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안전'으로 유지되는 사회가 아니다

조회수 2018. 12. 28. 11: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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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수능 후 학생 관리 전수조사를 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학창시절 때 은평구에 살았다. 대성고 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봤다. 그래서 이번에 강릉 펜션으로 놀러 갔다 가스 누출 사고를 당해 숨지고 다친 대성고 학생들 이야기가 멀지 않게 느껴진다.


교육부는 수능 후 학생 관리 전수조사를 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학생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이라는 아주 간단한 점만 생각해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평소 학교에서의 교육이 '바른 것, 자명한 것, 지켜져야 할 것 그리고 시민은 그것들의 행위 주체로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등을 제일 우선시 하는 사회였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가르침 받은 대로 이미 사회가 잘 작동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덕목들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는 공동체의 기본 가치로 인식되는 사회였다면, 굳이 수능을 마친 학생들의 행동을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미 안전한데 어딘들 못 가랴.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런 것들로 유지되고 있지 않다. 학교에서 우선 순위가 나뉘는 교과목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니, 교실에서 공부인 것과 공부가 아닌 것을 나누는 기준을 보면 알 수 있다.


쇠를 깎고 와킹댄스를 추고 유튜버가 되고 남의 머리에 파머액을 바르는 것은 사회가 선호하는 주류 공교육 안에서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곁가지로만 존재하고 대부분은 소개조차 되지 않는다.


해당 분야를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넓고 깊은 지식과 이해가 필요한 지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학교 교육에 투사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형태의 개인이다.


많은 돈과 뛰어난 명성과 우러러볼 명예를 얻지 못하면 우울해지는 시대다. 매우 낮은 확률을 뚫어야 한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특출한 대접을 받아야만 살 만하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현실 가능성이 그나마 있어보이는 첫 번째는 자산의 증식이며, 자산의 증식을 위해서 그나마 안전한 길이 고액 연봉자가 되는 길이다.


고액연봉자가 될 수 있는 가성비 높은 방법이 높은 학벌과 학력의 성취이며, 그 성취를 위해 그럭저럭 개인의 능력 신장에 기대하는 방법이 수능이고, 그 수능을 위해 중고등 공교육이 복무한다.


그리고 이 길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유치원 이전부터 부모의 머릿속은 온갖 계산들로 복잡하다. 그 부모들은 미혼 시절 이런 미래를 염두에 둔 결혼 시장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부모들과 갈등과 협력을 통해 이를 배우며 커간다.


이 과정 어디에도 '바른 것, 자명한 것, 지켜져야 할 것 그리고 사회에서 시민은 그것들의 행위 주체로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가 낄 틈이 없다.


어떤 직업을 갖든 이 덕목들을 준수하기만 해도 존경받는 사람으로 대우받는 사회라면 교육의 틀이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아니, 존경은 고사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경쟁력 약한 머저리'로 비하만 받지 않는대도 좀 나을 것이다.


그랬다면 펜션 주인이 시공경비를 줄이기 위해 무자격자를 불러 보일러를 놓는다거나, 그 무자격 시공자가 싼 노동력에 어울리는 부실시공을 하여 가스가 누출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회의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 곳에 부실한 교육이 있고, 부실한 교육이 있는 곳에 사회의 미온적인 가치 인식이 있다. 가치 인식을 거둔 곳에는 공공 제도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나라 공교육은 실질적으론 하나의 거대한 직업교육이며 단 하나의 직업만을 강제한다. 그건 '사무실서 일하는 안전한 고액연봉자라는 직업'인데, 그 아래에 수백 개의 종속 직군이 있더라도 어차피 사무실 고액연봉자라는 단 하나의 직업으로 가름할 수 있다. 그 외의 길을 걷겠다면 부모와 사회가 나서서 가혹한 고문과 형벌을 준다. 10대 20대 청소년들은 일찍이 여기에 눈을 뜨고 있다.


최근에 20대 남성들의 대통령 지지율이 눈에 띄게 낮아진 게 화제가 됐다. 발표한 리얼미터가 응답자들에게 페미니즘에 관해 동시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20대 남성들은 페미니즘의 전진과 대체 복무 합헌 등 성별과 관련한 갈등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성갈등 해결을 위해 드러내는 새로운 인문/인식체계로 인해 바뀌게 될 것들이, 그나마 익숙하게 준비돼 있던 기존세계를 허물어뜨리기 때문이다.


