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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삶은 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사회는 타당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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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삶은 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 청년이 세상을 떠났고, 그 처참함과 그를 둘러싼 비인간성 때문에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삶을 시작한다고 믿으며 노동의 현장으로 갔을 청년에게 현장은 사실 삶의 현장이 아니라 죽음의 현장이었다.


우리 사회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믿는 걸까. 혹은 사람의 죽음 따위란 괜찮다고 여기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한 해에 수천 명이나 되는 비정규직, 하청, 외주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죽어갈 일이 있을까.


효율이나 이익, 합리적이고 편리한 일 처리 따위의 정신이라는 것이 인간을 갈아 넣어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과연 그러한 것들은 수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땅에서 청년들의 삶은 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좋은 직장만 찾지 마라,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라, 경험이 곧 삶의 자산이다 같은 말들은 완전히 허무맹랑한 격언들이 되었다.


바로 그러한 기성의 요구에 따라, 그런 말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시작한 어느 청년들의 삶이 무더기로 사라져가고, 삶이 아니게 되고, 죽어서야 빠져나올 수 있는 개미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발악하고 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토익 점수를 10점 올리고, 학점을 0.5점 올리고, 한국사, 한자, 일본어, 컴퓨터, 기사 자격증을 따고, 방학에는 봉사활동을 하고, 영어 회화 스터디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혹시라도 그나마 '삶'일 수 있는 영역에서 잘못 삐끗하여 떨어져 나갈까봐,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삶으로 이르는 길이라 믿으며, 구명보트에 매달린 조난자처럼 필사적으로 견디고 있다.


그리고 그건 과잉된 강박관념이나 과도한 집착이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그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방위적으로 죽음을 담보 잡고, 죽음을 덧씌운 다음 갈아 마시고 있다.


기득권은 단지 자기가 살던 곳에 눌러앉아 있었다는 이유로 부동산 가치가 몇억씩 뛰어오르며, 부가 부를 쓸어 담고, 그 부는 다시 대물림된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청년들, 사람들은 단지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고자 목숨을 걸고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그들의 생명은 단지 언젠가 일어날, 너무나도 일어나는 게 당연한,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한 '불의의 사고'를 예정하고 있고, 그때까지만 유지될 뿐이다.


반면, 부가 부를 낳는 울타리 속에 있는 이들은 신이 된 부동산의 비호 아래 영원히 죽지 않는 천년왕국을 어느 곳보다 안전하게 누린다.


이 사회는 타당성이 없다. 엄청난 합리성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합리적인 데라고는 없다. 1000명이 지원한 공공기업 채용에서 10명을 뽑는데, 떨어진 990명의 청년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뽑힌 사람들과 뽑히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무슨 합리적인 기준이 있을까? 그들이 정말 일을 더 잘할까? 그들이 정말 더 그 회사에 어울릴까? 그들이 정말 더 뛰어나거나 훌륭할까? 아니다. 그저 '잘라야 하니까' 자르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불가항력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10명 안에 들어야 하고, 그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그저 한강 다리 폭파하듯이 나머지 990명을 버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10명은 또 사회의 유력 인사와 정치인의 로비 따위로 기존 카르텔의 재상산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런 청년들을 향해서 또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너희는 잘못되었다.'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자소서를 뜯어 고쳐주고, 자기계발의 비법을 전수하며, 올바른 생존자로 이끌어주겠노라고 호언장담하며 청년들의 시간과 돈을 갈취하는 장사치들도 있다.


경쟁에서 이기는 비법, 살아남는 방법, 그들이 만들어내는 가장 악질적인 점은 그 '생존자들'이 자신이 비로소 합리적이고 이 사회에 맞는 능력을 갖춘 인간이 되었기에 생존했다는 착각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생존한 것은 옳아서, 합리적이어서, 훌륭해서가 아니다. 단지 운이 좋았기 나름일 뿐이다. 나도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나 역시 여전히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스스로가 가엾다. 또 운 좋게 나 혼자 살아남은 게 화가 난다. 타인들의 죽음을 짓밟고 살아있는 게 화가 난다. 그러고도 살아있어야 하는 게 슬프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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