 조사를 해야 했다. 이런 프로세스가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주기로 반복되었다.

연구가 끝나면 또 연구가 시작된다…

한국의 국가 연구과제를 위해 제출하는 ‘연구제안서’의 이름은 ‘사업계획서’ 지만, 이 중 아마추어처럼 작성되는 ‘4. 사업화 계획’ 부분을 빼고 나면 사실 핵심 내용은 어떤 어떤 기술의 ‘개발계획서’이다. 이 부분은 ‘기술 개발의 목표와 내용’ ‘기술 개발 추진 방법, 전략 및 체계’로 되어 있다.


재미있는 건 이 계획서 어디에도 연구(research)라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대신 개발(development)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물론 많은 과제 제목에도 ‘무슨 무슨 연구’보다는 ‘무슨 무슨 기술 개발’을 선호한다. 당연히 사업화를 위한 기술은 연구 단계보다는 개발 단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제안서의 내용 역시 연구보다는 개발에 초점이 맞추어서 작성되고 과제도 이 계획에 맞추어서 진행된다.


연구? 개발? 같은 거 아니냐고? ‘개발계획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스케줄링이다. ‘누가 언제까지 무슨 기술을 개발해서, 무슨 테스트를 하고, 개발된 각 기술 부품들을 조합해서, 언제까지 최종 기술을 선보이겠다’ 하는 계획. 그리고 최종 기술은 어떠어떠한 성능을 가져야 한다. 이 개발 계획을 체계적으로, 상세하게 적을수록 그 기술이 계획대로 개발될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기술을 개발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 상세하고 체계적인 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발계획서’를 보고 그 과제를 수행하는 사람의 경험과 역량 그리고 성공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이 있다. 그것은 기술을 개발하기 전에 선행 연구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늬만 ‘사업계획서’ 내용은 ‘개발계획서’ 그럼 연구는 누가 해?


보통 연구개발(Research & Development)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선 연구 후 개발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A라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연구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되는데, 이 과정을 거치고 나야 그제야 비로소 그 A 기술을 개발하는 데 얼마 정도 시간이 걸릴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할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1. A 기술의 동향을 조사하고 목표하는 성능에 가장 근접한 최신 방법을 찾는다.
  2. 그중 몇 가지 방법을 공부하고 구현해서 적용해 본다.
  3. 문제점이 발견되면 그 이유를 찾는다.
  4. 문제 원인을 해결한 사례가 없는지 조사하거나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5. 여러 가지 가능한 방법 중 몇 가지를 적용해서 구현하고 성능 테스트를 한다.
  6. 결과가 좋으면 7번으로, 안 좋으면 1번으로 돌아간다.
  7. 논문을 쓴다.

이런 과정으로 연구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1번부터 시작해서 7번에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은, 음… 알 수가 없다. 운이 좋으면 3번에서 문제가 없는 방법을 2번에서 찾을 수도 있고(그럼 연구로서의 가치는 없다), 4번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한 번에 나올 수도 있다(이 경우도 연구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1번부터 7번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좋은 연구, 연구 가치 있는 연구를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A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계획서를 시간에 따라 잘 작성해 놓았는데 어떤 연구원이 1번부터 6번을 계속 반복만 한다면 그 기술은 계획서에 따라 제대로 개발될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실패로 판정받는 연구과제가 되고 말 것이다. 좋은 연구는 시간에 비례하지만 기술 개발은 그 반대다.


따라서 ‘기술개발’을 목표로 하는 우리나라 연구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에 대한 선행연구를 충분히 해본 적이 있는 기관이 과제를 맡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대학원생들이 국가 연구과제를 할 경우 그들은 대부분 초보 연구자들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새로운 주제의 연구개발 과제는 누구도 선행연구를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연구과제를 하는 이유는 그 기술을 아무도 개발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기관이나 대학에 연구해보라고 하는 것인데, 선행연구를 해본 기관만이 그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의 낭비에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성공하지도 못할 새로운 기술개발 연구과제(즉, 사업화를 통해 경제적 가치 창출에 이바지할 수 있는)의 수행이 가져오는 더 큰 문제는 국가 예산 낭비뿐 아니라 연구자들의 시간 낭비에 있다. 연구에 있어서 시간은 예산보다 더 중요한 자원이다.


전 세계 연구자들이 새로운 기술 연구에 매진할 때 우리나라 연구원들은 연구 단계를 건너뛰고 개발 단계에서 허우적댄다. 그것도 시간 내에 원하는 성능이 나오지 않는다면 실패로 평가받는다는 압박과 1년에 두 차례씩 돌아오는 중간평가 연차평가의 부담을 짊어진 채 말이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어찌어찌 과제를 ‘방어’하고, 그동안 찾은 문제를 정리해(3번) 정말 연구다운 연구를 해보자고 관련 연구를 찾다 보면(4번), 많은 경우 3년 전의 문제는 거의 다 풀린 새로운 기술이 벌써 나왔다. 그러고는 좌절할 때 또 다른 과제의 사업화 방안 아이디어 회의에 투입되고… 어느새 연구자보다는 무늬만 사업가, 아마추어 개발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럼 어쩌자고?


인공지능이다 4차 산업혁명이다 등등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사업화할 수 있는 관련 기술을 빨리 개발해서 성과를 내고 싶은 정부의 마음은 알겠다. 백 번 이해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어쩌다 어른’이란 프로에서 사회심리학자 허태균 교수가 말한 ‘그렇게 죽도록 했는데…’처럼, 그렇게 죽도록 열심히 국가과제를 한 것이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정체된 원인은 아닐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국가 연구과제 시스템은 연구를 위한 과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연구비를 국가의 과제비로 충당하는 현재 시스템에서는 연구과제가 오히려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가기만 할 뿐이다. 정말 연구를 위한 과제를 하고 싶다면 연구의 시작을 사업계획서나 개발계획서로 하는 게 아니라 연구제안서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짜 연구를 위한 연구제안서는 무엇이고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대신 아래 독일 연구재단(DFG)에서 요구하는 연구제안서의 양식을 첨부하며 이번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 State of the art and preliminary work (최신 연구 및 선행 연구)
1.1. List of project-related publications (과제 관련 출판된 논문)

2. Objectives and work programme (연구 목표 및 세부 내용)
2.1. Anticipated total duration of the project (기대하는 연구 기간)
2.2. Objectives (연구 목표)
2.3. Work programme including proposed research methods (제안하는 방법론을 포함한 연구 내용)

3. Bibliography concerning the state of the art, the research objectives, and the work programme (첨부 자료) 

4. Requested funds (연구에 필요한 예산)

원문: KOOSY KOO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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