일부 극단적 여성 운동자들의 과격함을 전체 여성주의에 대입하여 모조리 말살하고 말겠다는 태도를 보이기만 하고, 인권에 대한 기초적인 접근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 그들 사이에 득세하는 건 이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정교한 논리적 경쟁을 목적으로 뒀다면 핀셋으로 논점을 하나씩 짚어나갔겠지만, 그들은 광범위하고 거친 뭉갬을 즐긴다. 이는 이미 기존 세계의 계급론에서 태생적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자신들이 더욱 고통의 나락으로 빠질 거라는 강한 불안이 있음을 암시한다. 때문에 체계적이고 정합성 높은 논리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강한 불안이 강한 공격성을 낳았고 기원은 다르지만, 이는 양 진영의 극단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다만 여성들은 전과 특별히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이지만, 남성들은 전과 확연히 달라져 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20대 남녀의 지지율에 큰 차이가 생겨난다. 이건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불과 얼마 전까지 10대였던 그들이 공동체 삶에서 필요한 가치관이라곤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는 공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와 보니, 사회가 자신을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심각한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부실교육의 근원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에게 이는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대개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인간성의 부재에 대한 물음에는 일절 답해주지 않는 사회와, 그 사회의 구조가 요구하는 바를 투사한 학교과정을 거쳐온 이들은 그렇게 양산된다. 정확히 말해 이는 전부 사회라는 가장 큰 학교가 가르친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어서 깊이 있는 정보를 주고받으며 곱씹어 볼 여력이 없다거나, 주장이 당위에서 이미 엇나가 지적으로 게으른 사고의 결과라거나, 그들의 정부에 대한 저항은 사실관계가 잘못돼 근거가 없다거나 하는 진단들은 모두 표층의 정서를 다룰 뿐이다.


그런 것들은 원인이나 이유가 아니라 현상이다.20대의 그들이나 50대의 장년층이나 하루가 고되긴 마찬가지이고, 논리추구란 건 어느 세대에서나 귀찮고 시끄러운 일이다.


그들은 50대 운전 기사에게 막말을 하고도 평생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도록 노력하지 않고선 자신들이 앞으로도 철저히 계급 하위에 복무해야 할 운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비해 20년 이상 전 생애를 바쳐 사다리에 오를 준비를 해 왔다. 그들 위의 층층이 나이 먹은 세대들은 그 지형을 담은 지도의 효력이 왕성하던 걸 기반 삼아 잘 살아냈다.


그런데 사다리를 표시한 지도를 찢자는 움직임이 사회에서 대두된 것이다. 그러면서 청년들에게는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어떠한 기초적인 가르침도 주지 않았다. 가장 황당한 것은, 사회가 계속해서 가르친 범위 안에서만 인생시험 문제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환경에서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20대 남성들의 인식에 반인권적 사고나 불평등의 수용 등이 거침없이 퍼져가는 것이야말로 현실과 관련 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최선의 저항을 함으로써 최소의 자리라도 지키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를 생존이라고 봤을 때, 누구도 그들을 욕할 자격이 없다. 당신이 대신 살아줄 것인가. 청소년/청년들과 맞물린 문제들은 모두 지금껏 사회가 유지해 온 구조의 자기복제가 시대와 마찰하며 일으키는 현상이다.


자, 그러니 교육은 미래의 해답이 될 수 있겠지만, 바로 그 교육의 해답은 오늘의 사회에서 찾아야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개인의 정의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개인에게 제공되는 교육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먹고살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하다. 동시에 행복한 삶도 중요하다. 행복을 위해선 공동체의 부유함도 중요하다. 21세기까지 온 마당에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버릴 순 없다. 각자는 공동체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충실한 삶을 사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대한 기여와 자신에 대한 기여란 측면에서, 가장 살펴야 할 현실적인 지점은 '개인의 무엇이 생산성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다.

그게 영어나 수학이 아니란 사실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의 문제들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의학이나 법학에 진학하는 것도 답이 안됨을 잘 알고 있다. 한 개인의 지능이나 타고난 감각 혹은 그것들이 미비했을 때 끌어올릴 수 있는 자본 등이 행복의 핵심 가치이던 시대는 분명 지나가고 있다. 그런 것들은 심지어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기여를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나는 '선택의 힘'에 집중하자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개인의 생산성의 근원이 되어 줄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고 본다. 다른 생물들과 비교해 인간의 선택은 특별한 점이 있다. 인간의 선택은 가장 불합리한 감정의 끝에서 가장 결과가 좋은 이성적인 결론 사이에 있다.


화성에 로봇을 보내기도 하지만, 영 말도 안 되는 잘못된 선택으로 수백만 명을 죽이기도 한다. 그래서 논리에 집착하는 인류의 여행은 언제나 자신의 오류를 최소한으로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그런데도 인류는 늘 감정의 끈을 놓지 못하고 당위와 상관없는 층위에서 선택을 즐긴다.


반면 인공지능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가장 말이 되는 결과를 찾아낸다. 인간의 지난 사고 여정을 흉내 내기 때문에 그렇게 학습하도록 설계될 수 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오류를 줄이고자 하는 인류의 노력을 필함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오류나 실수는 인간처럼 부정확한 감정의 해석으로 인한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그때까지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수가 가진 정합성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생겨난다. 그러니 불명확한 감정의 개입을 토대로 결론이 부정확해지도록 만들 이유가 없다. 재미나게도 인간 특유의 선택오류가 절대적으로 배제된 인공지능이 최선의 결론을 낼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선택이다.


앞으로도 인간의 선택이 중요한 건 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훗날 인간의 감정까지 베낀 인공지능이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보이며 생존방법을 제안할 때,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제외한 다른 주체의 의지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선택이 최종 결재 도장이 될 것이며, 이를 벗어나는 시스템의 개발은 공동체에 의해 빈번히 가로막힐 것이다. 아마 무력을 써서라도 막아낼 것이다. 존 코너는 언제나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선택은 인간 고유의 특질이자 몫으로 남게 된다. 경제활동의 수많은 지점에서 개인들의 선택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거래처 사장에게 내기 골프를 져줄 것인지 이길 것인지 고민하며 골프채를 고르는 장면도, 내일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데 술자리에 썸 상대가 앉아 있고 경쟁자가 한 무더기라서 새벽까지 마실지 말지를 갈등하는 것도, 다 로그인 서버에 코딩 한 줄을 넣을까 말까 하는 만큼이나 무거운 선택이다.


게다가 삶의 상세한 부분에선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하거나, 선과 악의 구분이 흐릿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서로의 선택을 절대 제어하지 못하며 다만 다자간의 선택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하게 될 뿐이다.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들, 경제적 활동들은 그런 것들의 얽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이 매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모여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가 다시 한 개인이 살면서 선택해야 할 대상의 성격을 특정한다. 


그 때문에 하나의 사건에는 수천 지점의 선택 결과가 얽혀있다. 이로 인해 공동체 삶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그게 모여 공동의 생산성이 된다. 개인이 직무뿐 아니라 생활의 모든 지점에서 하는 선택들은 토익 만점보다 몇 배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이 자신과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개인의 생산성이란 결국 이 고민을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를 오래 수련하여 가치관이 잘 다듬어진 사람이 여러 적대적 환경에서도 생산성이 높다.


누구나 알다시피 잘 다듬어진 가치관은 잘 다듬어진 신념을 낳으며, 잘 다듬어진 신념은 좋은 태도를 낳고, 좋은 태도는 매번 좋은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정 과목의 우수한 소수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기업이 생산성을 올리고 싶다면 기본적으로 이런 사람을 선택하면 된다. 기업이 선택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들을 선택하면 대학교는 그런 졸업생들을 배출할 것이고, 대학교에서 중시하는 학업이 바뀌게 되어 입시 과목의 본질이 바뀔 것이며, 그러면 중고등 학교에선 가르치는 교과서와 내용이 바뀔 것이며, 궁극적으론 기업과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의 힘과 직업 사이의 관계를 배우는 게 교육이 된다면 학생들은 학업에서도 지금보단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순환이 없는 장면을 곳곳에서 보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고통받고, 공교육은 무너지고, 기업은 생산성이 떨어지고, 혁신은 안 되며, 창의성도 떨어져 가고, 제도는 바뀌지 않으며, 공공기관엔 변화가 없고, 사회는 불안하다.


'무엇을 선택하는 게 최선일 것인가'를 익히는 건 성장하면서 오랫동안 깊이 있게 고민하고 수련할 문제이기 때문에 박사학위까지 받을 일도 아니다. 전교 1등이나 전교 꼴찌나 모두 적절히 훈련받을 수 있으며 공교육 내에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이걸 학원에서 가르쳐야 하는 거라면 그건 아주 완벽하게 전혀 엉뚱한 걸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기업이 인재의 정의를 바꿀 때가 됐다. 사회가 인재의 정의를 바꿀 때가 됐다.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거기에 집중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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